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남극점…낮 기온 영하 31도, 누적거리 1186.5㎞"
김영미(43) 대장이 아시아 여성 최초로 무지원, 단독 남극점 원정에 성공했다. 김 대장은 원정 중에 위도 1°를 넘을 때마다 일기를 작성해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공개했다. 영하 30℃의 혹한과 맞바람으로 몰아치는 12~16m/s의 블리자드를 맞고 장비가 고장 나기 일쑤인 극한의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마음을 잃지 않았다. 이 일기들을 모아봤다. 일기 작성 시간은 한국 시간 기준.
2022년 11월 24일 (목) 오전 7:09
출발 준비 완료~!! 날씨가 좋아지는 대로 떠날 예정입니다만~~!! 기다릴 뿐입니다~~!! 한국을 출발한지도 2주가 되었어요. 푼타아레나스에서 10여일 준비 끝에 21일 저녁에 유니언 빙하에 도착해 벌써 두 밤을 잤어요.
이곳에서 다시 경비행기를 타고, 출발 지점인 허큘레스 인렛까지 30분 거리인데 안개 때문에 경사도 파악이 힘들어 착륙이 어려운 상태라네요. 날씨를 기다리는 동안 썰매에 짐을 패킹하고, 텐트도 치고 걷고, 썰매도 끌어 보며 남극의 눈 맛을 체크했습니다.
날씨가 좋아지는 대로 허큘리스 인렛에 도착하면 다시 소식 전할게요! 그곳에서부터 남극점까지 1130km입니다.!!
2022년 12월 6일 (화) 오전 9:24
허큘리스 인렛에 내리자 파일럿은 "몸보다 썰매가 크고 무겁다~!"라고 한다. 나처럼 작은 애는 잘 못 봤을 듯.
그렇다. 출발 때 짐무게가 113kg(물 3.5리터 포함), 원했던 100kg에서 많이 넘친다. 몸에 걸치고 두른 것 포함해서 내 몸무게의 두 배가 되는 짐을 끌어야하니, 내가 봐도 무리했다.
9일이 지나서 이제 썰매는 100kg쯤 된다. 많은 것들을 상상해 보고 왔지만, 하루하루 놀라운 경험들을 하고 있다. 그래도 아직 체중도 유지되고, 식사도 양호하고 하루씩 더 나아지고 있다. 날씨도 많이 적응 되었다.
운행 6일차에 한국에서 친구와 지인들이 녹음해준 목소리들을 처음으로 듣게 되었다. 용기가 되는 그 말들을 종일 걸으며 떠올렸다. 내가 정면으로 마주한 남극에서의 며칠은 도서관 책장의 한 켠에서 뽑은 책 한 권의 첫 문장 정도에 불과한 듯 싶다.
나침반이 두 개 있었는데, 하나가 깨지고 또 다른 하나는 썩 신통치 않아 고생을 좀 했다. 거기에 겹쳐 5일차에 만난 화이트 아웃이 정말 당혹스러웠다. 가야할 방향을 모른다는 건 무척 두려운 일이지만, 그 두려운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건 스스로의 몫이다. 오래 걸렸지만, 내일 드디어 81도를 넘는다.
2022년 12월 11일 (일) 오전 9:30
내일 15km를 더 가면 82도다. 나침반 고장이(방위각 10도의 오차가 있다. 아직도 이것을 100% 신뢰하지 않기에 GPS로 체크하는데 시간을 많이 쓴다) 나고 화이트 아웃이 겹쳤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마음이 주변 환경에 휘둘리지 않게 하는 것뿐이었다.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었고, 날씨도 하늘이 하는 거라, 오늘 오후 다시 화이트 아웃이 찾아오기 전까지 정말 맑은 날들의 연속이었다.
