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대지로 옮겨온 옛 벨기에영사관… 새로운 관계 맺다 [스페이스도슨트 방승환의 건축진담]

2023. 1. 17.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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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처음 자리 떠나온 집의 매력’ 서울시립남서울미술관
1905년 회현동에 지어진 벨기에영사관
한국의 부침 속에 건물 주인 계속 바뀌어
1968년 소유권 가진 상업은행 철거 추진
정부 ‘사적’ 지정에 남현동으로 건물 이전
대한제국 시절 외교관들 정세 살피던 곳
낯선 곳에서 복원은 ‘고립’이자 ‘탈맥락’
새 땅에서 어느덧 40년… 이제 미술관으로
원래 있었던 자리 풍경도 상상할 기회 줘

덤불로 둘러싸여 있는 그 집을 처음 봤을 때 쇠락한 가문의 마지막 저택 같았다. 2004년 그 집이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분관으로 바뀌면서 존재감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몇몇은 지은 지 오래돼 보이는 집이 사당역 인근에 있는 이유를 궁금해했다.

그 집은 1903년 벨기에영사관으로 착공돼 2년 뒤 준공됐다. 대한제국은 1901년 3월에 벨기에와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는데, 다른 국가와의 통상조약이 대부분 1880년대 체결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다소 늦은 감이 있었다. 더군다나 당시 벨기에는 식민지를 소유한 제국이 아닌 중립국이었다. 그럼 고종은 왜 그 시점에 벨기에와 통상조약을 체결한 걸까? 1897년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그는 혼탁한 국제 정세 속에서 대한제국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중립국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벨기에를 롤모델로 삼았다.
처음 자리에 있었을 때 옛 벨기에영사관(원 표시)과 그 주변. 서울역사아카이브
통상조약 체결 직후 벨기에영사관이 자리 잡은 곳은 당시 외교가였던 정동이었다. 그러다 이듬해 벨기에 총영사 레옹 뱅카르(Leon Vincart)는 영사관 건물을 짓기 위해 회현동2가 78번지 일대의 땅을 샀다. 현재 회현사거리에 있는 우리은행 본점 인근이다. 건물의 설계는 고다마(小玉), 시공은 호쿠리쿠(北陸) 토목회사 그리고 공사 감독관은 니시지마(西島)가 맡았다.

건물이 준공되던 해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이기고 대한제국과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해 갔다. 당연히 고종이 꿈꾸었던 대한제국의 중립국화는 물거품이 됐고 그 모델인 벨기에의 역할도 크게 줄었다. 1919년 벨기에는 영사관 건물을 요코하마 생명보험회사에 매각했다. 1930년대 중반에는 서울 5대 기생조합 중 하나였던 본권번이 이 건물을 차지했다. 광복 직전에는 일본 해군성 무관 부관저로 쓰였고 광복 후에는 국유재산으로 귀속되어 해군군악대가 사용했다. 한국전쟁 전후에는 공군본부 청사, 해군 제1분청으로 쓰였다.

우리은행의 전신 중 하나인 한국상업은행이 건물의 소유권을 취득한 시점은 1968년이다. 이후 도심재개발구역에 편입되면서 한국상업은행은 건물을 철거하고 고층 건물을 짓고자 했다. 하지만 문화재관리국은 사적으로 지정했다. 결국 1977년 4월 문화재관리국은 한국상업은행 소유의 남현동 부지로 이전하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전공사는 4개월 정도(1980년 3월21일∼7월31일) 진행됐는데, 이전을 위한 설계는 ㈜삼성건축사사무소가, 시공은 ㈜신성공업(현 SG신성건설)이 맡았다.

