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아름다운 문장을 취해야죠, 보석을 세공하듯”[박주연의 메타뷰]
연극계 ‘흥행 보증수표’ 극작가 배삼식 토카타>
[주간경향] 극작가 배삼식(53)은 ‘연극계의 김수현’ 또는 ‘연극계의 김은숙’으로 통한다. 흥행 보증수표다. 영역의 경계도 없다. 번역극과 번안극, 창작극을 넘나들고 정극과 마당놀이, 음악극(창극·오페라·뮤지컬)을 수시로 오간다. 게다가 그의 글은 깊은 철학적 사유를 담고 있다.
그는 보석을 세공하듯 단어 하나, 문장 한 줄에도 심혈을 기울인다. 침묵의 시간, 작은 몸짓 하나도 허투루 담지 않는다. 무언의 강력한 언어라고 믿기 때문이다.
1998년 번안극 <하얀 동그라미 이야기>를 시작으로 25년간 활동해온 배 작가를 지난 1월 10일 경향신문 인터뷰실에서 만났다. 그는 오는 3월 7일 서울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첫 공연하는 배우 손숙의 80세 기념공연 <토카타>(신시컴퍼니 제작·손진책 연출) 극본을 전날 막 탈고하고 나왔다고 했다. 한동안 그를 옥죄었을 창작의 고통을 덜어내서인지, 그는 자주 환하게 웃었다.
창작극 <토카타>는 촉각에 대한 이야기
접촉이 상실된 시대, 두 사람의 고독 그려
기념공연은 배우 본분 수행하게 해드려야
-마침내 탈고했으니, 후련하겠어요. 어떤 작품인가요.
“창작극이에요. 토카타(Toccata)가 ‘접촉하다. 만지다’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토카레(Toccare)’에서 유래한 말이잖아요. 건반 악기의 기교적인 곡을 의미하기도 하고요. 이번 작품은 그런 음악적 구조를 생각하면서 쓴 접촉, 촉각에 관한 이야기예요.”
-왜 그런 소재를 떠올렸나요.
“촉각이야말로 가장 오래된 감각이에요. 임신 7주차, 8주차밖에 안 돼 어머니 뱃속에서 분화도 덜 된 배아조차 건드리면 움찔하고 반응하잖아요. 태어나는 순간에도 낯선 공기 속에서 피부의 감촉으로 세상과 처음 만나고요. 그런데 코로나19를 거치면서 사람들이 대면접촉을 위험하게 느끼고 두려워하게 됐어요. 연극은 어느 누구도 다독이고 어루만져주지 않는 노년의 여성과 코마상태로 병원에 격리된 남성의 이야기를 통해 완벽히 고립된 인간의 고독을 그려요.”
-팔순 기념공연이지만 배우 손숙의 연기인생을 돌아보게 하는 내용은 아니군요.
“흔히 기념공연이라고 하면 배우의 살아온 이야기를 다루죠. 하지만 저는 마음에 들지 않아요. 평생 해오신 것처럼 무대 위에서 자신이 아닌 하나의 이야기 속에서 다른 인간의 삶을 사는 배우의 본분을 수행하게 해드리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3월의 눈> 때도 그랬어요. 2011년 3월 백성희장민호극장 개관을 앞두고 백성희·장민호 두 원로배우의 지난 인생을 회고하는 형식으로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어요. 그건 평생을 배우로 살아온 두 분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무대 위 두 원로배우가 연기의 미학을 펼치실 수 있는 극본을 썼어요.”
-평소 클래식 음악도 즐겨 듣습니까.
“BBC 라디오 3을 틀어놓고 지내요. 클래식과 재즈, 예술음악을 주로 들려주니까요. 이번 작업을 할 때는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Sviatoslav Richter·러시아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많이 들었어요.”
그는 “평소 한 갑 정도 피우는 담배도 글을 쓸 때는 두 갑씩 태운다”고 말했다. 집에 칩거한 채 밥 먹고 잠자는 시간 빼곤 쓰기만 한단다. 하루에 A4용지 다섯 장 쓰겠다고 마음먹으면 무조건 그 분량을 채운다. 그는 “그렇게 노동하듯 쓰지 않으면, 또 아무리 길어도 20일 안에 끝내지 않으면 내가 지루해서 못 견딘다”고 말했다. 물론 그것은 온전히 글 쓰는 기간만 그렇다는 것이다. 그는 “준비기간이 100시간이라고 하면 96~97시간을 자료조사에 쓰고, 나머지가 글 쓰는 시간”이라고 말했다.