하늘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왔다. 보이스 레코더에 녹음된 Mj언니의 말대로 하얀 눈밭에 길이 환히 보였다. ^^
하얀 안개 속을 걷다가, 허큘리스 인렛에 덩그러니 나를 혼자 내려주고 돌아간 다큐팀 박준우. 안재민 감독님은 나를 보고 어떤 마음으로 돌아갔을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2주 전의 일인데 너무 옛날 얘기 같다.
2003년도의 박영석 대장님 남극점 루트와 내가 가는 길이 같다. 그때의 운행 좌표를 구해 와서 하루씩 비교하며 그 길들을 상상해 본다. 오늘까지 그 팀이 나를 10km앞선다. 그때가 19년 전이라니 믿을 수 없고, 박 대장님도 나보다 2살이나 젊었다니 놀랍다. 이곳은 시간과 공간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과거도 지금 같은 느낌. 끝없는 설원에 나침반이 없으면 상실하는 방향감각.
엊그제는 알람이 잘못 울려 3시간이나 일찍 일어나 밥을 했다. 종일 해가 있으니 낮인지, 밤인지 구분을 못했던 거다. 스마트 워치가 GPS시간대로 바꿔서 알람이 울린 것. 결국 신발 신기 전, 한 시간 만에 그 사실을 깨닫고 다시 두 번째 잠을 잤다. 어쩐지 너무 피곤했다.
바람이 북동쪽에서 불어오고 있다. 방향이 바뀌었다. 며칠 얄궂은 날씨가 될 것 같다. 그래도 모두의 마음 온도는 주변 환경에 휘둘리지 않고 맑음이길 ~
2022년 12월 17일 (토) 오전 10:25
82도부터 화이트 아웃을 2일이나 보냈다. 남극에서 화이트아웃은 가장 안 좋은 부적의 이름이다. 난 이게 무척 싫다. 근데 더 안 좋은 걸 알아버렸다. 바람 방향이 바뀌더니 무풍에 거의 36시간 눈이 내렸다. 물론 화이트 아웃과 함께!
화이트 아웃은 나침반과 GPS만 있으면, 그래도 운행하는데 큰 지장이 없지만, 눈은 며칠을 더 고생 시킨다. 겨우 90KG정도로 떨어진 썰매 무게가 도로 110KG이 되어 버린 상태. 잘 얼어 있어야 썰매가 잘 따라오는데, 눈은 마찰을 일으켜 자꾸 뒤에서 나를 잡아당긴다.
눈이 종일 펑펑 오던 날, 단독으로 최연소 여성이 되고자 하는(이름 까먹음) 노르웨이 탐험가(기자 주: 그녀의 이름은 헤드빅 헤르테이커Hedvig Hjertaker로 1월 16일 남극점에 도착해 최연소 여성 단독 남극점 도달 기록을 수립했다)가 내 텐트를 지나갔다. 허큘리스 인렛에서 출발하고 아파서 2일을 그냥 쉬었고, 한 시간 전에 내 스키 자국을 발견했다고 한다. 운행에 대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자기는 20분을 더 가야한다면서 내일 보자고 인사하고 헤어졌다.
"Woman Power"
뱃속에서 스키를 안고 태어난다는 노르웨이 사람들의 스키 실력은 따봉인데, 거기다가 Youngest를 꿈꾸는 여성 탐험가는 키도 커서 180cm도 넘어 보인다. 슥슥~ 눈을 제치고 나가는 모습이 그저 부럽다.
'다리 길어서 좋겠다'
운행 시간이 나보다 꽤 짧은데, 더 많은 거리를 간다. 나도 그걸 알고 있기에 절대적으로 시간을 갈아 넣어서 꾸역꾸역 거리를 채워가고 있다. 하루 11시간, 쉴 때 우모복을 입을 일이 없게끔 땀이 식기도 전에 후다닥 간식을 먹고 계속 걷는다. 앉아서 쉬지도 않고 여기까지 왔다.