이전 복원 후 건물은 한국상업은행 사료관으로 쓰였지만 공공에 개방되지는 않았다. 시민들도 이런 사연이 있는 건물이 사당역 주변에 있는지조차 잊어버렸다. 그러나 옛 벨기에영사관은 사적이기 때문에 원래부터 있었던 땅이 아니었음에도 다른 문화재들처럼 주변 개발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옛 벨기에영사관 서쪽에 있는 롯데슈퍼 건물과 도원회관의 지붕 형태는 문화재 주변 건축물 높이를 결정하는 앙각 27도 선에 의해 결정돼 있다. 사당역 주변에 높은 건물이 많아지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상대적으로 낮은 옛 벨기에영사관의 존재감이 더 커졌다.
회현동2가에서 남현동으로 이전 복원되면서 옛 벨기에영사관은 원래 자리에서의 역사와 현재 자리에서의 관계를 모두 갖게 됐다. 그리스 기둥 양식 중 하나인 도리아식과 이오니아식이 쓰인 고전주의 양식이지만 내부 기능을 고려해 완전한 좌우 대칭은 아니다.
옛 벨기에영사관이 원래 자리에서 해체돼 현재 자리로 이전·복원됐다는 역사는 이 건물에 ‘탈-맥락(de-contextualization)’이라는 매력을 준다. 현대예술이 추구하는 기법 중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이나 관념을 새롭게 보는 ‘낯설게 하기’가 있는데, 그중 어떤 사물을 원래 있던 환경에서 떼어내 엉뚱한 곳에 갖다 놓는 ‘고립’의 방식이 있다. 고립의 방식은 기존 맥락에서 벗어나는 탈-맥락의 과정을 수반하는데, 옛 벨기에영사관도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이 과정을 겪었다. 그래서 건물 안에서 창을 통해 바깥 풍경을 바라보면 왠지 그 풍경이 영구적이지 않고 계속 바뀔 것 같다. 또는 건물이 처음 자리(회현동2가)에서 이곳(남현동)으로 왔듯이 다시 이곳을 떠나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할 것 같다.
옛 벨기에영사관을 포함해 조선이 문호를 개방한 시기에 지어진 외교관 건물들은 안정적인 분위기를 형성하고 상대국에게 정치적 신뢰감을 주기 위해 대부분 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졌다. 고전주의 건물의 특징은 엄정한 좌우 대칭으로 그리스·로마 시대 양식이 주로 쓰였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덕수궁의 석조전을 들 수 있다. 옛 벨기에영사관도 그리스 기둥 양식인 도리아식과 이오니아식이 쓰였고 현관 상부와 건물 좌우에 발코니가 대칭을 이룬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정확한 좌우 대칭은 아니다. 동쪽에 있는 발코니가 서쪽에 있는 발코니보다 뒤로 살짝 후퇴되어 있고 측면과 연결되어 ‘ㄱ’자 평면이다. 이유를 추측해 보면 건물 가운데를 관통하는 복도를 중심으로 좌우의 기능이 다르기 때문이다. ㄱ자 평면의 발코니가 있는 동쪽에는 사교용의 커다란 응접실(1층)과 거실(2층)이 있었지만 작은 발코니가 있는 서쪽은 방으로 잘게 나누어 사적 용도로 쓰였다.
건물 안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
외교 건물에서 발코니는 외교관들이 정세를 판단하기 위해 바깥 동향을 살피며 정보를 모으는 자리였다. 그래서 당시 준공된 외교 건물의 전면 발코니는 정치 일번지이자 고종이 머물렀던 덕수궁을 향해 있었다. 옛 벨기에영사관이 원래 자리에 있었을 때 찍은 사진을 보면 건물의 좌향은 현재 우리은행 본점처럼 덕수궁을 향해 있었다.

몇 년 전 미술관의 배려로 발코니에 나가볼 수 있었는데, 그곳에 서서 지금 보이는 남현동의 풍경이 아닌 건물이 원래 있었던 회현동2가의 풍경을 상상해 봤다. 뱅카르는 새로운 영사관 건물이 준공되자마자 이 나라를 덮친 을사늑약과 외교권 박탈을 어떻게 판단했을까? 그리고 본국에 어떤 내용을 보고했을까? 아마도 뱅카르는 위태로운 이 나라의 운명과 그 운명을 뒤흔드는 일본인들이 형성한 명동을 발코니에 서서 번갈아 바라봤을 것이다.

건물과 땅은 불가분의 관계다. 하지만 옛 벨기에영사관은 처음 자리를 떠나 새로운 자리로 이전해 40년이 넘는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마치 옮겨 심은 나무가 새로운 땅에서 자라듯이 40년 동안 새로운 대지에 적응하며 주변과 관계를 맺었다. 동시에 옮겨 오기 전 원래 자리에서 맺었던 관계를 상상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한다. 처음의 자리를 떠나온 이 집만이 주는 매력이다.

도시건축작가 방승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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