시놉시스 없이 여러 생각 속에 글쓰기 시작
내가 이걸 썼나 싶을 정도로 받아 적는 느낌도
번역극·번안극은 원작의 무게가 주는 부담 커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내는 창작의 고통이 크지요.
“어떤 작가들은 시놉시스를 써놓고 시작하지만, 저는 그렇게 못해요. 이야기 속 인물들이 작가의 스피커가 되기를 원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여러 생각 속에서 글을 쓰기 시작해도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저도 알지 못해요. 머릿속에서 관념적으로 떠돌던 인물들이 몸을 가지게 되는 순간이 가장 어려운 것 같아요.”
-결말을 정하고 쓰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군요.
“그렇죠. 이야기는 인물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흘러가야 해요. 그래서 때로는 처음 출발할 때 막연히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작품이 되기도 해요. 언덕배기까지 다다르면 길이 뚜렷해지면서 내리막길을 막 내달리기도 하고요. 내가 이걸 썼나 싶을 정도로 이야기 자체가 흘러간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저는 열심히 받아 적는다는 느낌으로 써요. <3월의 눈>도 그런 작품 중 하나예요. 공연을 앞두고 촉박하게 극본을 부탁해 처음에는 말도 안 된다며 거절했어요. 하지만 백성희·장민호 두 원로배우를 만난 순간 제가 마음을 고쳐먹었죠. 그러고는 꼭 일주일 만에 대본을 완성했어요.”
-퇴고는 몇 번이나 합니까.
“탈고한 후부터 시작이죠. 연습장에 가서도 많이 수정해요. 제가 글로 쓴 것과 배우가 실제로 말할 때 느낌이 다른 경우도 있으니까요. 또 리듬과 템포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되면 대사를 덜어내기도, 추가하기도 해요.”
-말의 리듬과 템포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말하는 건가요.
“똑같은 말을 해도 호흡의 차이와 뉘앙스에 따라 완전히 다른 말이 되기도 하잖아요.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결정해가는 게 연습 과정이에요. 사람은 마음속에 어떤 욕구나 동기가 있을 때 그것을 말로 다 투명하게 드러내지 않고 굴절시키거나 왜곡시키기도 해요. 그래서 저는 말 자체가 가진 질감이나 색채, 의미와는 좀 관계없는 리듬, 템포 같은 특질을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더 주목하고 더 민감하게 다뤄야 한다고 생각해요.”
-중국의 <산해경>까지 읽는 등 독서량이 상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필요할 때 봐요. 희곡을 쓰게 되면서 공부했던 것 같아요. 모르고서는 쓸 수 없으니까요. 저는 그 과정이 되게 재미있어요. 내가 다루는 주제나 소재와 관련해 역사적 변천과정은 어떤지, 전혀 다른 의견들은 없는지, 혹시 내가 빠뜨린 것은 없는지 꼼꼼히 조사하죠. 그런 과정에서 제 생각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어지며 당초 아이디어보다 훨씬 더 재미있고 타이트한 이야기가 만들어지기도 해요. <열하일기 만보>도 박지원(1737∼1805)의 문집 <연암집>은 물론, 후대 사람들이 박지원에 대해 쓴 글들을 찾아 재미있게 읽다가 그것이 자연스럽게 작품으로 이어진 거예요.”