1km가 이렇게 멀고 귀하다. 매일 1km씩 더 걸어서 20일을 가면 하루를 벌지만, 반대로 1km를 덜 걸으면 하루를 버리기도 한다. 이건 주어진 식량과 연료와도 관계가 깊다. 결국 짊어질 수 있는 삶의 무게만큼 나아간다. 매일 1kg의 식량이 줄어드는 기쁨도 있지만, 거리와 시간의 압박감도 공존한다.
썰매가 잘 따라오지 않을 때마다, 보조 배터리와 캠코더가 히말라야 등반 때 꼭 챙겨 다니던 황도캔이나 청포도캔이었음 좋겠단 생각이 자꾸 든다. 무게에 비해 자기 할 일을 잘 못하고 있다. 태양광은 어마한데 화이트 아웃에서도 충전이 된다. 근데 잘 때만 해도 풀 충전이다.
어제 잘 쉬었더니 운행에 여유가 있어 바람 없는 낮 시간과 하늘을 30분 즐겼다. 오늘 거의 처음으로 여유 있게 앉아서 쉬고 썰매에 눕고 한 것 같다.
그리고 오후가 되니 언제인지 모르게 신설이 있다. 고작 15km차이인데 내가 잠든 하늘엔 눈이 없었는데... 그리고 스키 자국도 발견되었다. 이건 바람 불면 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데, 나와 몇 시간 차이인 듯 싶다.
83도에서 4.3km를 더 지나 오늘의 막영지를 정했다. 위도 83도를 넘었고, 이곳의 고도는 1160m다. 허큘리스 인렛의 170m고도에서 출발해 20일 만에 약 1000m의 고도를 올렸고, 아직약 1700m의 고도를 더 올려야 한다.
그래도 대체로 하늘은 맑고 시야가 좋다. 눈은 이제 그만 내렸음 좋겠다.
그럼 84도에서 또 인사해요~!! 굿나잇~!
2022년 12월 22일 (목) 오전 8:49
"이곳은 철조망이나 울타리 따위가 필요 없다. 시베리아의 혹한과 추위가 바로 철조망이고 감옥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실화를 다룬 "얼어붙은 눈물" 원작의 <웨이백>이란 영화의 한 대사가 떠오르는 날씨의 연속이었다. 포로들을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실어 바이칼 호수보다 위쪽, 벌목과 갱도가 있는 포로수용소에서 교도관이 한 말이다. 폭풍설이 휘날리던 날 밤, 포로 중 몇몇은 한 밤 중에 탈출을 시도한다. 거친 눈보라엔 눈에 발자국이 모두 사라지고, 도망자를 쫓아오기도 힘드니까!
그들은 남쪽으로 계속해서 탈출했다. 계속 전쟁 중이었기에 서쪽으로 갔다간 다시 포로가 될 상황. 이 남쪽 루트가 재밌어서 구글 지도로 동선을 따라가 본 적이 있다. 바이칼을 지나 사막을 건너고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로 가서 끝이 났다. 그리고 배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내용! 나도 그들처럼 계속해서 남쪽으로, 남쪽으로 탈출하고 있다.
3극점과 7대륙, 14좌 완등의 "산악 그랜드 슬램"을 이룬 박영석 대장님의 단골 무용담 중 하나가 바로 북극이었다.
"세상에 지옥이 있다면 그곳이 바로 북극이야"
글쎄, 대장님은 북극에 비하면 남극은 봄이라고 했는데 왜 이리 춥지?? 북극은 도대체 얼마나 추운거야??? 고도가 조금씩 높아지고 있고 가장 추운 3일이었다. 물론 건조해서 –15도의 날씨가 말처럼 매섭지는 않지만 매일 밖에 있으면 그렇지도 않다.
박대장님의 말 대로 북극이 '지옥'이라면, 나는 영화 웨이백의 대사를 빌려 남극을 '감옥'이라 하겠다.
