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는 달라도 많이 닮은 정은혜와 훈데르트바서의 사모곡 [우도 여행]

2023. 1. 17.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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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예술가 제주 우도에서 동행하다
오스트리아 3대화가, 죽어서 우도 정착
엄마 반대 딛고 상생의 예술가로 우뚝
훈데르드바서 파크 우도봉 멋진 하모니
정은혜 이 예술파크에서 니얼굴 특별전
몰래 그린 그림,“엄마가 미안해” 감격
작업인부들 믿고 맡겨 예술가로 만들어
예술여행의 극치, 토끼해 쇄신여행 제격

[헤럴드경제, 우도=함영훈 기자] 훈데르트바서 파크가 제주 우도봉 아래 착상한 지 8개월이 지나면서 이젠 제법 예술섬 우도의 면모가 정착되는 듯 하다.

연말연시 이 예술파크에 아주 반가운 손님이 찾아들었다. 바로 다운증후군 장애를 딛고, 우영우 보다 더 감동적인 현실의 드라마를 만들어낸 정은혜 작가이다. 지난해 ‘우리들의 블루스’ 드라마에 출연해 연기자의 모습도 보여주면서 자신감을 더 키운 정 작가이다. 오스트리아 자연주의, 상생미학의 예술가 훈데르트바서와 참 많이 닮은 대한민국 작가이다.

제주 우도의 명예주민이 된 오스트리아 3대 미술가 훈데르트 바서가 ‘우리들의 화가’ 정은혜 작가와 동행하는 모습에, 우도봉과 성산일출봉이 흐뭇하게 웃는다.

우도 훈데르트바서파크 전경
우도에 나란히 붙어있는 훈데르트바서와 정은혜 작가 얼굴 그림

우도 톨카니 앞바다에 비가 오던 지난 13일은 비 내려서 좋은 날이었다. 물을 좋아해 ‘100개의 강(Hundert wasser)’이라고 스스로 이름 붙인 거장의 흔적, 자연·빛·색의 근원이 되는 파랑·초록·노랑·빨강의 우도 훈데르트바서파크 색감과 멋진 채도대비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는 그림을 그리지 말거라”, “네가 그림을 그리겠다고?” 했던 어른의 이유있는 언행 때문에, 어린 시절 몰래 그림을 그렸던 정은혜와 훈데르트바서(1928~2000)는 이제 세계인들이 존경하는 작가로 우뚝 섰다. 소(牛)섬에서의 느린 동행은 앞으로 몇 달 동안 계속된다.

우도에 가면 ‘소 되는 줄 알았는데 시인이 되었다’던 연탄시인 이생진의 우도 감상에다, 이젠, ‘시인 만 될 줄 알았더니, 예술가 까지 되었다’는 얘기를 덧붙여야겠다.

아들을 비엔나로 떠나보내는 엄마의 근심어린 표정 [훈데르트바서作]
정은혜 작가 모녀

▶훈데르트바서와 정은혜의 사모곡= 이슬비가 추상화를 그려놓은 톨카니 카페 창문 너머, 두 엄마의 표정이 오버랩된다. 유대인에 대한 위협이 심한 때 “그림을 배우러 비엔나로 가겠다”는 바서를 말리지 못하는 어머니의 근심, “나도 그려볼래요. 그릴 거리를 주세요”라는 장애인(다운증후군) 딸 은혜에게 뷰티잡지 한 쪽을 건네주던 정 작가 엄마의 표정이다.

늘 뒷방에 있다가, 나중에 엄마네 미술학원 청소 만 하다가, 몰래 그려본 은혜의 회화 실력은 불과 몇 달 새 일취월장한다. 그러나 엄마는 은혜가 습작을 하는지도 몰랐다.

잡지 광고 한 장을 모티브로 자신의 예술혼을 스케지북에 불어넣은 정은혜는 첫 작품을 엄마에게 조심스럽게 건넸고, 엄마는 잠시 얼어붙더니, 펑펑 울며 회한 어린, 감동의 대성통곡을 한다. 그리고 “우리 은혜, 미안해, 미안해”하며 꼭 끌어안는다.

이웃집 아저씨 같은 느낌의 예술가겸 환경운동가 훈데르트바서

유대인 친족 69명이 학살 당하는 것을 본 이후 바서의 안전을 위해 은둔하길 바랬던 엄마는 30대-10대 모자(母子)가 다정하게 소풍하던 풍경들 조차, 아들이 꼬박꼬박 그려뒀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안다.

그리고 엄마는 근심 속에 떠난 바서가 비엔나 등 세계 곳곳에서 자연주의 화가, 건축가, 환경운동자로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트라우마에서 벗어났고, 1972년 아들의 보람찬 활동을 도울 조력자 요람하레(훈데르트바서재단 이사장)을 남기고 평온하게 잠들었다.

훈데르트 바서와 정은혜의 많은 공통점 속에는 엄마를 너무너무 사랑하고 존경한다는 점도 포함된다.

▶훈데르트 우도 아리랑= 훈데르트 바서는 클림트, 에곤실레와 함께 오스트리아 3대 화가이고, 가우디와 더불어 유럽에서 가장 독창적인 건축가 투톱으로 꼽힌다. 또, 가장 실천적인 환경운동가로 평가받는다.

