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시위 나선 홍세화 "한겨레 창간 정신 퇴색됐다"
김만배와 9억 거래 한겨레 간부 사태 발단
지난 16일부터 점심시간대 1인 피켓 시위
"한겨레 사장과 편집인 즉각 사퇴하라"
"괜찮은 일자리로 생각하는 흐름 주류돼"
[미디어오늘 김도연 기자]
홍세화(75) 장발장은행장이 서울 공덕동 한겨레 사옥 앞 1인 시위에 나섰다. 지난 16일부터 시작한 손팻말 시위는 주중 점심시간대(오전 11시30분~오후 1시) 이어진다.
최근 한겨레 간부가 언론인 출신인 대장동 일당 김만배씨에게 9억 원을 받아 충격을 준 '돈 거래' 사건이 계기가 됐다. 독재에 저항한 해직 언론인들이 주축이 되어 1988년 5월 창간한 국민주 신문의 존재 이유를 위태롭게 하는 대형 비리인데도, 이상하리만치 내부가 조용하다는 게 그의 문제의식이다. 한겨레 초대 시민편집인을 지낸 홍씨는 1999년부터 쓰던 한겨레 칼럼도 지난 13일 내려놨다.
17일 오전 그가 들고 있던 손팻말은 김현대 한겨레 대표이사 사장과 백기철 편집인의 즉각 사퇴를 촉구하는 내용이다. “김현대 한겨레 대표이사와 백기철 편집인은 현 사태에 책임지고 당장 사퇴하라. 배가 침몰하는데 선장하고 싶은 사람 누구인가.”
앞서 한겨레는 지난 10일치 지면에 사고(社告)를 내어 김 사장과 백 편집인이 조기 퇴진 의사를 밝혔다고 전했다. 내달 8일 사장 선거에서 차기 사장 후보가 확정되면 통상과 달리 모든 권한을 넘기고 물러나되, 그 이전까지는 주주총회 소집 등 회사 운영을 위한 법적 책임을 다하겠다는 취지다.
이런 회사 방침에 언론노조 한겨레지부는 지난 10일 “선거날까지 대표이사 권한을 놓지 않겠다는 위장 사퇴”라며 “대표이사와 편집인 사퇴, 이후 비대위 구성과 비대위 체제 속에서 조사위를 재구성하는 방법 말고는 현 사태를 풀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반발하기도 했다.
현재 한겨레는 김민정 한국외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를 위원장으로 하는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해 김만배 로비 의혹에 연루된 자사 간부에 대한 후속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노조도 현재 진상조사위 활동에 지지를 표하고 있다.
홍씨는 “10일자 사고는 황망하기 그지없다. 사고 제목은 '대표이사 사퇴를 알려드립니다'인데 그 내용은 정 반대”라며 “차라리 '당장 사퇴해야 마땅하나 아직 절차가 남아 있어 양해해달라'고 했다면 보다 진실에 부합했을 것이다. 대표가 사퇴한다고 신문에 써놓고는 그자리에 그대로 있다면 독자들이 뭐라고 생각하겠나. 일반 기사도 그렇게 쓰면 출고될 수 있느냐. 한겨레가 크게 망가졌구나 하는 생각뿐”이라고 비판했다.
홍씨는 “상황이 이런데도 편집국 기자들이 여기에 어떤 반응도 하지 않는다는 것에 더 절망을 느꼈다”면서 “1인 시위까지 하게 된 이유는 한겨레 창간 정신이 다 퇴색됐다는 위기감에 있다. 특히 젊은 기자들도 이제는 '한겨레 기자'가 아닌 일반 신문 기자로 안주해버린 게 아닌가 싶다”고 꼬집었다.
“30년 전 한겨레는 촌지가 만연한 언론계를 고발하는 특종을 보도했어요. 분명 그때 한겨레는 박봉임에도 촌지를 받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와 뜻이 있었죠. 지금은 완전히 망가졌죠. 그때 상황을 알 법한 선임기자들이 후배들에게 우리가 이래선 안 된다고 경각심을 높여야 하는데, 지금은 너도나도 사장 선거에 나오고 있어요. 한겨레의 역사성이 다 사라진 거죠. 한겨레가 현재 남아있는 구성원들의 소유물로 전락해 버리는…. 저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에요.”