아~! 탈출은 멀고멀다. 3일 연속 탈출하기 좋은, 뜨거운 맛의 바람이 불었다. 12~16m/s의 블리자드를 온 몸으로 밀고 나가야 했다. 이곳 바람은 맞바람이라 온 몸으로 맞서 밀어내며 걸어야 한다. 10시간 이상 바람을 맞고 서 있는 게 호락호락한 일은 아니다. 바람 소리는 한국에 돌아가서도 환청이 들릴 것 같다.
바람이 사스투르기의 사이사이에 고이 모셔다 둔 눈 웅덩이에서 썰매를 건져 낼 때마다 몸에서 에너지가 한주먹씩 바람 속으로 증발하는 기분이었다. 탈출 훈련을 강도 있게 호되게 하고 있다.
하지만 하루 일과에도 천국의 공간이 있다. 텐트 안에 들어와 바람을 피하고 나면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진다.
"후아! 살았다"
오늘 84도에 도착했다. 좋은 사람들을 떠올리며 남쪽 끝을 향해 걷고 있다. Way back
2022년 12월 30일 (금) 오전 10:19
86도(1,637m)를 막 넘어선 평원에 텐트를 쳤다. 84도~86도까지 해발 상승 고도 약 300m에 광활한 평원, 얼음 사막 지대다. 오르막인 듯 싶으면서도, 뒤돌아보면 왜 평지처럼 보이는지... 덕분에 220km(1도는 110km)를 8일 동안 식량 무게를 줄여가며 거리도 많이 당겼다.
86도~88도에서 약 1,200m의 해발 고도를 올려야하며 사스트루기(기자 주 : 눈이 바람을 따라 물결무늬의 지형을 형성한 것. 바람에 의해 단단하게 굳은 경우가 많다)도 많은 곳! 속도를 올리기 시작하며 몸에 저장해온 식량들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다. 처음부터 이 구간을 넘는 게 마지막 고비라고 여겼다.
85도를 넘어서며 약 2일간 봄날 같았다. 보통 텐트에 들어오면 절대 나가지도, 문을 열어 볼 생각도 않지만, 포근해서 문을 열고 밥을 먹을 정도. 운행도 파일 장갑만 껴도 될 정도로 바람이 없으니 복사열이 강해 따뜻하게, 기분 좋게 걸었다.
근데, 엊그제 저녁에 화이트 아웃이 생기더니 밤에 눈이 살짝 뿌렸다. 큰 눈은 아니었지만 썰매가 당겨 오는 소리가 묵직하다. 따뜻하다가 다시 바람이 불고 온도가 낮아지니 더 춥게 느껴진다. 몸도 에너지가 점점 고갈되어 가는 상태라 더 빨리 추위를 느끼는 듯 싶다.
보이스 레코더를 다 들었다. 다들 고독하고, 외로울까봐 걱정들을 많이 하고 있었다. 바이칼 호수에서 돌아 왔을 때도 외롭지 않았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내 대답은 "서울이 더 외롭다"였다. 이곳에선 여전히 하루 일과가 무척 바쁘고 시간을 쪼개어야만 한다. 남극이란 곳 자체가 외로울 법한 곳이지만, 그럴 틈을 안 준다.
그리고 이곳에 오기 위해 견뎌온 시간이 너무 길었고, 다가서지 못할 때가 훨씬 더 외롭고 고독한 시간들이었다. 지금은 그 길 위로 돌아와 중반을 넘어서 되돌아가고 있는 중이다. 제자리로 나를 돌려놓기 위해, 오늘 하루도 최선을 다했다.
비록 걷는 것이라 할지라도!
1월 3일 (화) 오전 8:50
따스한 햇살이 가없이 넓은 창백한 빙하 위로 사랑을 쏟아 내린다. 내내 날씨가 맑았다. 무엇보다 크리스마스 이후 바람의 풍속이 많이 약해졌음을 느낀다. 계속 날이 좋을 수는 없어서 거친 날이 몰려올까 무섭기도 하다.
