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어려운 시대가 소환한 ‘영웅’…‘지속가능 콘텐츠’로 이어가려면 [영웅의 시대]
어려운 시대가 소환한 초월적 존재 ‘영웅’
‘원소스 멀티유즈’ 성공…관객과 판로 확장
문화 콘텐츠 넘어 역사 교육 콘텐츠로 활용
향후 30년 위한 ‘지속가능한 콘텐츠’ 개발 필요
보편성 담은 스핀오프 등 다양한 아이디어 나와야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한국 창작 뮤지컬의 신화이자 자존심으로 불린다. 그 흔한 ‘스타 배우’도, ‘아이돌 출신’ 배우도 없었다. 2009년 초연 이후 아홉 번의 시즌을 이어오는 동안 뮤지컬 ‘영웅’은 오직 ‘콘텐츠의 힘’으로 관객들을 공연장으로 불러왔다.
14년을 이어오다 보니 공연계 일부 관계자들은 “볼 사람은 다 본 것 같은데도 새로운 관객이 찾는 것이 신기하고 대단하다”는 반응까지 전한다.
특히 이번 시즌의 파급력이 상당하다. 현재 뮤지컬 ‘영웅’은 배우 정성화·양준모·민우혁이 트리플 캐스팅으로 관객과 만나며, 매회차 매진에 가까운 예매율을 기록하고 있다. 배우 정성화가 출연하는 회차는 어김없이 매진이다.
원종원 순천향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공연영상학과 교수는 “뮤지컬은 다른 장르와 달리 비싼 티켓값을 지불하고 오는 콘텐츠인 만큼 선택하는 관객들은 경험의 실패를 줄이기 위해 다양한 요소를 고려한다”며 “현재의 ‘영웅’은 초연보다 화제성, 대중적 인지도는 물론 공연을 선택하게 하는 신뢰도가 더 높아졌다”고 분석했다.
‘영웅’의 관객 층은 다수 뮤지컬과는 다른 특이점이 포착된다. 특정 ‘타깃 연령대’가 있는 작품은 아니다. 공연이 진행 중인 LG아트센터 서울을 찾는 관객층을 분석하면 20~60대 이상까지 폭넓은 관객층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15만원에 달하는 티켓 값에도 시즌마다 새로운 관객이 공연장을 찾는 흔치 않은 ‘대중 뮤지컬’로 자리한 것이다.
‘영웅’을 제작한 윤홍선 에이콤 대표는 “‘영웅’의 관객층은 공연을 즐기는 20~40대는 물론 모임 단위의 중·장년층 관객들, 아이를 동반한 가족 단위 관객들이 많다는 특징이 있다”고 말했다.
뮤지컬 ‘영웅’은 이번 시즌의 성공으로 세대를 초월하는 공감대를 확인하게 됐다. ‘영웅’이 꾸준히 사랑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이 작품이 주는 ‘동시대적 메시지’가 있기 때문이다.
원 교수는 “사회, 경제적 어려움이 있을 때는 사람들이 초월적 존재를 찾게 된다”며 “어려움을 타개할 존재에 대한 갈증이 문화 콘텐츠로의 히어로 물 제작으로 이어진다. ‘영웅’이라는 콘텐츠를 통해 안중근 의사가 재조명되는 것도 우리 사회가 어렵고 혼란스럽다는 것에 대한 방증”이라고 분석했다.
‘영웅’ 안중근의 존재는 더욱 특별하다. ‘공동의 선’을 위해 자신을 던지는 위인이자 식민지 시대 우리 민족의 울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인물, 역경을 헤치고 대의를 향해 달려간 선지자다. 원 교수는 “역사 소재의 뮤지컬은 그 시대가 아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날을 이야기한다”며 “안중근이라는 인물의 역사적 궤적이 대리만족을 하게 해주는 동시에 우리에게 울림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윤 대표도 “안중근 의사의 올곧은 정신과 혼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커 영웅으로 여길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뮤지컬과 영화에선 “누군가의 아들, 한 가정의 가장, 군인이면서도 운명 앞에서 고뇌한 평범한 사람”(윤 대표) 안중근도 조명한다. 이러한 모습을 통해 두 콘텐츠는 ‘영웅’의 의미를 다시 새긴다.
