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대지로 옮겨온 옛 벨기에영사관… 새로운 관계 맺다 [스페이스도슨트 방승환의 건축진담]
1905년 회현동에 지어진 벨기에영사관
한국의 부침 속에 건물 주인 계속 바뀌어
1968년 소유권 가진 상업은행 철거 추진
정부 ‘사적’ 지정에 남현동으로 건물 이전
대한제국 시절 외교관들 정세 살피던 곳
낯선 곳에서 복원은 ‘고립’이자 ‘탈맥락’
새 땅에서 어느덧 40년… 이제 미술관으로
원래 있었던 자리 풍경도 상상할 기회 줘
덤불로 둘러싸여 있는 그 집을 처음 봤을 때 쇠락한 가문의 마지막 저택 같았다. 2004년 그 집이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분관으로 바뀌면서 존재감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몇몇은 지은 지 오래돼 보이는 집이 사당역 인근에 있는 이유를 궁금해했다.
건물이 준공되던 해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이기고 대한제국과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해 갔다. 당연히 고종이 꿈꾸었던 대한제국의 중립국화는 물거품이 됐고 그 모델인 벨기에의 역할도 크게 줄었다. 1919년 벨기에는 영사관 건물을 요코하마 생명보험회사에 매각했다. 1930년대 중반에는 서울 5대 기생조합 중 하나였던 본권번이 이 건물을 차지했다. 광복 직전에는 일본 해군성 무관 부관저로 쓰였고 광복 후에는 국유재산으로 귀속되어 해군군악대가 사용했다. 한국전쟁 전후에는 공군본부 청사, 해군 제1분청으로 쓰였다.
우리은행의 전신 중 하나인 한국상업은행이 건물의 소유권을 취득한 시점은 1968년이다. 이후 도심재개발구역에 편입되면서 한국상업은행은 건물을 철거하고 고층 건물을 짓고자 했다. 하지만 문화재관리국은 사적으로 지정했다. 결국 1977년 4월 문화재관리국은 한국상업은행 소유의 남현동 부지로 이전하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전공사는 4개월 정도(1980년 3월21일∼7월31일) 진행됐는데, 이전을 위한 설계는 ㈜삼성건축사사무소가, 시공은 ㈜신성공업(현 SG신성건설)이 맡았다.
몇 년 전 미술관의 배려로 발코니에 나가볼 수 있었는데, 그곳에 서서 지금 보이는 남현동의 풍경이 아닌 건물이 원래 있었던 회현동2가의 풍경을 상상해 봤다. 뱅카르는 새로운 영사관 건물이 준공되자마자 이 나라를 덮친 을사늑약과 외교권 박탈을 어떻게 판단했을까? 그리고 본국에 어떤 내용을 보고했을까? 아마도 뱅카르는 위태로운 이 나라의 운명과 그 운명을 뒤흔드는 일본인들이 형성한 명동을 발코니에 서서 번갈아 바라봤을 것이다.
건물과 땅은 불가분의 관계다. 하지만 옛 벨기에영사관은 처음 자리를 떠나 새로운 자리로 이전해 40년이 넘는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마치 옮겨 심은 나무가 새로운 땅에서 자라듯이 40년 동안 새로운 대지에 적응하며 주변과 관계를 맺었다. 동시에 옮겨 오기 전 원래 자리에서 맺었던 관계를 상상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한다. 처음의 자리를 떠나온 이 집만이 주는 매력이다.
도시건축작가 방승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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