때묻지 않은 근원적 자연과 동심을 사랑했던 그는 빛과 색의 근원이 되는 적,황,녹,청색을 좋아했다. 이들 4색이 온갖 빛과 색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각 색깔이 분명하게 드러나도록 보색대비를 좋아했다. 저마다의 개성을 가진 모든 인간은 자기 색깔을 분명히 갖고 있고, 창의성을 끊임없이 확장시킨다는 자연주의 철학·미학과 맥락이 닿아있다.

오스트리아 훈데르트바서 하우스

오스트리아 훈데르트바서하우스 등 건축물을 지을 때엔 철저하게 자연친화적이었다. ‘인간은 자연에 들른 손님’이라는 생각에서다. 우도 예술파크 역시 그의 이념을 그대로 계승하기 위해 비용부담과 기술적 난제에도 불구하고 사업부지 내 이미 자생하고 있던 수목 1600여주를 그대로 살리거나, 옮겨 심어 생존시켰으며, 녹지 위에 뮤지엄이 들어서도 원래 녹지를 옥상 정원으로 고스란히 옮겼다.

원래 있던 수목, 꽃나무가 방 한칸, 발코니 한칸을 차지하도록 그대로두는 ‘나무 세입자’가 창밖을 내다보는 풍경도 우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근원적 모습, 개성의 존중이라는 바서의 미학에 따라, 우도 파크 78개의 기둥과 131개의 유리창을 모두 다른 모양으로 구현된다.

우도 훈데르트바서파크에 구현된 나무세입자와 인부들이 작품으로 만든 창문과 주변 타일예술

‘노예(개성을 잃은 사람)가 지어서는 안된다.’ 우도 파크의 131개 창문과 그 주변 마지막 미장작업을 남겨둔 상황에서 작업 근로자들에게 “멋 대로 하라”는 바서의 철학을 전했더니, 몇몇은 “도면,지침도 안주냐”며 떠났다. 남은 작업자들은 젖먹던 힘 까지 발휘한다. 그리고 창문 마다 멋진 작품들이 속속 탄생하고, 요람하레 이사장은 인부들의 작품들에 탄복하며 모두 승인한다.

한 60대 인부는 “일생 최대의 보람을 느꼈고, 나는 막노동자가 아니라 예술가라는 자부심도 얻었다”고 말했다. 말년에 한국에 가보지 못해 아쉬워했다던 훈데르트바서가 숨진 지 22년만에 우도에서 보여준 기적이었다.

훈데르트바서뮤지엄(오른쪽)과 정은혜 특별전이 열리는 우도갤러리

▶정은혜, 바서를 닮다= ‘굿 닥터’, ‘이상한 변호사’는 드라마이고, 정은혜는 드라마 보다 더 드라마틱한 실존 인물이다. 훈데르트바서 파크 내 우도 갤러리의 정은혜 특별전 ‘니얼굴’ 전시장은 그림 옆에 그림해설이 없고, 작가의 이야기가 적혀 있는 점이 훈데르트바서 뮤지엄 구성과 같다.

“의사선생님이 ‘이 아이는 다운증후군이에요’ 그랬더니 사람들은 놀랐어요. 엄마도 깜짝 놀랐어요/ 갈 데가 없었어요. 집 한구석에서 혼자 뜨개질하고 이불을 덮고 있었죠. 매일매일 동굴 속에서 있었어요. 2013년 부터 엄마 화실 미술학원에서 청소하고 뒷정리하면서 돈도 벌었죠. 저도 하고 싶어서 맨 구석에 앉아서 그림을 그렸죠.”

은혜의 첫 작품과 엄마의 폭풍 눈물 사건이 있은 후, 그녀는 양평 두물머리에서 캐리커쳐 작가로 활동한다. 7년간 그린 4000여 장 중 100여장, 순수작품 중 10여점, 한지민 등 드라마 출연진과 찍은 사진 등이 벽에 빼곡이 전시된 틈새로, 그녀의 자신감 넘치는 육성이 기록돼 있다. “(한)지민 언니 고맙고 사랑해”라며 극중 쌍둥이 자매에 대한 우정도 전했다.

청와대 춘추관 전시작품. 우리들의 블루스 쌍둥이 자매. 정은혜와 한지민을 그린 것이다.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쌍둥이자매로 출연한 한지민과 정은혜
정은혜가 그린 4000여점의 국민 캐리커처 중 일부

“사람들 얼굴과 생김새가 다 다르니까, 계속 그림을 그려요. 다 예뻐요. 못난 사람은 없어요./ 에이 뭐, 저는 경쟁 같은 거 없어요. 저는 저이니까요. 긴장이 없어요, 아예. 저는 잘 하니까./ 전 멋진 사람이에요. 우리 엄마가 멋진 사람이거든요. 저는 엄마처럼 나이 들어서 계속 오래오래 그릴거예요./ 은혜씨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원래부터 어디서든지 인기 많은 작가님입니다. 저를 한눈에 봐주세요. 첫 눈에 반해주세요.”

정은혜의 자신감은 훈데르트바서의 “나는 왕이다”라는 언급과 같은 맥락이다.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노예가 아닌 왕처럼 살면서 패기와 창조 능력을 되찾고, 자연과의 조화를 꿈꾸며 풍요로운 계곡에 머무르라고 당부한다. 정은혜는 이를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도에서 소처럼 느린 걸음으로 훈데르트바서,정은혜와 동행해보는 것은 시와 예술이 흐르는 100개의 바다를 건너는 것이고, 새해 새 영감을 얻는 쇄신여행에도 손색이 없다.

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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