남극점까지 직선거리로 335km 남았다. '무리하거나 욕심 낼 필요 없다'는 어른의 말이 오늘 내내 머릿속을 채웠다. 썰매 무거운 것은 둘째 치고, 혼자서 부담스러운 것들을 잔뜩 안고 간다며 걱정해주는 분들의 애정 어린 말들이 대지에 쏟아져 내리는 햇살의 사랑처럼 다가왔다.
실제 내게 성공하라고 말하는 사람은 한 손에 꼽는다.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내게 부담만 보탤 뿐이라는 걸 ... 알기에 마음에 있어도 차마 다들 꺼내지 못했던 말인듯 싶다.
4일에 1도를 넘는 걸 기준으로 운행하고 있다. 식량과 연료도 충분하다. 1도=60분=110km
15분은 대략 28~29km쯤 된다. 하루 루틴은 이렇다. 6시기상, 8시 출발하며 스키를 신고, 오후 7시 전에 스키를 벗으며 운행 종료. 식사는 아침 6시 40분과 저녁 8시에 두 번하고 나머지 칼로리는 물에 보충제를 타서 마시며, 초콜릿 등등의 간식과 파워젤 같은 것들이다.
종일 스키를 벗지도, 앉지도 않고... 하루 4500kcal를 먹는다. 10여일 전부터 이 칼로리가 절대적으로 부족함을 느낀다. 바이칼에선 5000kcal를 먹었지만 23일 중 4일 정도를 빼고 매일 설사를 했다. 호수 밖으로 나왔을 땐 목덜미까지 살이 빠져 있었다.
잠은 보통 8시간을 자려고 애쓰지만, 7시간 30분이 최선이고 그나마 한 번도 통잠을 잔적이 없다. 최소 3~5번은 깨어서 시계를 보고 다시 잠든다. 해가 지지 않아 안대를 하고 자도 바이오리듬을 흔들어 놓아 깊은 잠을 잘 못잔다.
해가 지지 않아 1월 1일의 일출을 당연히 볼 줄 알았는데 흐려서 실패. 아침에 하늘에 꽉 찬 구름을 보고 새해 첫 날부터 또 화이트 아웃이 오는 줄~!
새해 이벤트(?)로 내복을 갈아입었다. 양말도 갈아 신고!! 그렇게 애정담긴 말들이 기다리는 곳을 향해 되돌아가고 있는 중~!
운행 37일차 / 2129m
1월 7일 (토) 오전 9:16
눈 위에 시를 쓴다. 바람에 금방 실려가 사라져 버릴 그런 말들을....
-파란슬링아-
너는 좋겠다. 끊어졌지만
드디어 썰매의 무게로부터
해방되었구나
나는 아직 좀 더 버텨야한다네!
너를 보니 내 몸이 그간 너와 함께 받은
고통도 떠올라 울어 버릴 뻔 했다.
눈썹이 얼어붙을까 무서워 꾹! 참았어.
오늘도 잘 견디고, 잘 버텼다.
말도 안 돼! 짐을 끌다 슬링이 끊어지다니! 87도를 넘던 첫날 사건이다. 지금까지 썰매 무게는 체감 상 100kg이하로 내려간 적은 없는 것 같다. 무게가 줄면 더 많이 걸어서 거리를 채우고, 1시간에 한번 쉴 걸 두 시간에 한번 쉬고, 좀 가벼워졌다 싶으면 사스투르기나 눈이 내린다. 오늘은 스키가 안 밀려서 부츠를 신고 걸었다. 다리에 힘이 없다. 11시간을 걸었는데 24.3km밖에 못 걸었다. 허벅지가 얇아졌다. 근육을 태우고 있는 중인 듯 하다.
어제는 2,400m의 고도라 그런지 바람도 불고 걷는데 숨이 쉬어지지 않아 이러다 혼자 쓰러지겠다 싶어 곧장 텐트를 쳤다. 2,000m이상 올라오고 영하 25도에 3m/s의 바람에도 체감 온도는 35도 전후로 떨어진다. 찬 공기로 호흡하는 것도 힘들다. 텐트 안에서도 손이 시리고 우모복을 입고 있다. 그나마 막판을 위해 연료를 아껴 와서 옷을 충분히 말리는 중이다.
