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직원에 회초리 든 치과의사, 긴 법정 다툼 8년의 결과는

이가영 기자 2023. 1. 17.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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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이연주

2015년 10월의 어느 날, 서울의 한 어린이병원 후원회에서 계약직으로 근무했던 김원경(30대)씨는 자선만찬행사가 열린 골프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치과의사이자 후원회 이사 A씨는 김씨의 업무 처리 방식을 질책하면서 “회초리로 맞아야 한다”고 말했다. A씨는 VIP룸에서 둘만 있는 사이에 “싸리나무 왜 안 가져오느냐”고 거듭 이야기했고, 김씨는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가 나뭇가지를 들고 왔다. 김씨가 수치심과 자괴감에 고개를 숙여 울음을 터뜨리자 A씨는 “너 웃는 거냐, 쇼하는 거냐”라며 옆구리를 밀쳤다. A씨는 이후 “살이 쪘다” “사귀는 사람 있냐”고 묻거나 “여기 온천물이 나오니 목욕을 하라”고 말하기도 했다.

다음날 김씨는 후원회 사무국장에게 성폭력 피해 사실을 토로했고, A씨는 사과문을 제출한 후 후원회 이사와 외래교수직을 사임했다.

◇성추행 무죄, 피해자에서 피의자로

이때부터 김씨의 긴 법정 다툼이 시작됐다. 김씨는 A씨를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강제추행 혐의로 고소했지만, 1·2심 모두 “제출된 증거만으로는 추행을 인정하기 어렵다”며 무죄가 선고됐다.

그러자 A씨는 다시 김씨를 무고, 모해위증,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등 7가지 혐의로 고소했다. 김씨 측 변호사와 재판에서 김씨 측 증인으로 출석한 후원회 사무국장도 고소했다. 검찰에서 모두 무혐의 처분을 받기는 했지만, 시간은 어느덧 2020년이 되어 있었다.

김씨는 다시 A씨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민사 소송을 진행했다. 그러나 이 역시 1·2심 모두 원고 패소 판결이 났다. 그 사이 김씨는 공황장애가 심해져 후원회를 그만둬야 했다. 그러던 2021년 11월, 김씨에게 실낱같은 희망이 생겼다. 대법원 재판부가 “A씨의 행위는 직장 내 괴롭힘이자 성희롱에 해당한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린 것이다.

◇파기환송심 재판부 “성희롱 맞다”

지난해 11월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김원경씨가 파기환송심 결심공판을 마치고 친구들과 함께 "나는 지지 않았다"는 문구가 담긴 플래카드를 펼친 채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이은의 변호사 제공

파기환송심 재판부인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 11-3부(재판장 김우현)는 지난 11일 A씨가 김씨에게 10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A씨는 업무와 전혀 무관하고 성적 수치심을 느낄 수 있는 발언을 여러 차례 했다”며 “VIP룸에서의 일련의 행위는 상식에 비추어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이어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는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한다”고 했다.

재판부는 “이와 같은 성희롱, 괴롭힘은 김씨에 대한 불법행위에 해당하고, 이로 인해 김씨가 정신적 고통을 겪었을 것은 분명하므로 A씨는 정신적 손해를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했다.

두 번의 형사 재판, 무고 고소와 맞고소, 검찰의 무혐의 결정, 네 번의 민사 재판을 거쳐 8년 만에 김씨의 ‘피해’가 법적으로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김씨는 지난해 11월 파기환송심 결심공판에서 직접 증언에 나선 바 있다. 당시 그는 “돈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다”고 했었다.

재판이 끝난 후 김씨는 법원 앞에서 준비한 플래카드를 꺼내 들었다. 그곳에는 짧지만 무거운 문구가 담겨 있었다.

“나는 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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