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은 ‘사법적 정책결정’의 막중함을 제대로 알고 있나

이창곤 2023. 1. 17.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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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곤의 정담]이창곤의 정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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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국가의 틀을 어느 정도 마련한 상황에서도 우리나라 사회보장 사건 수가 이들에 비해 턱없이 적은 이유는 뭘까. 이는 취약계층 등 당사자들이 사법 영역 안으로 적극적으로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박 연구위원은 “권리구제는 간소하고 쉬워야 하며, 짧은 시간 안에 종결돼야 하고 그 비용이 최소화돼야 하는데, 이런 사항들이 구제절차에 충분히 반영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시민단체 회원들이 2022년 4월7일 서울 종로구 통의동 인수위 인근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부양의무자기준 완전 폐지를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우리나라에서 ‘사법적 정책결정’이 국민의 기본권 보호에 더 부합하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릇 제대로 된 해법 도출을 위해서는 정확한 현실진단이 우선이듯, 이 질문에 대한 답변 또한 사회적 기본권(사회권) 보호와 직결되는 사회보장 사건들을 법원이 어떻게 다뤄왔는지를 살피는 데서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특별히 기억나는 사건이 있다. 1994년 70대 심아무개씨 부부가 낸 ‘생계보호기준 위헌확인 사건’(94헌마33)이다. 생활보호대상자(현 기초생활수급자)였던 심씨 부부는 당시 “보건사회부가 정한 생활보호기준이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를 침해했다”며 헌법소원을 냈다. 부부는 생활보호기준에 따른 정부의 지원금(생계급여, 1인당 6만5천원)이 최저생계비(1인당 11만8600원)의 절반 수준에 불과해 헌법이 보장하는 행복추구권과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침해당했다고 주장했다.

1997년 5월 헌법재판소는 “생계보호의 구체적 수준을 결정하는 것은 입법부 또는 입법에 의하여 다시 위임을 받은 행정부 등 해당 기관의 광범위한 재량에 맡겨져 있다고 보아야 한다” “헌법상 용인할 수 있는 재량의 범위를 (정부가) 명백히 일탈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심씨 부부의 청구를 기각했다. 이를 두고 “동물적 생존권”만을 인정한 반복지적 결정이란 혹평부터 그래도 “사법부가 사회권을 기본권으로 인정했다”는 적극적 평가까지 다양한 해석과 평가가 나왔다.

1995년 이기남씨가 관악구청을 상대로 제기한 노령수당 부지급처분 취소청구 사건도 복기해볼만하다. 그해 만 65살이 된 생활보호대상자였던 이씨는 관악구청에 노령수당(현 기초연금)을 신청했다. 당시 노인복지법에는 “65세 이상의 자에 대하여 노령수당을 지급할 수 있다”고, 노인복지법 시행령에서는 “노령수당의 지급대상자는 65세 이상의 자중 소득수준 등을 참작하여 보건사회부 장관이 정하는 일정 소득 이하의 자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관악구청은 이씨 신청을 반려했다. 70살 이상 생활보호대상자에게 생계급여를 지급하도록 한 보사부 노인복지사업지침이 근거였다. 이에 이씨는 행정소송을 제기했는데 하급심에서 패소했다.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1996년 4월 대법원은 법령에서는 65세 이상 가운데 소득수준 등을 참작해 지급대상을 선정하도록 했는데, 보사부 지침은 임의로 나이 기준을 70세로 상향해 상위법의 위임한계를 벗어났다며 이씨 손을 들어줬다. 이 판결로 65살 이상~70살 미만인 많은 생활보호대상자들이 노령수당을 받을 수 있게 됐다.

대표적인 사회보장 관련 소송으로 꼽히는 두 사건은 행정부의 사회보장 정책이 법원의 사법적 정책결정 과정을 거쳐 법률과 정책의 의미를 확정하거나 바꾸는 구실을 함을 보여준다. 또 행정부 정책의 문제점을 환기시켜주기도 한다.

짚어볼 점은 두 소송은 모두 참여연대가 ‘공익 법 운동’차원에서 벌인 기획소송이란 점이다. 경제력이 부족했던 생활보호대상자인 심씨 부부와 이씨가 시민단체의 조력을 받아 소송을 제기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도 해당 사안에 관한 문제제기 자체가 없었을 것이고, 정책 변화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대부분 취약계층은 억울한 상황이 생겨도 복지는 나라에서 주는 혜택이란 인식이 강해 자신의 권리가 침해됐다고 여기지 못했고, 비용까지 부담해야 하는 소송은 언감생심이다. 억울하고 부당한 사회보장권 침해 사례는 수도 없이 많았겠지만, 오랫동안 소송은 고사하고 정부의 이의신청 절차조차 밟지 못하고 없던 일로 치부돼 왔다.

두 소송 이후 30년이 흘렀다. 많은 것이 달라졌다.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에 올라서면서 사회복지 대상자와 예산이 크게 늘었고, 이제는 어엿한 복지국가의 모양새를 갖췄다. 노인장기요양보험과 기초연금 등 새로운 제도가 도입됐다. 복지가 시혜가 아니라 권리란 인식도 확산했다.

