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향 새 지휘봉 야프 판즈베던…“90% 역량 내려면 110% 연습하라”

허진무 기자 2023. 1. 17. 18:2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서울시향 차기 음악감독인 야프 판즈베던이 지난 13일 서울 송파구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서울시향 정기공연에서 지휘하고 있다. 서울시립교향악단 제공

세계적 지휘자인 야프 판즈베던(63)이 서울시립교향악단 차기 음악감독으로서의 행보를 시작하며 “카멜레온처럼 다양한 색채를 내는 오케스트라를 만들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오케스트라 트레이너’라는 별명을 가진 그는 “최고 수준의 오케스트라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철저한 훈련이 필요하다”며 “무대에서 90%의 역량을 발휘하기 위해선 110%를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시향 첫 공연서 ‘판즈베던의 발소리’

판즈베던은 17일 서울 중구 세종문화회관 서울시향 리허설룸에서 기자들과 만나 “한국의 최고 오케스트라인 서울시향과 함께 작업하는 것은 영광”이라고 했다. 그는 “지휘자로 전 세계 오케스트라와 연주하면서 뛰어난 한국인 연주자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클래식의 미래에 아시아가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서울시향을 선택한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고 말했다.

서울시향 ‘판즈베던호’는 지난 12~13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서울시향의 새해 첫 정기공연에서 브람스 교향곡 1번으로 돛을 올렸다. 브람스가 ‘악성(樂聖)’ 베토벤과 정면 대결하듯 작곡한 대작이다. 도입부에서 쿵쿵 울리는 묵직한 팀파니 소리는 흔히 거인(베토벤)의 발소리에 비유되지만 이때 공연에선 판즈베던의 발소리처럼 들렸다.

판즈베던은 이어 바그너의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전주곡, <트리스탄과 이졸데> 전주곡과 ‘사랑의 죽음’,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오페레타 <박쥐> 서곡을 지휘했다. 앙코르 연주로는 드보르자크의 <헝가리 무곡> 작품번호 46의 8번을 택했다. 차기 음악감독의 등장을 알리듯 공연은 전반적으로 섬세한 면보다는 강력한 기세가 돋보였다.

판즈베던은 한국을 두고 “고향에 온 기분”이라고 했다. 16세 때 미국 뉴욕 줄리아드음악학교에서 수학할 당시 스승이 한국인인 강효 교수였다. 판즈베던은 “강효 선생님은 제 삶에 어떤 선생님보다 많은 영향을 줬고 제가 매우 존경한다”며 “직업 윤리와 여러 면에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해주셨다”고 했다.

엄격한 리더십…“단원 누구도 좋아하거나 미워하지 않는다”
서울시향 차기 음악감독인 야프 판즈베던이 지난 10일 서울 중구 세종문화회관 서울시향 리허설룸에서 연습을 지휘하고 있다. 서울시립교향악단 제공

판즈베던은 엄격한 지휘와 치열한 훈련을 강조하는 리더십으로 유명하다. 서울시향 단원들도 판즈베던과 직접 만나기 전까지 그의 리더십에 두려운 마음을 품었다고 전해졌다. 판즈베던은 지난 12일 오세훈 서울시장과 점심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도 “몇몇 단원이 나를 무서워하는 것은 꼭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어쩌면 건강한 오케스트라를 위해 조금은 필요한 부분이다. 저는 단원 그 누구도 좋아하거나 미워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판즈베던은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연주자가 더 나은 연주자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리더십에서 가장 중요하다”며 “제가 때로는 리허설에서 엄격할 수 있지만 개인적 감정은 없으며 음악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판즈베던은 전설적 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민주적 리더십’에 대해선 “아바도 스타일의 리더십에 대해 매우 동의하는 편이고, 연주자를 존중하는 민주적인 오케스트라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오케스트라를 피라미드에 비유하며 ‘연주자’ ‘작곡가’ ‘지휘자’ 순으로 중요하다고 했다.