손진책 연출과 <주공행장> 올린 후 절필 고민
<열하일기 만보> 호평받고 극작가로 ‘우뚝’
동아연극상 희극상 등 각종 상 휩쓸어
2007년 초연한 <열하일기 만보>는 말(馬)의 말(言語)로 현대사회를 풍자하는 창작극이다. 자신을 ‘연암’이라고 주장하는 ‘말하는 당나귀’의 입을 빌려 인간의 본성을 들여다보고 오늘날 사회·정치를 풍자한다. 대산문학상과 동아연극상 희곡상을 수상했다. 직전, 절필을 고민하던 그는 이 작품의 성공을 계기로 극작가로 우뚝 섰다. 2008년 <거투르드>로 김상열연극상, 2009년 <하얀 앵두>로 동아연극상 희곡상과 대한민국 연극대상 작품상을 받았다. 2010년에는 문화체육관광부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2011년 <피맛골 연가>로 제5회 더 뮤지컬 어워즈 작사작곡상을 수상했다, 2015년에는 <먼 데서 오는 여자>로 제8회 차범석 희곡상을, 2017년에는 <1945>로 ‘공연과 이론을 위한 모임’ 올해의 작품상을 받았다.
-왜 절필을 고민했나요.
“극단 미추에서 6~7년간 주로 각색 등을 하다가 손진책 선생님(극단 미추 대표·연출)과 처음으로 <주공행장>이라는 창작 코미디극을 같이했어요. 당시 제가 막내에 가까운 시절이고 잘 못 써서이기도 하지만, 어르신 배우들과 연출가가 이렇게 저렇게 대사를 쳐내면서 제 입장에서는 대본이 너덜너덜해진 상태로 작품이 올라갔어요. 차라리 돈도 안 되는 이 짓을 그만두고 지금이라도 취직할까 생각했죠.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손 선생님께 <열하일기 만보>를 드리면서 못 박았어요. 공연 안 해도 좋으니 대본에 손대지 말아달라고요.”
-손진책 대표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한 달 동안 연락이 없으셨어요. 손 선생님도 그 작품에 대해 처음에 확신이 없으셨던 거죠. 그러다 결국 공연됐고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 제가 연극을 계속할 수 있는 동력이 됐어요.”
극단 미추는 1996년 서울대 인류학과 졸업 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극작과에 들어가 전문사 과정을 졸업한 그가 희곡 작가로서 첫 인연을 맺은 곳이다. 연극원 재학 시절인 1998년 브레히트의 <코카서스의 백묵원>을 그가 <하얀 동그라미 이야기>로 번안한 것을 가져다 무대화한 곳이 극단 미추였다. 2003년부터 그는 극단 미추의 전속 극작가인 양 <허삼관 매혈기>, <벽 속의 요정>, <철종 13년의 셰익스피어>, <마당놀이 삼국지> 등 수많은 작품을 같이했다. 손 대표가 국립극단 예술감독으로 일한 2011~2013년에는 배 작가도 <3월의 눈>을 비롯해 국공립 극장 제작 작품을 다수 했다. ‘좌김성녀, 우배삼식’이라고 할 만큼 손 대표의 연출인생에서 배 작가가 차지하는 비중은 묵직하다. 배 작가는 2008~2014년에는 고(故) 김동현 연출이 이끈 극단 코끼리만보에서 <그을린 사랑>, <먼 데서 오는 여자> 등 다수의 극본을 썼다.
-‘글을 쓴다는 것은 지우는 행위다’라는 말을 언젠가 했지요. 어떤 의미인가요.
“한 문장을 선택해서 쓰면 그 자리에 올 수 있었던 거의 무한대의 다른 말들이 그 문장 때문에 싹 사라지잖아요. 그 문장이 밑바닥에 거느린 많은 말들을 가장 적확하게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고르기 어려운 거예요. 그러니 선택받지 못한 다른 말들이 항의하지 않도록 가능한 한 더 아름다운 문장을 취해야 하죠. 마치 보석을 세공하듯이요.”
그래서 그의 문장은 아름답고 심오하다. 배우 김성녀가 1인32역을 한 <벽 속의 요정>(2005년 초연)을 예로 들면, 이런 식이다. “스테카치한테 무얼 제일 갖고 싶으냐고 물었습니다. 스테카치는 잠시 생각하더니 햇빛이라고 말했습니다. ‘햇빛? 하지만 햇빛은 가져다줄 수가 없잖아. 손에 잡을 수가 없으니까.’ ‘왜 잡을 수가 없어? 나뭇잎이나 꽃잎을 만지면 그 위에 고인 햇빛을 느낄 수가 있지.’ 그 뒤로 한동안, 나는 스테카치에게 줄 햇빛을 따러 다녔습니다. 하루 중 햇빛이 가장 좋은 시간에, 가장 햇빛이 잘 물든 나뭇잎과 꽃잎들을 따다가 스테카치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벽 속의 요정>은 번안극인데도 원작자인 후쿠다 요시유키가 ‘이건 내 작품 아니다’라고 극찬할 만큼 완전히 새로운 작품으로 탄생했어요.