원로이자 대선배인 홍씨의 1위 시위에 안재승 한겨레 경영담당상무, 손원제·안영춘 논설위원 등 한겨레 간부들도 직접 나와 인사와 함께 사과의 뜻을 전했다. “선배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전하고 떠난 후배 기자도 있었다.
홍씨는 “한겨레 구성원들이 총체적으로 내부 문화와 분위기를 점검해야 한다”며 “기성 언론처럼 출입처에 안주하는 문제, 기자들이 출입처 인사들과 골프를 치러 다니는 문제, 이런 관행에 문제의식을 느끼던 기자들이 지금은 한 몸으로 묶인 것 아닌지 성찰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젊은 기자들은 이번 사안을 '한 사람의 일탈' 정도로 넘어가려 할지 모르나 그렇게 해서는 안 될 문제”라며 “한겨레와 우리사회 진보의 가치가 소멸되고 있음에 큰 위기의식을 느껴야 한다”고 조언했다.
홍씨는 13일치 '홍세화 칼럼'에 “이번 글을 마지막으로 한겨레에서 물러난다.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최근 한겨레에 닥친 엄중한 사태와 무관하다는 점을 굳이 밝힌다. 순전히 제 역량의 부족을 절감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김만배 돈 거래' 사태와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홍씨는 이어 “진보적 대중지를 표방한 한겨레가 프티부르주아 신문에 가깝게 된 것은 꽤 오래전부터의 일”이라며 “법조기자들을 비롯해 출입처에 안주함으로써 초창기에 비해 사회 변화를 추동하는 현장에서 한겨레 기자를 만나기가 무척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한겨레 지면은 저에게 무척 소중했다. 앞으로도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고 썼다.
홍씨는 펜을 내려놓은 데 대해 “이미 두 번이나 그만 쓰겠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쓰기로 했던 칼럼이었다”며 “한겨레는 민중, 인민, 진보적 정론지 등으로 상징되던 언론이었는데 지금은 이른바 소유주의(所有主義) 흐름에 전혀 대처하지 못했고, 그 결과 지금과 같은 상황을 마주하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오늘날 한겨레 기자들의 일상 자체가 진보의 가치를 구현할 수 있는 그릇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라며 “한겨레를 괜찮은 일자리 정도로 생각하는 흐름이 주류가 된 것 아닌지 자문하고 토론해야 할 것”이라고 쓴소리를 남겼다.
홍씨의 1인 시위는 김현대 사장과 백기철 편집인이 사퇴할 때까지 계속될 전망이다. 홍씨는 “한겨레도 이번 일이 대표이사가 사퇴할 만한 사안이라는 걸 인식하고 있다. 그럼에도 대표는 사퇴하지 않고 있다. 즉각 사퇴하고, 비대위 체제를 구성하는 것도 방법”이라며 “과거 불법 대선자금 문제로 한나라당은 천막 당사라도 쳤는데, 한겨레는 문제를 인식하면서도 사장 선거와 주총이라는 절차를 빌미로 눌러앉기로 했다. 용납이 안 되는 상황”이라고 경고했다.
김현대 사장은 17일 미디어오늘에 “(김만배와의 기자 돈 거래 의혹 관련) 지난 6일 한겨레 이름이 언론에 보도되고, 9일 곧바로 사퇴 의사를 밝혔다”며 “다음달 8일 차기 대표이사 선거에서 당선자가 확정되면 곧바로 물러나겠다고 공개적으로 약속했다”고 설명했다.
김 사장은 “한겨레로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너무나 급작스럽게 벌어졌고 당장 선거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대표이사와 편집인, 편집국장이 동시 퇴진하기로 결심했다”며 “그날 당장 사퇴하지 못하고 새 대표이사 후보자 선출 직후로 사임 일정을 잡았던 것은 경영 공백에 따른 극도의 혼란을 막기 위해 대표이사로서 최소한 책임을 다하자는 뜻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김 사장은 “단 하루라도 비루하게 자리에 더 머물러 있고 싶은 생각, 추호도 없다”며 “새 대표이사 후보자가 선출되면 정직하고 분명한 모습으로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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