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사로 보는 세상] 헬리코박터가 한세기 늦게 알려진 이유
●진일보를 위해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
중고등학교 조례시간에 교장선생님 훈화를 듣는 일이 흥미로운 학생은 많지 않을 것이다. 거의 매번 같은 방식으로 내게 어떤 도움이 되는지 확실치 않고,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내용을 운동장에 서서 듣는 것은 육체적으로 힘든 일이고, 교실에서 스피커를 통해 듣는 것은 집중력을 유지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집중이 어려우면 내용이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을 수밖에 없다.
태어나면서부터 정보기술을 이용한 디지털 기계가 지배(?)하고 있는 세상을 살아온(이를 디지털 네이티브라 한다) 현재 학생들이 성인이 된 후에 디지털 기계를 접하게 된 어른들(이를 디지털 이미그런트라 한다)과 세대차를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세대차를 무시하고 같은 방법으로 과거와 현재의 학생들을 대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최근에는 고등학교 졸업식이 과거의 방식에서 벗어나 축제 형태로 바뀌어가는 예가 많아지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곤 한다. 졸업식의 목적이 무엇이냐에 따라 어떤 내용을 어떻게 담을 것인지는 고민의 여지가 있지만 흥미없는 졸업식이 흥미로운 졸업식으로 바뀌어가고 있다는 점은 고무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일을 잘 하는 방법의 하나는 목표(미션)를 설정하고, 그 목표에 도달할 수 있도록 실행방법을 계획(기획)한 다음 실제로 운영을 해 보고, 피드백을 받아서 개선을 하는 것이다. 이런 단계를 거치지 않고 전반적인 과정에 대한 성찰없이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식으로 고정관념을 고수하는 것은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 된다.
역사는 물론 의학발전에서 고정관념으로 인해 발전이 늦어진 경우가 흔히 있다. 약 40년 전 발견되어 지금은 위궤양과 위암의 원인으로 잘 알려져 있는 헬리코박터균은 세균학이 막 시작되던 1870-80년대에 이미 발견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한 세기가 지나서야 그 존재가 알려진 것은 “강한 산성인 위 속에서는 세균이 살 수 없다”는 고정관념이 의학자들의 사고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무시무시한 콜레라의 원인이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이라는 게 말이 돼?
1876년 탄저균, 1882년 결핵균, 1883년 콜레라균을 발견한 독일의 코흐(Robert Koch)는 당시까지 인류에게 가장 위협이 되는 병이었던 감염병이 세균에 의해 발생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와 함께 코흐는 특정 감염병이 특정 세균에 의해 발생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4가지 원칙을 발표했다.
그의 원칙을 인정한 후대 학자들이 수많은 감염병을 일으키는 원인균을 하나하나 발견해 감으로써 세균학이 크게 발전했다. 20세기에 세균에 의한 감염병이 크게 줄어들게 된 것은 백신과 약의 발견이 큰 역할을 했지만 그 토대는 코흐가 닦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에는 코로나19, 중증열성혈소판감소증후군, 조류독감, 에볼라바이러스감염증, 지카바이러스감염증 등 바이러스에 의한 감염병이 수시로 발견됨으로써 인류에게 위협이 되고 있기는 하지만 감염병에 의한 피해는 19세기 이전과 비교하면 크게 줄어들었다.
19세기 초까지 위에서 소화가 일어나는 과정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구토에 의해 식도를 타고 입으로 올라온 위액에 음식을 빠뜨려 어떻게 변하는지를 관찰하곤 했다. 소화는 생체내에서 일어나는 반응인데 위액을 생체밖인 공기중에 노출시켜 놓고 연구를 진행하니 약간의 지식을 얻을 수는 있겠지만 소화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얻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위액이 강한 산성을 띠고 있으며, 입을 통해 들어오는 세균의 침투를 방어하는 역할을 하고 있음도 알게 되었다. 몸에 해로운 세균이 위액에 의해 완전히 사멸되지 않고, 작은창자로 넘어오면 식중독 증상을 일으키게 된다.
