[스브수다] 꾸준한 배우 정희태 "과정을 즐기다 보면, 언젠가 멀리 가지 않을까요"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좋은 드라마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주연 배우가 대중의 마음을 휘어잡는 매력으로 극을 잘 이끌어 가야하는 건 당연한 이야기다. 그리고 여기에, 비중은 작아도 조연, 단역들이 탄탄한 연기력으로 극의 토양을 잘 다져 주는 것 또한 중요하다. 메인 요리가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기본 반찬이라 여겨지는 김치가 맛이 없다면 그 상은 잘 차려진 상이라 볼 수 없지 않나. 그만큼 조연 배우들의 안정적인 연기는 그 작품의 높은 완성도를 위한 필수 요소다.
최근 화제 속에 막을 내린 JTBC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이 시청자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배우들의 연기력이었다. 주·조연을 막론하고 모든 배우들이 펼쳐낸 아름다운 연기력의 향연은 시청자가 일주일에 세 번이나 이 드라마를 끝까지 보게 한 힘의 원천이었다.
배우 정희태도 '재벌집 막내아들' 흥행의 숨은 주역 중 하나다. 그는 극 중 순양 진양철(이성민) 회장 곁에서 모든 걸 함께 하는 비서실장 이항재 역으로, 적재적소에서 극 전개에 힘을 보탰다. 때론 극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말로 설명하는 해설자였고, 때론 진양철 회장의 의중을 전달하는 대변인이었으며, 마지막에는 진도준(송중기)을 배신하며 반전의 킹메이커 역할도 했다.
정희태가 안정적인 연기력으로 '재벌집 막내아들'이란 퍼즐의 한 조각을 편안하게 메운 건, 사실 그리 낯선 일은 아니다. 그는 배우로 데뷔하고 지난 20년동안, 들어가는 작품마다 언제나 성실하게 제 몫을 톡톡히 해 왔다. 그렇게 오랜 시간 다져온 꾸준함이 이번 '재벌집 막내아들'에서도 발현된 것 뿐이다.
그동안 정희태가 출연한 영화, 드라마 수를 합치면, 무려 90개에 달한다. 연차든 작품수든, 배우로서 어딜 내놔도 빠지지 않는 경력이다. 그런데 정희태는 '완성형 배우'가 되려면 아직 멀었다고 스스로 이야기 한다. 자신은 여전히 배우고 성장하는 과정 위에 있고, 그 과정을 즐기면서 연기할 뿐이라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 저 멀리 목표하는 곳에 도착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연기에 임하고 있다. 배우 정희태의 꾸준함, 그 바탕에 품은 낭만이 아름답다.
▲ 진양철과 이항재, 그리고 이성민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정희태가 연기한 이항재는 진양철의 오른팔로, 거의 모든 장면에 함께 등장했다. 진양철과 이항재는 기업의 총수와 비서실장 관계를 넘어, 때론 아버지와 아들 같기도, 때론 끈끈한 친구 같기도 했다. 이런 두 사람의 긴밀한 관계성은 '재벌집 막내아들' 애청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이항재는 순양이 한 기업의 모양새를 갖추기 전, 그저 작은 회사일 때 들어와 본부장까지 된 입지적인 인물이에요. 창업 때부터 회사를 같이 키워오며, 진양철과 이항재는 즐거운 것도 힘든 것도 함께 동고동락해 왔죠. 그래서 두 사람은 일반적인 회사내 상하관계와는 다를 거라고 생각했어요. 항재는 회장님 곁에 있으면서, 그가 총수로서 많은 사람들을 책임져야한다는 압박감을 얼마나 느낄지, 사람들을 살갑게 대하지 않는 그 이면이 얼마나 외로울지, 누구보다 그의 의중을 잘 알고 이해하는 인물이었죠. 그래서 단순한 조력자가 아니라, 회장님이 무너지지 않게 잡아주는 동료였어요. 때론 친구 같기도, 때론 아버지와 아들 같기도 했고요. 그런 두 사람의 관계성을 시청자 분들이 좋게 봐주신 거 같아요."
카리스마 가득한 기업의 총수로 '괴팍한 늙은이'라는 소리까지 들으며 자식조차 믿지 않았던 진양철이 유일하게 신뢰했던 존재 이항재. 이런 두 사람의 남다른 관계성은 경상도 사투리로 편하게 대화를 주고받을 때 돋보였다. 진양철에게 표준어로 업무 보고를 하던 이항재가 갑자기 사투리로 대화를 건넬 때면, 그 장면이 전달하고자 하는 정서가 한순간에 달라졌다. 이항재가 진양철의 큰아들 진영기(윤제문)에게 반말을 하던 장면에도 다른 의도가 깔려 있었다.
