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명예 제대한 아들, 뇌졸중에 쓰러진 가부장, 복수심에 불타는 어머니···연극 ‘히어’[리뷰]
미국 해병 아이작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아군의 유해를 수거하는 일을 하다 마약이 적발돼 불명예 제대하고 3년 만에 집으로 돌아온다. 집안은 모든 것이 제자리를 잃은 난장판이다. 아버지 아놀드는 폭력적인 가부장이었지만 뇌졸중을 겪은 뒤 광대 같은 모습으로 집 안에 갇혀 지낸다. 어머니 페이지는 아놀드에 대한 복수심으로 그를 학대하며 가사노동을 팽개친다. 여동생 맥신은 트랜스젠더 남성 맥스가 됐고 이제 퀴어 공동체에서 살기를 꿈꾼다. 아이작은 ‘비정상’인 집안을 ‘정상’으로 돌려놓으려 한다.
연극 <히어>의 원작자인 미국 극작가 테일러 맥은 여성, 남성, 논바이너리를 넘어 자신의 젠더를 ‘공연자(Performer)’로 규정하며 기존 질서와 통념에 저항해왔다. 페이지는 맥스를 ‘그(Him)’나 ‘그녀(Her)’가 아니라 둘을 합성한 새로운 목적격 대명사 ‘히어(Hir)’로 부르라고 선언한다. 이 단어는 ‘여기(Here)’와도 발음이 같다.
‘여기’는 아놀드가 폐기물 매립지에 합판으로 지은 집이고, 아놀드가 폭력으로 짓눌러 간신히 유지한 가족이다. 아놀드가 뇌졸중으로 권력을 잃자 집과 가족의 흉측한 실재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래도 아이작은 ‘여기’를 지키고 싶다. 집의 질서를 회복하고 가족을 재건하려 한다. 페이지는 ‘여기’를 부수고 싶다. 집의 질서를 붕괴시키고 가족으로부터 해방되려 한다. ‘여기’를 두고 다투는 아들 아이작과 어머니 페이지가 주로 극을 이끌어간다.
<히어>는 이 가족의 갈등을 통해 남성성, 가부장제, 정상가족 신화, 이성애 중심주의, 기독교 등을 통쾌하게 전복한다. 페이지가 새로운 시대를 확신하며 퀴어 이론을 설명하는 일부 대사는 다소 작위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히어>는 ‘전복’에서 그치지 않고 ‘전복 이후’까지 이야기하려 한다. 객석에선 초중반에 가벼운 웃음이 나왔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히어>는 캐릭터들을 선과 악, 진보와 보수, 질서와 혼란으로 단순히 구분하지 않는다. 캐릭터들은 다면적이고 다층적이다. 아이작은 혐오감에 구토하면서도 맥스의 존재를 이해하고 가족으로 받아들이려 노력한다. 페이지는 가부장제를 뒤엎는 변화를 추구하지만 대책 없이 억압적인 가모장제 질서를 만든다. 아놀드는 가족에게 철저하게 소외당하며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연민의 대상이 됐다. 맥스가 바닥의 옷을 개는 결말은 여러 의미로 해석할 수 있어 보인다.
<히어>는 2014년 2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처음 무대에 올랐다. 국내에선 이번이 초연이다. 극단 풍경 대표인 박정희가 연출을 맡았다. 여러 연극·영화·드라마에 출연한 박명신과 김수현이 각각 페이지와 아놀드를 연기한다. 주인공 아이작은 홍선우, 맥스는 김하람이 맡았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 더줌아트센터에서 오는 29일까지.
허진무 기자 imagin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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