인도 벵갈지역에 국한된 감염병이었던 콜레라가 19세기에 전세계로 퍼져나가면서 유럽에 엄청난 피해를 안겨 주었다. 미지의 병 콜레라로 인해 죽은 환자를 조사하던 영국의 스노(John Snow)는 1854년에 물을 통해 콜레라가 전파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렇지 않아도 콜레라에 의한 사망자가 마구 늘어나고 있는 마당에 물도 마음대로 마실 수 없다는 소식은 더 큰 공포가 되었다. 런던 시내 펌프는 물을 퍼올리지 못하도록 폐쇄되었고, 끓여서 마시면 된다는 정보도 공포를 줄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탄저균과 결핵균을 발견한 코흐는 1883년에 콜레라가 유행하고 있던 이집트로 가서 콜레라를 유발하는 세균을 찾아냈다. 거의 한 세기 동안 유럽인들을 공포에 빠뜨린 세균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코흐가 세 가지 감염병의 원인균을 발견함으로써 감염병은 세균에 의해 발생한다는 사실이 알려졌지만 그 이전에는 나쁜 공기, 미아즈마(고대 그리스어로 '오염'을 의미)에 의해 감염병이 발생한다고 믿었다. 이 이론은 코흐의 발견 이후에도 많은 이들이 믿고 있었다. 장기간 믿어 온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위생학 교수 출신으로 독일 보건정책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페텐코퍼(Max Joseph von Pettenkofer)는 세균이 원인이라는 코흐의 주장을 믿지 않았다. 그리하여 1892년에 코흐가 준 콜레라균을 직접 들이마시는 실험을 했다. 게다가 코흐의 의견을 받아들여 위액을 중화시킬 수 있도록 탄산나트륨을 복용하기까지 했다.
페텐코퍼의 몸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페텐코퍼는 콜레라균 복용직후 약간의 소화기 증상을 보이기는 했지만 콜레라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는 미아즈마가 콜레라의 원인이라는 자신의 학설을 고수했다. 그러나 콜레라균이 콜레라의 원인이라는 주장에 동의하는 학자들이 많아지면서 페텐코퍼의 제자들이 콜레라균이 들어 있는 용액을 마셨다가 콜레라가 발생한 후에야 자신의 주장을 거둬들였다.
과학적으로는 이해 불가능한 이 사건에 대해 오늘날에는 페텐코퍼가 흥분한 상태로 콜레라균을 들이키는 동안 위산이 과다 분비되어 위액에서 콜레라균이 죽었고, 페텐코퍼가 이전에 콜레라균에 노출되어 면역력을 가지고 있었을 거라 추론하고 있다.
● 위 속에서 발견된 세균
페텐코퍼의 예는 위에서 세균의 생존이 어려움을 보여 준다. 위액이 강한 산성을 띠고 있는 것은 위의 꿈틀운동과 함께 입으로 들어온 음식을 물리적으로 파괴하기 위해서다. 그러면 음식에 들어 있는 영양소가 작은창자에서 흡수할 수 있도록 작은 크기로 바뀌게 된다. 또 입으로 들어온 병균을 퇴치하기 위해서도 강산성인 위액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1875년에 독일의 보트케(Gabriele Bottcher)와 프랑스의 레툴레(Maurice Letulle)은 위에 발생한 궤양의 점막부위에서 세균집락을 발견하고, 그 세균이 궤양의 원인이 될 것이라 주장했지만 더 이상의 증거를 찾지는 못했다. 또 1881년에 독일의 클렙스(Edwin Klebs)도 위에서 살고 있는 막대모양의 세균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1889년에 폴란드의 야보로스키(Walery Jaworski)는 자신이 발견하여 Vibrio rugula라 이름붙인 세균이 위에 서식하면서 궤양의 원인이 될 것이라 주장했다. 그는 수년간 연구를 지속하면서 꾸준히 결과를 발표했지만 폴란드어로 논문을 쓴 것이 자신의 업적을 널리 알리는데 도움을 주지 못했다.
1892년에 이탈리아의 비초제로(Giulio Bizzozero)도 토리노에서 열린 의학학술대회에서 개의 위에 살고 있는 나선형 세균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그는 야보로스키와 함께 누가 헬리코박터균을 최초로 발견했는가를 판정하고자 할 때 후보로 등장하곤 한다.
이외에도 많은 학자들이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위에서 세균을 발견했다는 주장을 했지만 1980년대가 시작될 때까지 강산성 위액이 분비되는 위에서 세균이 생존한다는 것은 의학의 진리에 맞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과거의 발견은 모두 실험과정에서 발생한 세균의 오염으로 의심되었을 뿐이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새로운 발견을 얼마나 늦어지게 하는지는 잘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 노벨상을 안겨다 준 헬리코박터균 발견
호주의 워렌(John Robin Warren)은 1979년에 위염 환자의 위점막에서 새로운 세균을 발견했다. 그 해에 로열퍼스병원으로 온 마샬(Barry James Marshall)은 소화기내과 교수가 되기 위해 연구주제를 찾던 1981년에 워렌을 만나 이 발견에 대해 상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마샬은 워렌의 지도를 받아 연구를 진행했다. 1982년에 위염 환자에서 세균을 분리하여 헬리코박터 파일로리(Helicobacter pylori)라 이름붙이고, 이 세균이 위염과 위궤양을 일으킬 것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러자 과거의 연구자들처럼 위에서는 세균의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다.
