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 그림자 노동에 기댄 생기

박찬은 2023. 1. 17.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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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나는 마을 방과후 교사입니다'

25년째 공동육아와 공동체교육을 함께 해온 서울 성미산 마을의 방과후 교사와 아이들 이야기다. 공적인 ‘돌봄’과 ‘교육’ 사이에서 분투해왔지만, ‘교사’로 호명받지 못하는 돌봄 노동자들을 정면으로 다룬 영화는 클로즈업이나 인터뷰 없이, 일상을 보여준다. 아이들의 밝은 웃음이 주는 생기 너머로, 교사들의 열정과 수고에 기대 온 '그림자 노동’이 보인다.

※본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될 만한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방과후 돌봄 교사 '논두렁'의 얼굴 그림을 활용한 영화 ‘나는 마을 방과후 교사입니다' 포스터


꽤 알려진 25년 차 공동체 마을인 서울 마포구 성산동 인근 성미산 마을의 ‘도토리 마을 방과후’는 교사, 아이, 부모가 함께 만든 방과후
돌봄 ‘터전’이다. 1~6학년 60명의 아이들과 하루를 보내는 논두렁, 오솔길, 자두, 분홍이 등 돌봄 교사의 일과는 센터에 와서 쌀을 씻어
밥을 안치고 청소기를 돌리는 일로 시작된다. 갑작스러운 코로나 팬데믹 덕에 문 닫은 학교를 대신하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긴급 돌봄 체
제로 전환하지만, 불안한 고용과 낮은 임금 등 열악한 처우와는 별개로 코로나가 길어질수록 교사들은 지쳐간다.

‘하하하’, ‘밤의 해변에서 혼자’, ‘간신’ 촬영감독인 박홍열 감독과 ‘작업의 정석’, ‘부암동 복수자들’ 황다은 작가가 함께 제작, 연출한 작품
으로,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와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 초대돼 주목받았다. 마을 조합원인 부부가 자신들의 두 아이가 다니는 마
을 방과후 교사의 일상을 3년간 근접거리에서 지켜보며 촬영한 ‘나는 마을 방과후 교사입니다’(이하 ‘나마교’)(내레이션: 황다은 |출연: 분
홍이, 오솔길, 논두렁, 자두)는 한국사회에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돌봄 노동자들을 본격적으로 다룬다. 때로는 동료 교사처럼, 같
은 조합원처럼, 방과후 아이들의 친구처럼 머무르는 카메라는 드라마틱한 상황 없이, 아이들과 선생님들의 일상을 그저 비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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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과후 돌봄 교사들은 코로나로 돌봄 공간에 오지 못하는 친구들에게 과자 선물을 보내고, 학교에 못 간 지 100일이 된 1학년들을 위해 ‘100일 잔치’를 연다. 코로나로 활동이 제약되자, 두발 자전거를 타고 다 함께 산을 오르며 6학년에게는 성교육을 실시한다. 아이들의 놀이 일상을 지켜주기 위한 회의 과정이나 교육 연구, 프로그램 개발을 하는 교사들의 영화 속 분투는 지난하다. 아이들을 믿고 기다려주는 건 똑같은데, 관계와 놀이와 일상 안에서 돌봄이 이루어지는 방과후 활동 교육 과정이 수학이나 영어 교육이 아니라는 이유로, ‘학위’나 ‘자격증’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전문가로 인정받지 못한다.

교사들은 사회적 지원 없이 부모들이 내는 조합비로 운영되는 ‘마을 방과후’가 지닌 태생적 한계, 저임금과 고용불안에도 불구하고, 마을에서 아이들을 함께 키우는 가치로만 친해진 부모들과 6년을 함께 하며 한 식구가 된다. 그러나 직업의 지위를 얻지 못하는 상황에서 아이와 교육에 대한 ‘공적 책임’을 져야 하는 방과후 돌봄 교사들은 결국 한둘씩 떠나간다.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고 한다. 영화는 학교와 돌봄 기관의 부재를 방과후 돌봄 교사들이 어떻게 버텨왔는지, 우
리가 영위하는 보통의 일상이 얼마나 많은 이들의 보이지 않는 노동에 빚지고 있는지를 담담히 알려준다. 방과후 교사들의 분투를 담은
‘나마교’는 아이들을 위해 모였다가 더 신나게 놀고, 고민하고, 아파하며 배우는 어른들로 채워져 있다.

그러면서 영화는 함께 놀고, 배우고, 자라는 공동체 마을을 유지시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를 묻는다. 그리고 이 그림자 노동에 사회적인 호명과 제도적인 지원이 왜 필요한지를, 당신의 오늘 하루는 잘 돌봄받았는지를 묻는다. 충분히 성찰해볼 만한 주제를 던져주는 영화다. 러닝타임 94분.



[글 최재민 사진 (주)스튜디오그레인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864호 (23.1.24, 31 설 합본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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