"회장님과 대화할 때, 밀도가 있거나 정서적으로 의미가 큰 장면들은 사투리를 썼어요. 오래 전부터 같이 해온 사이라는 맥락에서, 그런 변화를 줬죠. 영기랑 만났을 때 반말을 하던 장면도 원래 대본엔 반말이 아니었는데, '이럴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으로 시도해 본 거예요. 평소에는 회장님과 같은 가족으로 모셔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진심으로 순양을 걱정하기에 형 같은 마음으로 그렇게 편히 말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정희태는 이성민과 인연이 남다르다. '미생', '형사록'에 이어 '재벌집 막내아들'이 이성민과 함께 호흡하는 세 번째 작품이다. '미생' 때는 갈등 관계에 놓인 캐릭터를 연기해 서로 으르렁댔지만, '재벌집 막내아들'에서는 끈끈한 사이를 연기했다.
"이항재와 진양철을 연기하며, 이성민 형님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자 했어요. 형님은 많은 사람들이 '재벌은 이렇다'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재벌이 이렇다고?'라고 느끼게 진양철을 표현하고 싶어 했어요. 저도 거기에 공감했고요. 형님이 연구를 많이 해오셨고, 대화도 많이 나눴죠. 저도 그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서로 초면이었던 '미생' 때 티격태격 하는 관계를 연기하고, 시간이 지나 친해진 지금 진양철과 이항재를 연기한 것도 도움이 된 거 같아요."
극 중 진양철은 건강이 악화되며 갑작스러운 섬망 증세로 주변을 충격에 빠드렸는데, 이성민의 신들린 듯한 섬망 연기는 시청자의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들었다. 진양철의 섬망을 곁에서 가장 먼저 목격한 이항재의 충격도 이루 말할 수 없었을 터. 억장이 무너진 듯한 정희태의 연기 또한 이 장면에 설득력을 더했다.
"그 장면은, '뭘 보여주겠다'라며 머리를 굴리고 싶지 않았어요. 순간적으로 느끼는 바들을 표현하고 싶었죠. 제일 먼저 놀랐을 테고, 그 놀라움이 걱정으로 변하고, 앞으로 어떻게 될까 생각하게 되는, 그런 생각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연기하고자 했어요. 그래야 그걸 지켜보는 시청자도 '연기하고 있네?'라는 그런 느낌이 안 들테니까요. 그런 자연스러움이 중요한 거 같아요."
▲ 좋은 배우들을 만난건 '행운'
진양철이 세상을 떠난 후, 이항재는 진도준을 배신하고 진영기-진성준(김남희) 부자의 곁에 섰다. 물론 다시 진영기-성준 부자에게 버림받긴 하지만, 믿었던 이항재의 배신은 드라마 후반부의 큰 반전이었다. 이런 이항재를 연기한 정희태는, 이 역시 순양과 진양철을 생각한 '큰그림'이라 해명(?)했다.
"이항재의 배신은, 저한테도 복잡하고 연기하기 어려운 부분이었어요. 이 역시 돌아가신 회장님의 큰 그림이라고 생각했죠. 나중에 진양철 회장이 남긴 유언 영상을 보면 '날 밟고 가야 진정한 순양의 주인이 된다'고 하잖아요? 그거랑 궤를 같이 한다고 생각했어요. 도준이에게 가장 큰 시련을 주려는 게 아니었을까, 그러려면 항재만한 사람이 없었을 거다, 싶었죠. 회장님이 기준으로 삼은 엄격한 기준을 통과하려면, 도준이를 각성시키기 위한 회장님의 큰 그림이 아니었을까, 생각했어요. 결국 항재가 도준이에게 비자금을 남겨주잖아요? 그 비자금은 아무도 존재를 모르는 돈이라 누구 손에 들어가도 상관 없는 것이고, 항재가 그냥 가져도 되요. 그런데 도준이한테 전해주잖아요. 그게 항재의 진심일 거라 생각했어요."
연기 잘하는 배우들이 즐비했던 '재벌집 막내아들'. 정희태는 그 안에서 다른 사람의 연기를 보고 느끼며 반응하는 '연기적인 화학작용'에 주목했다. 이보다 더 좋은 배움터는 없었다.
"좋은 배우들이 많아 좋은 시너지가 나왔던 현장이죠. 전 지금도 '연기를 잘 하는 게 뭘까'를 고민해요. 제 감각은 열려있고, 다른 이의 연기를 잘 보고, 잘 듣고, 잘 느끼고, 거기에 잘 반응하는 거, 그런 연기적인 화학작용의 연속에 고민이 많아요. '재벌집 막내아들' 촬영장은 좋은 배우들이 있으니, 그들의 연기에 반응하기에는 좋은 여건이었죠. 좋은 배우들을 만날 수 있었던 건 행운이라 생각해요."
정희태가 생각하는 '좋은 배우'에는 주연 진도준/윤현우 역을 소화한 송중기도 포함이다. 그는 주연 배우로서 송중기를 높이 평가했다.