“원작은 스페인 내전 당시 실화를 토대로 했어요. 손진책 선생님은 이를 한국 상황으로 번안해달라고 하셨죠. 대학 시절 6개월가량 월간잡지 ‘뿌리 깊은 나무’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어요. 당시 잡지 뒤편에 6·25전쟁을 겪은 할머니들을 기자들이 찾아가 구술을 받아 말투까지 그대로 살려 싣는 코너가 매달 있었음이 기억났어요. 300분가량의 구술이 실렸는데, 그걸 찾아 읽느라 여름 내내 국회도서관에서 살았어요. 그러면서 그 시대에 대한 감이 잡혔고 극본을 완성할 수 있었어요.”
-번역극과 번안극, 창작극의 영역을 수시로 오가고, 정극과 마당놀이, 음악극 등 다양한 무대예술 장르를 넘나들며 25년간 작업해왔어요. 극작가 입장에선 창작 작품보다 번역극이나 번안극 작업이 수월한가요.
“꼭 그렇지는 않아요. 예를 들면 <맨 프럼 어스>(Man from Earth)는 창작 이상으로 품이 들었어요. <햄릿> 같은 고전도 지금의 공연 환경에 맞게 압축하면서도 원래 작품이 가진 것을 놓치지 않도록 조정해 재구성하는 일이 만만치 않고요. 번안극도 원작이 지닌 무게에서 오는 부담감이 크죠.”
<1945> 등 근현대사 속 상처 입은 개인들
“사회가 가둔 틀 속에 갇힌 삶 말고
삶의 기쁨과 슬픔의 순간들 그리고파”
-2017년작 <1945>(국립극단 제작·류주연 연출)도 그렇고, 이른바 ‘국뽕’과는 거리가 먼 냉정한 시선을 작품에서 자주 보여주고 있어요.
“저는 민족주의나 국가주의 또는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는 서사를 좋아하지 않아요. 선과 악이 뚜렷한 구도도 꺼리고요. 그런 획일적 틀이 다른 이야기의 가능성을 차단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1945>도 연극인들 사이에서 꽤 논란이 됐다고 해요. 제가 친일파를 미화했다며 비난한 분도 계셨다고 하고요. 가장 민감했던 부분은 조선인 위안부에 대한 묘사였어요.”
-어째서요.
“욕망을 가지고 있고 흡연도 하고 때로는 살아남기 위해 악다구니도 쓰고 욕도 하는 게 인간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것을 일종의 신성모독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위안부는 할머니 아니면 오로지 고통만 당한 순진무구한 소녀여야만 하는 거죠. 대단히 모순적이고 온당치 않은 일이에요. 오히려 우리 사회는 위안부 문제가 불거지기 전까지 철저히 그분들을 외면하고 방치했어요. 일부는 양공주가 되기도 했고, 박정희 정권 때는 국가 차원에서 기생관광을 적극 장려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일종의 신성화 작업을 통해 우리가 그들에게 가한 폭력을 지우려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요.”
오페라로도 제작된 <1945>는 1945년 가을 무렵, 만주 신경 조선인전재민구제소(朝鮮人戰災民救濟所)에서 조선으로 귀환하기 위해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친일파, 독립운동가 할 것 없이 여러 군상을 보여주지만, 중심은 일본군 위안소에 있던 조선인 여자와 일본인 여자에 관한 이야기다.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채 일본으로 가고 싶어하는 일본인 여자를 조선인 여자는 말 못 하는 자기 동생으로 속이고 도와주려 한다.
-<1945>뿐 아니라 6·25전쟁이 배경인 <화전가>와 <벽 속의 요정>, 대구지하철 참사 유가족의 아픔을 어루만지면서도 부조리한 사회를 지적한 <먼 데서 오는 여자> 등은 공통적으로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사건 속에서 피해를 입은 개인들의 상처를 다루고 있어요. 그런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가요.