마샬과 워렌은 그 때까지 치료가 어려운 위염과 위궤양 환자에게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약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은 비스무스와 메트로니다졸이 치료약으로 사용가능하다는 결과를 얻었으며, 이로써 위염과 위궤양 치료가 한층 발전하였다.
헬리코박터균 발견 전에는 음식물, 알콜, 흡연, 스트레스 등 다양한 원인에 의해 위염과 위궤양이 발생할 것이라 생각했으나 이제는 헬리코박터균이 궤양의 100%는 아니더라도 가장 중요한 원인임이 알려져 있다. 따라서 이를 해결함으로써 치료가능성을 크게 높일 수 있다.
마샬과 워렌은 헬리코박터균에 의해 궤양이 발생한다는 공로를 인정받아 2005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19세기 말부터 특정 질병의 원인이 되는 특정 미생물 발견이 각광을 받기는 했지만 질병의 원인이 되는 세균을 발견했다는 공로로 노벨상을 받은 것은 결핵균을 발견하여 1905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코흐 이후 100년만의 일이다.
어떻게 보면 진부하다고 할 수 있는 연구결과에 대해 노벨상이 수여된 것은 유병률이 높으나 해결책이 없던 질병의 해결가능성을 제시했고, 강산성에서 세균이 생존할 수 없을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는 역할을 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참고로 헬리코박터균이 강산성인 위액에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표면이 정상적인 점액으로 둘러싸여 있으므로 위액으로부터 보호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위궤양은 위암과도 상관이 있으므로 세계보건기구에서는 헬리코박터균을 직접 암을 유발하는 제1의 발암물질로 규정하고 있다.
헬리코박터균에 의한 위염이나 위궤양으로 고생하는 분들은 열심히 치료함으로써 위암발생을 억제할 수도 있다. 이런 내용은 모두 위에서 세균이 살 수 없을 것이라는 고정관념에 구애받지 않고 연구를 진행하여 새로운 발견을 한 마샬과 워렌의 공로에 의한 것이다.
※참고문헌
1. Mark Kidd, Irvin M. Modlin. A Century of Helicobacter pylori; Paradigms Lost – Paradigms Regained. Digestion 1998;59:1–15
2. Ming-Hui Lin, Hao-Tsai Cheng, Wen-Yu Chuang, Li-Kuang Yu, Yung-Kuan Tsou, Mu-Shien Lee. Annals of Diagnostic Pathology. 2013;17(1):63-6.
3. Barry Marshall (Editor). Helicobacter Pioneers: Firsthand Accounts from the Scientists who Discovered Helicobacters 1892-1982. Wiley-Blackwell, 2008
4. 노벨 재단 홈페이지. https://www.nobelprize.org/prizes/medicine/2005/marshall/facts/, https://www.nobelprize.org/prizes/medicine/2005/warren/facts/
※필자소개
예병일 연세대학교 의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C형 간염바이러스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대학교 사우스웨스턴 메디컬센터에서 전기생리학적 연구 방법을,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의학의 역사를 공부했다. 연세대학교 원주의과대학에서 16년간 생화학교수로 일한 후 2014년부터 의학교육학으로 전공을 바꾸어 경쟁력 있는 학생을 양성하는 데 열중하고 있다. 평소 강연과 집필을 통해 의학과 과학이 결코 어려운 학문이 아니라 우리 곁에 있는 가까운 학문이자 융합적 사고가 필요한 학문임을 소개하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주요 저서로 『감염병과 백신』, 『의학을 이끈 결정적 질문』, 『처음 만나는 소화의 세계』, 『의학사 노트』, 『전염병 치료제를 내가 만든다면』, 『내가 유전자를 고를 수 있다면』, 『의학, 인문으로 치유하다』, 『내 몸을 찾아 떠나는 의학사 여행』, 『이어령의 교과서 넘나들기: 의학편』, 『줄기세포로 나를 다시 만든다고?』, 『지못미 의예과』 등이 있다.
[예병일 연세대원주의대 의학교육학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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