지혜원 경희대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는 “서른 한 살의 안중근은 위대한 독립 운동가이지만, ‘영웅’은 독립 운동가만의 이야기는 아니다”라며 “한 사회에서 허리 역할을 하는 세대로 이들이 가지는 책임감과 연대의식, 꿈과 도전에 대한 이야기로도 다가설 수 있다”고 말했다. 윤 대표는 “특별한 사람만이 영웅이 되는 것이 아니다. 평범하지만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며 매일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이라는 이야기도 담고자 했다”며 “세대와 연령을 불문하고 마음을 관통하는 전율과 감동을 전하는 이야기가 관객들의 마음을 두드린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영웅’은 뮤지컬 계에선 보기 드문 ‘성공 신화’를 쓴 작품이다. 순수 국내 창작 뮤지컬로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미 2015년 6번째 시즌 당시 6주 만에 10만 관객을 돌파했고, 8주 연속 예매율 1위라는 기염을 토하며 창작뮤지컬의 무한한 잠재력을 보여줬다. 이번 시즌엔 처음으로 시츠프로브(sitzprobe, 오케스트라와 합을 맞춰보는 앉아서 하는 리허설)를 중계, 유튜브에서 60만 조회수를 기록 중이다. 뿐만 아니라 국내 뮤지컬 ‘최초’로 창작 원작을 뮤지컬 영화로 선보인 ‘원소스 멀티유스’(one source, multi-use) 성공 사례다.
‘영웅’이 만든 다양한 기록의 배경엔 ‘작품의 힘’에 있다. ‘영웅’은 음악, 연출, 무대 세트 등 초연부터 ‘탄탄한 기초’를 다지고 등장했다. 특히 ‘음악의 완성도’가 높다. 뮤지컬은 음악이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은 장르인 만큼 장면마다 ‘좋은 노래’를 직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 교수는 “‘영웅’의 노래들은 관객들에게 각인되도록 잘 써진 곡이 많다”고 말했다.
작품에서는 전체를 관통하는 ‘장부가’, 예능과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패러디 된 ‘누가 죄인인가’, 거사를 도모하며 부르는 ‘그날을 기약하며’, 사형대에 선 아들을 향한 조마리아 여사의 ‘사랑하는 내 아들, 도마’ 등 중독성 강한 넘버(노래)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덕분에 ‘영웅’은 뮤지컬을 보지 않은 관객도 알고 있는 히트곡(누가 죄인인가)도 나왔다. 윤 대표는 “웅장하면서도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음악 역시 작품성을 뒷받침하는 요소”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영웅’은 뮤지컬을 육성·지원하는 시스템이 없던 시절 창작됐다는 점에서 작품의 저력에 높은 점수를 준다. 지 교수는 “뮤지컬 ‘영웅’은 창작 여건이 열악한 시절에 탄탄한 뼈대를 가지고 완성도 높은 초연을 올렸다”며 “초연이 엉망인 작품은 다음 시즌에서 완전히 뒤바뀌는 사례들이 종종 있는데, ‘영웅’은 탄탄한 초연의 브랜드가 세월과 함께 켜켜이 쌓여 지금에 이른 것이다”라고 봤다.
실제로 에이콤에 따르면, 초연과 비교해도 지금의 ‘영웅’은 연출, 대본, 음악, 무대 등 ‘전체 틀’이 바뀌지 않았다. 거듭되는 시즌에선 시대에 맞도록 세부적인 보완으로 완성도를 높이는 작업을 이어가는 정도다. 윤 대표는 “여러 시즌의 공연을 이어올 수 있었던 건 공연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더 좋아진 모습으로 관객과 만나기 위해 대본과 넘버 일부를 수정하고 보완하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고 말했다.