“거대한 담론으로 다루지 않는 사람들, 큰 목소리에 가려져 들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들, 저는 그것에 관심이 있어요. 사회가 당연시하는 어떤 틀 안에 갇힌 삶의 모습이 저는 너무 단순하고 허술하고 때로는 폭력적으로 느껴지거든요. 나머지 삶은 의미 없고, 옳지 않다는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 의문이 있죠. 그들도 삶의 기쁨과 슬픔의 순간들을 살았어요. 함부로 지워져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2014년 초연된 2인극 <먼 데서 오는 여자>는 그가 아내이자 배우였던 고(故) 이연규의 마지막 무대이기도 하다. 극작가 남편은 아픈 배우 아내를 생각하며 글을 썼다. 연극원 시절 만나 2002년부터 함께 산 아내는 2010년 유방암 말기 판정을 받고 7년간 투병생활을 하다 2017년 세상을 떠났다. 배 작가는 “아내가 너무 하고 싶어했지만, 지방공연까지 소화하느라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며 말리지 못한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연규는 이 작품으로 동아연극상 연기상을 수상했다.
-배 작가의 작품은 슬픈 정서의 작품일수록 무대 위 배우의 대사는 담담하다 못해 건조한데 객석에선 눈물을 흘린다더군요.
“정말 슬픈 사람은 슬프다는 말도 못 해요. 슬픔을 드러내는 순간 자기 존재가 무너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온힘을 다해 버티려 하죠. 그러다 어느 순간 어쩔 수 없이 비어져 나오기도 하지만요. 물론 제 취향일 수도 있어요. 그러나 눈물을 억지로 쥐어짜내고 감정과잉 상태에서 관객에게 슬픔을 강요하는 방식을 저는 좋아하지 않아요.”
그는 1970년 전라북도 전주에서 태어났다. 3녀2남 중 셋째다. 어머니가 시장에서 행상하며 자식들을 키웠다. 중학생 무렵 그의 부모는 아버지 고향인 충남 논산으로 돌아가고 그는 누나 셋과 전주에서 자취생활을 했다. 1989년 대학에 진학하면서 서울로 올라왔다.
-이름은 누가 지었나요.
“동사무소 직원이 지었어요(웃음). 아버지는 으뜸 원(元)을 써서 원식으로 지으셨는데, 나중에 취학통지서를 받고 보니 삼식으로 돼 있더래요. 동사무소 직원이 원 자를 흘려 쓰는 과정에서 석 삼(三)이 된 거예요. 집에서는 아명인 신규로 불렸고요. 당시엔 개명이 어려웠는데, 언젠가 아버지가 ‘재판을 해서라도 바꿔줄까’ 하고 물었지만, 괜찮다고 했어요.”
-이름 때문에 친구들의 놀림감이 되지는 않았나요.
“당시 유명 코미디언이었던 배삼룡이라고 놀리긴 했죠(웃음). 어느 분이 잘못 썼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은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으뜸 원 자는 너무 욕심스러운 글자이니 석 삼 자 정도가 적당하고, 또 필명 같잖아요.”
-어떤 아이였습니까.
“나를 둘러싼 이 삶으로부터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만 했어요. 아버지처럼 살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어려서부터 글짓기에 재능을 보였나요.
“전혀. 초등학생일 때 어느 해 방학을 맞아 아버지가 매일 동시 한 편씩을 짓게 했어요. 강제로 시키니 글 쓰는 게 지긋지긋했어요. 그래서 연극원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글 써서 살겠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왜 연극원 극작과에 들어갔나요.
“친구를 돕다가 같이 시험까지 치렀어요. 아무 생각 없이 한 일이었어요. 대학에서 인류학을 전공한 것도 별 뜻 없이 선택한 일이고요.”
그는 수줍은 표정이지만,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나 자신의 20대까지 삶에 대해선 시니컬하게 말했다. 기저에 많은 사연과 이야기들이 꿈틀대지만 생략하고 마는 것 같았다. 그는 동덕여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10년간 근무하다가 2020년 한예종 뮤지컬과 교수로 이직했다. 조만간 그의 첫 그림동화 <훨훨 올라간다>(비룡소)도 출간된다.
박주연 선임기자 j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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