"제가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가, 도준이가 미국을 다녀온 후 할아버지에게 인사하겠다며 기다리다가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임원들과 마주치는 장면이 있어요. 다른 사람들한테는 도준이가 불청객 같지만, 항재 입장에서는 오랜만에 만나는 자기 조카 같은 느낌일 거예요. 도준이에게도 항재는 친근한 삼촌 같을 테고요. 그런 관계성을 크게 드러내지 않고 가볍게 인사를 하며 지나가는 장면인데, 송중기 배우는 저하고만 눈을 맞추며 웃더라고요. 거기서 연기에 감각이 있는 친구라 생각했어요. 송중기 배우는 촬영 현장에서 멋있고, 훌륭한 청년 같은 느낌이었어요. 외모만 보면 늙지 않는 피터팬, 소년 같은 느낌인데, 겪어 보며 남자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런 대비되는 느낌이 송중기란 배우의 매력이 아닐까 싶었죠."
'재벌집 막내아들'은 현재에서 1980년대로 돌아가, 실제 사건들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되짚는 매력을 지닌 드라마였다. 1988년 서울올림픽, 1997년 IMF, 1999년 Y2K, 2002년 월드컵 등 사회적 사건들과 그로 인한 경제 변화가 실감나게 그려지며, 누군가에겐 그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이 시대를 직접 겪은 정희태도 마찬가지였다.
"저도 몇몇 장면은 그걸 경험했을 때의 시기로 돌아가는 느낌을 받았어요. 9.11테러와 그 이후의 경제적인 이야기를 끌어갈 땐, 제가 실제로 9.11 테러 장면을 TV로 보며 충격 받았던 그 때의 감정이 생각나더라고요. 다른 장면들에서 향수를 느끼기도 했고요."
정희태는 극중 진도준과 실제로 비슷한 또래다. 그래서 진도준의 대학 생활과 사회적 배경에서, 자신의 20대 시절이 더 떠올랐을 수도 있다. 특히 중앙대학교 신문방송학과 1년 후배로, 같이 학교를 다닌 배우 김영재와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같이 연기 호흡을 맞춘 게 과거의 향수를 더 자극했을 터다. 김영재는 이 작품에서 진도준의 아버지 진윤기 역을 소화했다.
"영재랑은 대학교 때 '또아리'라는 연극학회에서 같이 연기를 했어요. 영화 데뷔작 '해안선'에도 같이 출연했고, 그 이후에도 여러 번 같은 작품을 했죠. 그래서 지금도 막역한 사이에요. 같이 공연도 보고, 연기적인 고민도 나누고, 서로 연기 모니터도 해줘요. 오래된 친구고, 언제나 서로를 응원해요."
▲ 목표보다 과정을 즐기는 배우
2002년 데뷔해 어느덧 배우로 지낸 세월이 20년이다. 그 세월 동안 정희태는 배우로서 자신의 역할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면 어디든 갔다. 그렇게 참여한 드라마, 영화 작품이 무려 90여개. 그에게 '다작'의 이유를 물었다.
"솔직히 시간이 맞으면 하는 거죠.(웃음) 전 제가 배우로서 완성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매번 새로운 역할을 접하며 계속 성장하고 배워 나가는 과정이라 생각해요. 그러면서 좋은 작품을 만날 수도 있는 거고요. 그런 의미에서 '재벌집 막내아들'은 저의 연기적인 성장에 큰 영향을 준 작품이라 생각해요."
정희태에게 2022년은 특별하다. '재벌집 막내아들'도 잘 됐고, 고민 끝에 참여했던 연극도 무사히 무대에 올렸다. 그래서 그에게 2022년은 '선물' 같은 해로 남았다.
"상업영화 데뷔 시점부터 치면, 2022년은 연기자로 데뷔한 지 20년이 된 해였어요. 2022년에는 '재벌집 막내아들', 그리고 연극 '가면산장 살인사건'이 제게 선물처럼 왔던 해라 생각해요. '가면산장 살인사건'은 오랜 시간 고민해서 무대에 올린 연극이라, 애착이 남다른 작품이거든요. 2023년도, 앞으로도, 매년 이렇게 선물 같은 작품, 선물 같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마지막으로 정희태에게 연기적으로 이루고 싶은 꿈이나 목표에 대해 물었다. 그는 "목표보다 과정을 즐기고 싶다"며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목적지를 두고 걷는 사람과, 목적지를 두지 않고 걷는 사람이 있어요. 누가 더 멀리 갈까요? 목적지를 정해두고 가는 사람은, 목적지에 다다르면 도착했다는 안도감도 있지만, 허무함도 같이 느낀다고 해요. 반면 걸어가는 과정 자체를 즐긴 사람은 더 멀리 갈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목표보다 덜 갈 수도 있고, 걸어가다가 넘어질 수도, 도랑에 빠질 수도 있어요. 그럼 한바탕 웃으면서 실패는 실패한 대로 넘기고 다시 즐기면서 걷다 보면, 언젠가 누구보다 멀리 가지 않을까요? 전 연기하는 과정이 그러고 싶어요. 쭉 즐기면서, 힘이 닿는데 까지, 그렇게요."
[사진=빅보스엔터테인먼트, '재벌집 막내아들' 스틸컷]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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