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부가 멈춘 '성평등 추진', '그럼에도' 청년들은 멈추지 않았다
[한예섭 기자(ghin2800@pressian.com)]
"밥 먹고 토론하고 노는 건 자기 돈으로 하면 된다. 이런 것까지 국민 혈세로 하려고 하면 되겠나?" -권성동 국민의힘 의원
'밥 먹고 토론하고 노는 것'에도 공적인 의미는 있다. 주류가 비주류의 입을 막는 구조적 편견 속에선, '잘 말하기'보다도 '일단 말하기'가 중요한 이들이 있으니까. 지난 14일, 팀 산성비의 여울 활동가가 '성평등 페스타'에 참여해 남긴 말에선 그러한 의미가 엿보였다.
"여러분, 우리가 이야기할 때 중요한 것은 '잘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것'입니다. 자격을 갖추어야지만 말하고, 대단한 능력이 있어야지만 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스스로의 생각, 감정, 선택 그 모든 것들을 확신할 수 있길 바랍니다."
미디어 콘텐츠 제작팀 산성비는 지난해 4월 급작스럽게 전면 취소된 여성가족부 '버터나이프크루(청년성평등문화추진단)' 사업 참여단체다. 개개인의 이야기를 콘텐츠화해 "세상에 굳어진 편견을 녹이자"는 의미를 팀 이름에 담았다.
'성평등 문화 추진'을 주제로 지난 2019년 출범한 버터나이프크루 사업은 작년 7월 "(사업 참여 단체가) 페미니즘에 경도됐다"는 권성동 당시 국민의힘 원내대표 지적에 전면 취소됐다. 이미 사업 출범식까지 마친 상태였지만, 권 의원이 "여가부 장관과 통화"했다는 글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게시한 이후 여가부로부터 일방적인 취소 통보가 날아들었다. (관련기사 ☞ 尹정부 '공정'은 안티 페미? ... 여가부 '버터나이프크루' 폐지 논란)
이후 여가부는 단체들에 "성평등 주제를 제외"하면 사업을 이어가도록 하겠다고 다시 통보했지만, 단체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당 원내대표의 "노골적으로 여성혐오에 치우친 의견" 하나 때문에 사업 주제를 포기하란 말은 납득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그럼에도' 계속해보기로 했다.
버터나이프크루의 위탁 운영사였던 사회적협동조합 빠띠가 전면에 나섰다. 자사 운영비를 들여 지원이 취소된 프로젝트들을 끝까지 지속시켰다. 당초 버터나이트크루로 선정된 17개 팀 중 13개 팀이 여기에 참여했다. 지난해 12월까지 활동을 이어온 해당 프로젝트의 이름이 '그럼에도 우리는'이다.
"성평등 주제 제외"하라던 여가부, '그럼에도 우리는' 성평등을 한다
빠띠와 산성비를 포함한 각 프로젝트 팀들은 지난 14일 오후 서울 종로구 노무현시민센터에 모여 지난해 12월까지의 활동 경험을 공유하는 '성평등 페스타, 우리는 멈추지 않아'를 개최했다. 여가부의 사업 중단에도 성평등 프로젝트를 지속해온 13개 팀이 모여 활동의 과정과 결과를 나눴다. 현장엔 120여명의 시민들이 참석했다.
"여성들은 지나친 자기검열에 빠져 자신이 하는 생각, 감정, 선택을 확신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의심하게 되고 그 결과로 자신의 발언권을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여성들의 발언권은 점점 힘을 잃어가는 것이죠." -팀 산성비가 제작한 신문 '산성비주의보'에 실린 인터뷰 기사 내용 일부
이날 현장에선 권 의원이 지난 7월 "밥 먹고, 토론하고, 노는 것"이라며 폄훼한 행위들의 '사회적인 의미'가 두드러졌다. 구조적 차별에 맞서 성평등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함께 밥 먹고 토론하고 노는 "연대의 경험"은 고립감을 해소하고 나아갈 수 있는 동력을 얻게 해주는 경험이었다.
대학 내 페미니스트 마음돌봄 프로젝트 활동을 진행한 팀 ‘뿌리탐사’의 고래 활동가는 활동 과정에서 "성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는 경험만으로도 ”우리는 조금 덜 소진되고, 조금 더 위안을 얻고 앞으로의 동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20~60대 여성들에게 아웃도어 캠핑 경험을 제공하는 팀 '우먼스베이스캠프' 지영 활동가는 "자연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경험은 무엇보다 함께 시간을 보낸 이들 사이에 단단한 연결감을 만들어준다"라며 "낯선 세계로 향하는 문이 어쩐지 너무 커보여서 망설이는 여성들이 있다면 함께 손을 맞잡고 문을 열고 싶다"라고 활동 소감을 전했다.
이날 현장엔 나임윤경 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윤가현 다큐멘터리 감독, 이슬기 전 서울신문 기자, 팀 '담롱'의 수달 활동가 등이 패널로 참석해 '일상의 백래시'를 주제로 한 토크콘서트를 개최하기도 했다. 나임윤경 교수는 "차별받는 사람들의 힘은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꾸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라며 "차별과 폭력이 없는 세상에 대한 상상력을 서로에게 독려하면서 더 나은 삶을 생각했으면 좋겠다"라고 이날 모임의 의의를 전했다.
이날 행사와 더불어 지난해 '그럼에도 우리는' 프로젝트를 주최하고 운영한 빠띠 측은 "(버터나이프크루 단체들이) '그럼에도 우리는'으로 새롭게 이름을 갖고 활동을 지속했던 것은 단순한 사업의 의미를 넘어, 차별과 혐오에도 결코 멈춰서는 안 되는 일상의 성평등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함"이었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앞으로도 '그럼에도 우리는' 2기 활동을 이어갈 예정이다. 앞서 권 의원이 '혈세낭비'라 지적한 바 있는 단체들의 연대활동 앞에, 빠띠 측은 '그럼에도'란 수사를 붙여 앞으로의 포부를 밝혔다.
"우리 모두의 성평등 민주주의를 위해 멈추지 않고, '그럼에도' 계속 만나고, 이야기 나누고, 협력하면서 나아갈 것이다"
[한예섭 기자(ghin2800@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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