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언어 ‘욕설’도 알아챌 수 있는 이유, 비밀은 ‘접근음’
영어의 y·r·w…한국어에선 이중모음 해당
ㅋ·ㅌ·ㅍ 등 파열음은 예상보다 많지 않아
#사례1
소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작가 더글러스 애덤스는 1980년대 초반 세번째 작품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을 탈고한 뒤 편집자로부터 ‘f가 들어간 단어’(fuck)를 좀 덜 불쾌한 것으로 바꿔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해당 단어를 ‘벨기에’(Belgium)라는 단어로 모두 바꿔버렸다.
#사례2
에스에프 영화 <스타워즈> <스타트렉> 등에는 fierfek, grozit, frak 같은 뜻모를 단어가 외계인의 욕설로 등장한다.
욕설은 언어를 통해 표출하는 부정적 감정이다. 욕을 다반사로 내뱉는 사람도 있고 거의 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욕설이 없는 언어는 없다.
현재 지구상에는 약 7천개의 다양한 언어가 존재한다. 현대 언어학에선 특정한 소리와 의미 사이엔 연관성이 없다고 보지만 일부의 경우엔 언어 간에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음소들도 있다. 동물 울음소리를 표현하는 의성어가 쉽게 들 수 있는 사례다.
아기들이 처음 배우는 단어인 엄마, 아빠를 가리키는 말에도 공통 음소가 있다. 대체로 엄마를 가리키는 말에는 ㅁ(m), 아빠를 가리키는 말에는 ㅂ(b) ㅍ(p)이 포함된다. b, m, p, t, d, k는 발음하기가 가장 쉬운 자음에 속한다.
그렇다면 다양한 세계 언어의 욕설에도 무언가 공통점이 있을까? 다른 언어권의 욕설을 들을 경우, 그 뜻은 알지 못해도 욕설인지 아닌지는 구분할 수 있을까?
영국 런던대 심리학자들이 세계의 욕설에 통용되는 음성 유형을 찾아내 국제학술지 심리작용학회보(Psychonomic Bulletin & Review)에 발표했다.
연구진이 찾아낸 욕설의 특징은 일반적으로 접근음(Approximant)이 없다는 점이다. 접근음이란 조음기관인 아래쪽과 위쪽 입술, 치아, 또는 입천장과 혀를 서로 밀착시키지 않고 그 사이의 좁은 틈으로 공기를 통과시키면서 내는 소리를 말한다. 예컨대 영어에서 yes의 y, run의 r, war의 w가 접근음이다. 국립국어원 박선 연구사는 “한국어에서는 ‘와, 웨, 워’ 같은 이중모음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반면 조음기관들을 서로 맞부딪혀서 내는 F, S, V, Z 등은 마찰음이라고 부른다.
접근음이 들어 있는 단어의 자음은 ㅍ(P), ㅌ(T), ㅋ(K)처럼 거친 파열음이 있는 단어보다 더 부드럽게 들린다.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의 벤자민 베르겐 교수(인지과학)에 따르면 욕설 중에는 파열음으로 끝나는 것이 많다.
따라서 대부분의 욕설에 접근음이 없다는 것은 욕설이 거칠게 들린다는 걸 뜻한다. 이는 우리 뇌에 어떤 소리가 욕설인지를 구분하는 공통적인 판단 기준이 각인돼 있음을 시사한다.
이처럼 어떤 특정 소리와 뜻이 결합돼 있는 것을 음성상징(Sound symbolism)이라고 부른다. 지난해 영국 ‘왕립학회철학회보B’에 실린 유럽 언어학자들의 연구논문은 음성상징을 보여주는 한 사례다. 연구진이 20여가지 언어 사용자들을 대상으로 무의미한 단어 ‘부바’(bouba)와 ‘키키’(kiki)에서 어떤 형상을 연상하는지 물어보자, 실험참가자들은 공통적으로 부바에서는 둥근 모양을, 키키에서는 날카로운 모양을 떠올렸다.
zog·yog·tsog 중 어느 것이 욕설일까
런던대 연구진은 욕설도 이에 해당할 것이라는 가설을 세우고 검증 실험에 나섰다.