그렇다면, 이런 사회변화는 사회권 보호를 위한 사법부 역할에 어떤 진전을 가져왔을까. 또 사회보장 사건을 다루는 법원의 역할과 준비는 어떤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유감스럽지만 긍정적인 답을 내놓기 어렵다. 우선 사회보장 사건에 관한 기초통계조차 없다. 박우경 사법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이 판례검색을 통해 추산한 결과가 있는데, 어림잡아 연간 수천건에 불과하다. 서구 복지국가에 견줘 터무니없을 정도로 적다. 박 연구위원은 독일 사회법원은 연간 30만~40만건의 사회법 분쟁 소송사건을 다룬다고 설명한다. 프랑스도 연간 10만~20만건이, 영국도 연간 20만건 안팎 사건이 접수된다고 한다.

복지국가의 틀을 어느 정도 마련한 상황에서도 우리나라 사회보장 사건 수가 이들에 비해 턱없이 적은 이유는 뭘까. 이는 취약계층 등 당사자들이 사법 영역 안으로 적극적으로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박 연구위원은 “권리구제는 간소하고 쉬워야 하며, 짧은 시간 안에 종결돼야 하고 그 비용이 최소화돼야 하는데, 이런 사항들이 구제절차에 충분히 반영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19 90년대 참여연대에서 사회보장 사건 관련 공익소송들을 주도했던 이찬진 변호사의 진단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변호사는 2004년 쓴 글에서 “소송제도의 결함과 사법비용의 부담 문제가 한국 사회에서 사회복지 문제에 관한 법률적, 사법적 해결 방법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기초생활보장제도와 4대 보험 등 분야별로 법정을 찾기 전에 이의신청 또는 심판청구 같은 행정상 불복절차가 마련돼 있지만, 이 또한 접수 건수는 많지 않다. 비교적 규모가 큰 사회보험 영역도 연간 2만건이 넘지 않고, 우리 사회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관련된 기초생활보장제도 분야 건수는 극히 미미한 수준이다. 서울사회복지공익법센터 자료를 보면, 인구 천만에 이르는 서울시에 접수된 기초생활보장제도 관련 이의신청 건수는 2017년 이후 해마다 한자리수에 그친다. 이 센터 김도희 변호사는 “빈곤층에겐 이의신청조차 쉽지 않은 게 현실”이라고 토로했다.

민주주의에 있어 사법부를 최후의 보루라 하듯, 사회적 취약계층에게 사법부는 사회적 기본권을 보호해줄 수 있는 최후의 보루다. 그런데 사건 자체가 적으면, 법원이 최후의 보루임을 확인하고 체감하는 경우도 적을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해 짚어봐야 할 또다른 대목은 사법부가 사회권 관련 사건들을 제대로 다룰 수 있도록 전문성 확보를 위해 어떤 준비를 하고 있냐는 점이다. 선진 복지국가들은 저마다 다른 사법시스템 속에서 효율적이고 전문적인 사회보장 사건 심리를 위한 체계를 만들어 운용하고 있다. 사회보장사건을 다루는 전문법원인 사회법원을 따로 두고 있는 독일이 대표적이다. 독일 전체 소송사건의 10%가량을 다루는 사회법원에서는 매년 30만~40만건의 사회법 분쟁 사건을 심리한다. 오스트리아와 벨기에 등에선 노동사건과 사회보장사건을 묶어 처리하는 노동사회법원을 운영한다. 민사·형사로 나뉘던 우리나라 법원이 행정, 특허, 가정 등으로 세분화했는데 선진국은 사회분야가 별도로 다뤄지고 있는 셈이다.

이호근 전북대 교수 등 법학자들은 우리나라에서도 사회법원이나 혹은 노동사회법원 도입을 검토해볼만하다고 말한다. 단계적으로 접근하자면 서울행정법원이나 규모가 큰 지방법원에 사회권 전담 재판부를 신설하는 방안도 검토할 수 있다. 아마도 여기서 판례가 쌓인다면 사회권에 대한 우리 사회의 감수성과 사회보장 제도가 진일보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이는 사법부로서도 진지하게 검토할 당위가 충분하다. 사회보장 사건의 해결은 국민 삶의 기본조건을 보장하는 책무가 있는 국가, 특히 사법부의 존립 근거와도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이창곤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복지를 중심으로 노동, 주거, 환경 등 사회정책 이슈에 특별한 관심을 쏟는다. <한겨레> 편집국에서 팀장과 부장, 논설위원, 부국장 등을 거쳤고,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장과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장,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상임이사를 지냈다. 지은 책으로는 <복지국가를 만든 사람들-영국편>, <복지의 문법>(공저), <성공한 나라 불안한 시민>(공저), <불평등 한국, 복지국가를 꿈꾸다>(공저), <진보와 보수 미래를 논하다>(편저)등이 있다. go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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