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규의 사람아 사람아] 아버지들의 유해가 세상 밖으로 나오던 날

김봉규 2023. 1. 17.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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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규의 사람아 사람아]제노사이드의 기억 대전 골령골 _02

해가 기울자 더 많은 유해가 쏟아져 나왔다. 대부분 부서져 잘려나간 나뭇조각처럼 돼버린, 한 구덩이에 어림잡아 백여구 넘어 보이는 유해들이 겹겹이 쌓여있었다. 바스러진 유해 가운데 두분의 유해가 그나마 온전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서로 마주 보며 옆으로 누운 채였다. 두개골 바로 옆에서 M1개런드 소총 탄피들이 함께 발견됐다.

2015년 3월1일 남한 최대 민간인 학살터 대전 산내면 골령골에서 겹겹이 쌓여 바스러져 있는 유해들 가운데 두 분의 유해가 그나마 온전하게 드러났다. 서로 마주 보며 옆으로 누운 채 발굴이 되었다. 두개골 바로 옆에서 M1개런드 소총 탄피(사진 오른쪽)들이 함께 발견됐다. 유해발굴단이 미리 준비한 국화꽃을 바치고 영혼을 달랬고, 주변에 있던 모두가 잠시 고개를 숙이고 묵념했다. 김봉규 선임기자

지난 2015년 3월1일 이른 아침, 계곡에서 불어오는 바람에는 싸늘한 기운이 가득했다. 사람들은 모여 모닥불을 피우며 몸을 녹이고 있었다. 첫 유해발굴을 앞두고 있던 한국전쟁 당시 남한 최대 민간인 학살터 대전 골령골 골짜기를 찾았을 때 맞닥뜨린 풍경이다.

본격적인 유해발굴에 앞서 개토제가 열려 토지신에 술 한잔을 올렸다. 곧이어 굴착기가 굉음을 내며 미리 횟가루로 표시해둔 검붉은 땅을 파 내려가기 시작했다. 굴착기가 어느 정도 흙을 걷어내자, 사람들이 내려가 삽으로 흙을 퍼내기 시작했다. 발굴단원들이 흙이 담긴 양동이를 발굴구역 바깥으로 내놓으면, 다른 요원들이 이를 받아 근처에 흙을 쏟아낸 뒤 빈 양동이를 다시 건넸다. 유가족으로 보이는 머리 희끗희끗한 이들이 양동이 옮기는 데 힘을 보태고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유해발굴 나흘째부터 유해들이 차츰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구덩이에서 대퇴부 등 큰 뼈들이 보이기 시작하자, 발굴단원들은 작은 호미와 부드러운 붓으로 조심스레 유골 주변과 유골들 사이 흙을 걷어냈다. 긴가민가 초조한 표정 속에서 현장을 지켜보던 유가족들은, 유해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담담하면서도 어두운 낯빛으로 바뀌었다. 유가족뿐 아니라 발굴현장 주변 모든 이들이 숨 쉬는 것조차 조심스럽다는 듯이 긴장해 있었다.

사랑하는 가족 중 누군가 어느 날 느닷없이 군경에 끌려가 학살당했다면 어땠을까. 뒤이어 여럿과 함께 죽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만 들려올 뿐, 주검조차 찾을 수 없고 아무런 소식도 없이 수십년을 살아야 했다면 어땠을까. 실제 유해조차 찾지 못한 한국전쟁 때 민간인 행방불명자는 남한에만 무려 30만3천여명(1955년 내무부 통계국)에 이른다. 그 가족들은 한평생 어떻게 살아왔을까 생각하니 먹먹하기만 했다.

정신병리학자 노다 마사아키는 대형참사 유족의 슬픔을 담은 <떠나보내는 길 위에서>에서 유가족이 희생자 주검을 확인하는 과정을 프랑스 정신분석가 다니엘 라가슈의 말을 빌려 ‘죽은 사람을 죽이는’ 상(喪)의 작업이라고 썼다. 하지만 골령골을 비롯해 한국전쟁 때 남과 북의 총부리에 학살당한 유가족들은 65년 전 갑자기 가족이 끌려갔고 죽었다는 소식만 전해 들었을 뿐, 관에 매달려서 통곡할 기회조차 가질 수 없었다. 어쩌면 남과 북 어딘가에 살아있을 수도 있다는 기대를 마음 한구석에 묻어둔 채 한평생을 살아왔을지도 모른다.

해가 기울자 더 많은 유해가 쏟아져 나왔다. 대부분 부서져 잘려나간 나뭇조각처럼 돼버린, 한 구덩이에 어림잡아 백여구 넘어 보이는 유해들이 겹겹이 쌓여있었다. 바스러진 유해 가운데 두분의 유해가 그나마 온전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서로 마주 보며 옆으로 누운 채였다. 두개골 바로 옆에서 M1개런드 소총 탄피(사진)들이 함께 발견됐다.

당시를 상상하건대, 학살 지휘관의 발사 명령과 동시에 총소리가 자신의 귀에 들려오기도 전에 총탄에 맞아 먼저 끌려와 희생된 주검더미 위로 고꾸라졌을 것이다. 현장에 있던 유가족들은 자신들의 부모의 유해를 보기라도 한 듯 긴장한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유해발굴단이 미리 준비해뒀던 하얀 국화꽃 다발을 유해 옆에 살며시 가져다 놓았다. 학살 터 주변 모든 사람이 잠시 고개를 숙여 묵념했다. 누구의 아버지 유해인지 모르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발굴현장에 있었던 모든 유가족의 아버지였다.

학살 터 부근엔 희생자들의 극락왕생을 비는 글귀와 함께, 골령골 집단학살 순간의 현장 사진들이 펼침막에 내걸려 있었다. 재미사학자 이도형 박사가 1999년 12월 미 국립문서기록원(NARA)에서 비밀문서로 분류됐다가 해제된 자료 속에서 찾아낸 것들이었다.

여순사건유족협의회 김화자(76)씨는 지난 2013년 국가를 상대로 소송에서 “우리 아버지는 대구형무소에서, 외삼촌은 대전형무소로 끌려와 죽었다고 하니까 정부 측 대표로 참석한 새파란 군인(군의관)이 ‘가족들 보는 앞에서 죽었냐, 죽는 걸 직접 보았냐’고 다그치며 말하던 게 지금도 끔찍하게 기억이 난다. 오늘 이 학살 당시 현장 사진들을 보니 우리 어르신들이 죽기 전에 컴컴한 골짜기에서 얼마나 두렵고 무서웠겠냐, 하는 생각이 든다”며 학살 현장 사진들을 어루만졌다. “아이고, 아이고, 아버지”라며 한 맺혀 울부짖던 눈물 젖은 목소리가 지금도 귓전에 맴돈다.



김봉규 | 사진부 선임기자
다큐멘터리 사진집 <분단 한국>(2011), <팽목항에서>(2017)를 출간했다. 제주 4·3 학살 터와 대전 골령골을 비롯해 전국에 흩어진 민간인학살 현장을 서성거렸다. 안식월 등 휴가가 발생하면 작업지역을 넓혀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비롯한 아시아, 폴란드 전역과 독일, 네덜란드, 체코, 오스트리아 등 나치 시절 강제 및 절멸수용소 등을 15년 넘게 헤매고 다녔다.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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