연구진은 어족이 다른 5가지 언어(히브리어, 힌두어, 헝가리어, 한국어,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20명씩을 골라, 이들에게 자신들이 아는 가장 저속한 욕설을 전부 말해줄 것을 요청했다.
연구진은 이 가운데 중복되거나 약간 변형된 것, 인종 차별적인 것을 제외하고 히브리어 34개, 힌두어와 헝가리어 각 14개, 한국어 17개, 러시아어 26개의 욕설을 골라내 분석했다.
분석 결과는 연구진의 예상과는 다소 달랐다.
연구진은 평상시 쓰는 말보다 욕설에 더 많은 파열음이 포함돼 있을 것으로 짐작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파열음이란 허파에서 나오는 날숨을 일단 막았다가 그 막았던 자리를 터뜨리면서 내는 소리다. ㅂ·ㅍ·ㄷ·ㅌ·ㄱ·ㅋ 등이 파열음에 속한다.
욕설의 또 다른 특징은 l, r, w , y 같은 접근음이 포함돼 있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연구진은 이런 소리가 실제로 어떻게 인식되는지 알아보기 위해 두가지 실험을 했다.
첫번째 실험은 6개 언어(아랍어, 독일어, 스페인어, 중국어, 프랑스어, 핀란드어)의 원어민 215명을 대상으로 소리만을 듣고 욕설 비슷한 단어가 불쾌감을 주는지 알아보는 것이었다. 실험에 사용한 단어는 연구진이 임의로 만든 가상의 단어였다. 연구진은 그 중 하나에 접근음을 포함시켰다.
실험참가자들은 접근음이 포함된 단어는 거의 욕설로 느끼지 않았다. 예컨대 ‘새’를 뜻하는 알바니아어 ‘zog’(조그)와, 이 단어의 일부를 접근음(y)으로 대체한 ‘yog’(요그), 접근음이 아닌 음소로 대체한 ‘tsog’(트소그)를 들려준 후 어느 단어가 더 욕설처럼 들리는지 물었다. 세 단어는 모두 욕설이 아니었지만 실험참가자들은 접근음이 없는 ‘트소그’를 욕설로 생각했다.
프랑스어는 다른 언어보다 상대적으로 접근음이 있는 욕설이 더 많지만, 프랑스어 원어민들도 접근음이 없는 단어를 욕설로 선택하는 경우가 63%로 더 많았다.
말을 감싸 순화시켜주는 ‘경첩 효과’
두번째 실험에서는 욕설에 접근음을 추가한 단어의 순화 효과를 알아봤다. 예컨대 ‘damn’ 대신 접근음 r을 넣은 ‘darn’이라는 단어를 썼을 때의 느낌을 비교했다.
연구진은 원래의 욕설을 약간 변형한 24개 단어에 대한 느낌을 비교 분석한 결과 l, r, w, y 같은 접근음이 욕설 같지 않은 느낌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진은 욕설에서 접근음이 하는 역할을 문에 다는 압축공기 경첩에 비유했다. 화를 내며 상대방에게 욕설을 내뱉더라도 경첩처럼 접근음이 이를 감싸 순화시켜준다는 것이다. 연구진은 실제 점잖은 영어 욕설을 살펴본 결과 다른 욕설보다 접근음이 두배 이상 많은 걸 확인했다.
연구진은 그러나 접근음의 역할은 경향성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욕설은 상대방의 감정을 자극하는 부정적 효과가 커 많은 나라에서 법과 제도를 통해 규제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 욕설은 모욕죄의 구성요건이다.
욕설은 그러나 욕설을 하는 당사자에게는 유익한 효과를 가져다 주기도 한다. 연구진에 따르면 예컨대 큰 소리로 욕을 하면 통증이 다소간 진정되고 신체 기능이 활성화한다는 연구들이 나와 있다.
*논문 정보
https://doi.org/10.3758/s13423-022-02202-0
The sound of swearing: Are there universal patterns in profanity?
Psychonomic Bulletin & Review
곽노필 선임기자 nop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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