탄탄한 원작은 장르의 경계를 허물며 판로를 확장 가능성을 입증했다. 초연 이후 13년 만에 뮤지컬 영화로 콘텐츠를 확장, 원소스 멀티유스(One Source Multi-Use) 사례로 가시적 성과를 냈다. 기존 사례와 달리 ‘원 소스 멀티유스’의 흐름이 처음으로 뮤지컬에서 영화의 방향으로 구현됐다는 점은 업계에서도 고무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내년이면 15주년을 맞는 ‘영웅’은 이번 시즌의 성공을 바탕으로 또 한 번 도약해야 할 때가 됐다. ‘한국 창작뮤지컬의 신화’라는 거창한 수사에 짓눌리지 않고, 향후 15년을 내다봐야 한다. ‘영웅’은 시대를 초월하는 콘텐츠이기 때문이다. 2009년 초연 이후 현재에 이르며 ‘영웅’에게 요구되는 역할과 책임도 다양해지고 있다.
지 교수는 “‘영웅’이 지난 14년 간 소구할 수 있었던 것은 독립운동가 안중근이 주는 메시지 이상이 다른 점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30년이 지나도 올드하게 느껴지지 않는 콘텐츠로의 개발과 확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지속가능한 콘텐츠’로의 개발은 필수다. ‘원소스 멀티유스’로의 성공을 발판 삼아 다양한 스핀오프 콘텐츠를 개발하는 ‘유연한 접근’이 필요하다. 특히 같은 역사를 공유한 중국, 일본 등 해외 시장 진출을 위해 보다 ‘보편적인 이야기’를 들려줄 필요도 있다. 뮤지컬에서 안중근의 조력자인 만두 가게 중국인 남매 왕웨이와 링링은 중국 진출시 긍정적일 수 있는 캐릭터다.
지 교수는 “동일한 소스에서 파생된 콘텐츠의 확장을 넘어 원작 속 주변 인물인 설희, 안중근의 동생들, 독립운동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한 스핀오프 콘텐츠를 개발해 보편적인 정서와 시각을 담아간다면 ‘영웅’의 이야기가 오래 지속하리라 본다”고 말했다.
‘영웅’의 독특한 지점은 현재 문화 콘텐츠를 넘어 교육 콘텐츠로 자리메김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제작사에서도 교육 콘텐츠로의 ‘영웅’의 역할을 해나가고 있다. ‘역사 강사’ 최태성과 함께 마스터 클래스를 진행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윤 대표는 “시기적으로 소설부터 영화까지 안중근 의사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고 있어 관객들이 작품과 함께 우리 역사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한국사 강연을 기획했다”고 말했다.
뮤지컬의 프로그램 북 역시 여느 작품과는 확연히 다르다. 시즌을 거듭한 뮤지컬 개막사를 나열한 것이 아니라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배경 지식, 19세기 조선과 동아시아 역사를 풀어내는 ‘역사 교과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대중성을 확보한 ‘영웅’을 통해 생애 첫 뮤지컬을 관람하는 관객도 적지 않다. 최근 LG아트센터 서울에서 만난 황지현(46) 씨는 초등학교 5학년 아들과 함께 ‘영웅’을 관람, “기왕이면 처음 보는 뮤지컬로 역사 공부를 함께 할 수 있는 작품인 ‘영웅’을 선택했다”며 “자연스럽게 역사를 배울 수 있는 데다 뮤지컬로도 훌륭한 작품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교육용 문화 콘텐츠로도 확장된 것 못지 않게 의미를 가지는 부분은 ‘영웅’이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알리는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지 교수는 “관객층이 확장된 만큼 ‘영웅’은 우리 역사를 알리는 것 못지 않게 뮤지컬을 알리는 책임감을 가지는 것도 필요하다”며 “작품을 예술 교육 콘텐츠, 관객 개발 콘텐츠로 확장한다면 일반 대중에게 뮤지컬 장르를 더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되리라 본다”고 말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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