판즈베던은 “오케스트라는 무대 위의 가족”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제가 지휘를 시작한 38세 때부터 지금까지 저는 한 명의 단원도 해고한 적이 없다”며 “더 나은 연주자가 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지, 연주자를 교체하는 것은 음악감독의 역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당초 서울시향 올해 첫 정기공연은 지난해까지 음악감독이던 오스모 벤스케가 무대에 설 예정이었지만 낙상 사고를 당하면서 판즈베던이 ‘대타’로 조기 등판했다. 판즈베던은 지난 8일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RCO)와의 연주를 마치고 9일 한국에 입국해 10일부터 사흘간 서울시향 연습에 몰두했다. 판즈베던이 단원들과 호흡을 맞춘 시간은 사흘뿐이었지만 무대를 강하게 휘어잡으며 서울시향의 앞날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카멜레온처럼 다양한 색채를 내야…정재일과 꼭 작업하고파”
서울시향 차기 음악감독인 야프 판즈베던이 17일 서울 중구 세종문화회관 서울시향 리허설룸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취재진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서울시립교향악단 제공

판즈베던의 서울시향 음악감독 공식 임기는 2024년부터 5년간이다.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음악감독 임기도 남았다. 하지만 이미 지난 12일 오세훈 서울시장으로부터 임명장을 받았다. 올해는 차기 음악감독 자격으로 뉴욕과 한국을 오가며 서울시향 운영에 적극 참여한다. 지난 12, 13일 연주에 이어 7월, 11월, 12월까지 모두 네 차례 서울시향 정기공연에서 베토벤 교향곡 7번과 9번, 차이콥스키 교향곡 4번과 5번,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 등을 무대에 올릴 계획이다.

판즈베던은 “올해는 서울시향이 가진 가능성을 모색하는 시간”이라며 “천국 자체보다는 천국으로 가는 길이 아름답다는 말이 있다”고 했다. 그는 “네덜란드 화가 작품으로 말씀을 드리자면 때로는 렘브란트처럼, 때로는 반 고흐처럼 완전히 다른 스타일을 연주할 수 있지 않을까”라며 “카멜레온처럼 다양한 색채를 낼 수 있는 오케스트라가 돼야 한다”고 했다.

서울시향은 오는 4월 8년 만에 신규 단원을 채용한다. 판즈베던은 단원 채용 기준으로 개인 연주 실력은 물론 악단 전체와 어울리는 ‘열린 마음’에 무게를 두겠다고 했다. 그는 “개인의 재능뿐 아니라 오케스트라가 갖고 있는 소리에 기꺼이 적응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느냐가 중요하다”며 “함께 연주할 때 동료 단원의 연주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다만 7년째 공석인 악장 자리에 대해선 “서두르지 않겠다”며 “(기존 단원에) 악장에 걸맞는 실력자가 있다면 즉시 채용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새로운 구성원을 뽑아 최고의 오케스트라를 만들 것”이라고 했다.

판즈베던은 동시대 작곡가들에게 신곡을 위촉해 서울시향 공연의 약 30%를 신곡으로 채워 공연할 계획도 갖고 있다. 그는 “오케스트라의 의무는 재능 있는 작곡가들에게 작곡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라며 “다만 첫번째 시즌은 작곡가들에게 신곡을 작곡할 시간을 주고, 두번째 시즌부터 공연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했다. 사상 최초로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한국영화 <기생충>과 넷플릭스 인기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음악감독인 작곡가 정재일도 신곡 작곡가 물망에 올랐다. 판즈베던은 “정재일은 정말 환상적인 작곡가여서 꼭 함께 작업하고 싶다”고 했다.

판즈베던은 오는 2028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옆에 완공할 예정인 서울시향 전용 콘서트홀 건립에도 참여한다. 손은경 서울시향 대표는 “최상의 음향을 가진 홀을 만들어야 한다”며 “서울시도 본격적으로 논의하는 단계에선 최적의 음향으로 지을 수 있도록 판즈베던 감독님께 직접 자문하겠다는 입장”이라고 했다.

소외된 약자 존재 잊어선 안 돼
서울시향 차기 음악감독인 야프 판즈베던이 지난 12일 서울 송파구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서울시향 정기공연에서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서울시립교향악단 제공

판즈베던은 원래 바이올리니스트였다. 1979년 19세에 네덜란드 명문 악단인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 최연소 악장으로 취임해 17년간 악장을 지냈다. 그는 레너드 번스타인의 권유로 지휘자로 방향을 바꿔 1996년부터 본격적으로 지휘를 시작했다. 미국 댈러스 심포니(2008~2018)와 홍콩 필하모닉(2012~)의 음악감독을 맡았다. 2018년에는 세계적 교향악단인 미국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했다.

판즈베던은 1997년에는 부인과 함께 ‘파파게노 재단’을 설립해 자폐아를 둔 가정을 지원해왔다. 그의 아들도 자폐를 앓고 있다. 한국에서도 장애인을 위한 시민공연을 열 계획이다. 그는 “사회에서 소외된 약자를 위해 연주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의 존재를 잊어선 안 된다”고 했다.

허진무 기자 imagine@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