안 좋은 게 다 다녀갔다. 남극에서 이것들을 환영할 사람은 없을 거다. 화이트 아웃, 바람, 눈도 적은 양이나마 2일이나 내렸는데 스키가 안 밀린다. 이제 좋은 날씨는 없다. 추운 날과 아주 추운 날만 있을 것 같다.
39일차에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온 4인의 원정대를 만났다. 49일차라고 한다. 잠시 파일 장갑만 끼고 고프로 버튼을 누르다 손가락 끝의 뼈마디가 조각나는 통증이 등줄기의 신경 회로까지 전달되었다.
노스페이스 용품팀에서 개발해 준 스틱 장갑에 손을 넣고 한참 숨을 고르며 손끝에 신경을 집중했다. 오스트레일리아팀의 한 명이 어디서 샀냐고 묻는다. 좋은 건 알아보는 구나~! 이 장갑아니면 큰 일 날 뻔했다. 잠시만 손을 빼고 있어도 뼈마디가 부서지는 듯한 추위다.
극지방 허벅지 동상이란 게 있는데, 허벅지 안쪽이 추위에 괴사해서 곪는 종류다. 지방이 많은 여성이 더 잘 걸린다고 한다. 이걸 대비해서 노스페이스 기술 개발팀에서 바지 안쪽에 패딩 반바지를 넣어줬는데, 그것만으로 부족해 오버트라우져 위로 패딩 치마를 덧입는다.
어제는 텐트 천장에 걸어둔 치마가 버너에 떨어져 타버렸다. 범위가 커서 덕테이프로 치료했다. 패딩치마 하나 더 입어도 발이 덜 시리다. 에어 매트도 빵구가 나서 매일 불어야 한다. 밤에 잠을 자주 깨는 두 가지 이유가 더 있는데, 하나는 바람. 또 다른 하나는 근육통이다. 밤새 몸부림을 많이 해서 침낭 지퍼도 고장이 났다. 장비도 계속 고장 나고 부러지고 깨지는데 내 몸인들 성한 구석이 있겠나! 이제 눈도 지겹고, 춥고 고통스럽다.
88도까지 18km정도 남았고 남극점까지 240km남았다. 운행 41일차, 2539m. S87도51.1921. W083도42.0703
2023년 1월 13일 09시
남극점까지 100km! 좋은 날씨 부탁드려요! 오늘도 온몸으로 한 발, 한 발 최선을 다했다!!
운행 47일차, 2773m, S89도05.9637, W082도01.6710,
2023년 1월 17일 09시
남극점에서 보냅니다. 1월 16일(월/현지시간) 51일째인 마지막 날 27.43km를 걸어 오후 8시 55분에 남위 90도에 도달, 전체 누적 거리는 1186.5km, 운행 중 낮의 기온은 영하31도.
"많이 추웠지만 좋은 사람들, 따뜻한 사람들을 생각하며 걸었습니다. 응원해주신 분들께 많이 감사합니다. 덕분에 부상 없이 열 손가락, 열 발가락 짝 맞춰서 데려갑니다. 오늘 20여 km를 걷는 것도 동상이 염려되어 어제 밤 잠들기 전까지 내내 걱정이 되었어요. 어떻게 1,000km를 넘게 무거운 썰매로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남극점에 섰지만, 내일이면 지난 과거에 불과하단 생각이 듭니다. 길의 끝에 서니 50여일의 긴 여정이 하룻밤 꿈 이야기 같아요. 춥고 바람 불던 날들, 흐리고 배고프던 시간들이 버거웠지만, 그래도 돌이켜 보면 맑고 따뜻한 날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모두 행복하시기를 가장 남쪽 끝에서 차갑지만 맑고 따뜻한 기도를 보냅니다."
김영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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