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에서 이 그림 봤어?…조각 거장, 문신이 그린 ‘골방의 걸작’

노형석 2023. 1. 17.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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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운명][작품의 운명] 조각가 문신이 그린 ‘고기잡이’
문신의 1948년 작 <고기잡이>. 어부들의 절박하고 힘찬 작업 모습이 그려진 화판의 그림은 물론 액자까지 모두 작가가 일일이 만들었다.

“고기잡이? 문신 선생 그 작품은 저 안쪽 방에 걸려 있는데….”

“제가 들어가서 찾아볼게요.”

지난 2003년 초가을 9월께 서울 약수동에 있는 원로 화랑주 박영인씨의 아파트를 찾은 정준모 당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은 역사적인 명작을 다시 찾아내는 행운을 얻게 된다. 골방에 쌓인 그림 더미를 치우다 안쪽 벽에 걸려 있던 길쭉한 액자그림 한점을 떼어내 살펴보았다. 한국 근현대 회화사에서 이렇게 힘찬 인물 군상이 등장하는 작품을 본 적이 있었던가? 여명이 간신히 비치는 것 같은 어둡고 황막한 하늘을 배경으로 알몸에 반바지만 입은 근육질의 어부 8명이 그물줄을 끌어당기며 거친 물살과 사투하듯 작업하는 그림. 조각가 문신(1922~1995)이 화가로 활동하던 시절의 1948년 작 <고기잡이>였다.

프랑스에서 20년간 활동하며 좌우 대칭의 매끈한 유기적 덩어리상을 만든 조각가로 국제적 명성을 얻은 조각 거장에게 이런 걸출한 그림이 있을 줄이야. 풍문처럼 문신이 프랑스에 가기 전 어부를 소재로 대단한 그림을 남겨놓았다는 말들이 미술사학계에 돌기는 했지만, 실물을 본 것은 처음이었기에 적잖이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고기잡이>의 액자틀 세부. 바닷속을 힘차게 유영하며 해물을 잡는 해녀들의 역동적인 몸사위를 절묘하게 특징을 잡아 부조상으로 다듬어 표현했다.

“그동안 문신을 조각의 거장으로만 생각했고 60년 가까이 그의 그림은 누구도 조명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런데 막상 직접 보니까 근육질 남성들과 여성을 상징하는 바다, 그리고 해녀들의 액자틀이 절묘한 균형을 이루면서 힘찬 에너지를 발산하는 게 느껴져서 정신이 번쩍 났지요. 정말 대단한 작품이었어요. 그래서 수년이 지난 2008년 제가 기획해서 문신의 회화만을 조명하는 전시를 고양아람누리미술관에서 열었는데, 그때 대표작으로 도록의 표지사진에 넣었던 기억이 납니다. ”

지난해 9월부터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고 있는 문신 탄생 100주년 기념 기획전 ‘문신: 우주를 향하여’(1월29일까지)의 대표작으로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고기잡이>의 발견 내력이다.

<고기잡이>의 그림 세부. 풍랑이 몰아칠 듯한 날씨 속에서 거친 바다와 싸우며 그물의 줄을 끌어올리는 어부들의 절박한 움직임이 현장에 있는 것처럼 생생한 색감과 단순화된 윤곽선으로 표현되었다.

지금 덕수궁에서 많은 관객들, 특히 젊은 애호가의 환호와 함께 인스타그램 등 에스엔에스(SNS)에서 인기를 끄는 이미지 작품이 된 <고기잡이>는 해방 공간 시절 숱한 다작을 쏟아내며 불타올랐던 문신의 열정적 화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다. 크기는 세로 53㎝, 가로 131㎝에 불과하지만, 작품의 힘과 기백은 걸출하다. 이는 이쾌대의 ‘군상’ 대작 중 <해방고지>와 더불어 단연코 해방 공간에서 가장 빼어나게 당대 이 땅에서 움직이는 인간들의 현실을 그린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문신의 리얼리즘 회화는 특출했다. 대상과 사회적 현실을 의식하고 반영한 이쾌대의 비판적 리얼리즘과는 시선과 감도가 전혀 달랐다. 고향인 마산 추산동 언덕(현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 자리)에서 고향의 산과 바다, 어부들의 풍경을 줄곧 주시하며 붓질을 했던 작가는 현장의 생생한 느낌과 기운 그 자체를 충실하게 옮기려 했다. <고기잡이>는 이런 작가적 심상 아래 노동하는 바닷사람들의 동선과 근육의 움직임을 집요하게 파고들어가면서 절묘하게 동세를 응축시켜 이룩한 노작이란 점에서 가치가 더욱 빛난다.

해방 전까지 일본미술학교에서 유학하며 도쿄 이케부쿠로 작가촌에서 작품 내공을 다듬었다가 혜성처럼 나타난 마산 사나이 문신의 그림은 당시 화단을 반가움과 놀라움 속으로 몰아넣었다. 오늘날 좌우 대칭의 매끈한 토템상 모양의 조각으로 유명한 그가 사실은 해방 공간의 화단에서 이쾌대 못지 않은 리얼리즘 회화의 새로운 기수로 인정받았던 것이다. 실제로 당시 서울대 미술학부 교수였던 월북 화가 길진섭(1907~1975)은 1948년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본점) 화랑에서 열린 1회 문신 양화 개인전 서문을 통해 “솔직한 소박성”이 돋보이는 문신 회화는 “정취보다도 생활을 의도하는 생리”를 반영하고 “화면에 대한 아첨”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평했다. 당대 유명 작가이자 평론가였던 근원 김용준(1904~1967) 또한 1949년 2회 개인전을 보고 쓴 초고 글에서 “현 화단에 혜성같이 나타난 획기적인 존재”라며 “내 나라의 현실과 자연에서 보고 듣고 느끼게 되는 현상을 그의 예술적인 관조를 통해 구현”하고 있다고 짚었다.

<고기잡이>의 작품 모티브가 된 것으로 알려진 1946년작 나무 부조 <어부>. 덕수궁 전시에서 <고기잡이>와 더불어 관객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걸작이다. 조각가 문신의 천부적 재질이 그림에 집중하던 초창기 청년 작가 시절부터 빛을 발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고기잡이>에는 어부들의 절박하고 힘찬 작업 모습이 그려졌다. 화판의 그림은 물론 액자까지 모두 작가가 일일이 만들었다는 점이 이채롭다. 그림 세부엔 풍랑이 몰아칠 듯한 날씨 속에서 거친 바다와 싸우며 그물줄을 끌어올리는 어부들의 절박한 움직임이 생생한 색감과 단순화된 윤곽선으로 표현됐다. 액자틀 세부를 보면, 바닷속을 힘차게 유영하며 해물을 잡는 해녀들의 역동적인 몸사위를 절묘하게 특징을 잡아 부조상으로 다듬어 표현했다. 이와 관련해 주목되는 것은 <고기잡이>의 모티브가 된 것으로 알려진 1946년 작 나무 부조 <어부>다. 덕수궁 전시에서 <고기잡이>와 더불어 관객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걸작이다. 어릴 적부터 바닷가에서 그림을 그리고 어부를 따라다니며 소일했던 문신의 체험이 천부적 재질과 어우러져 초창기 청년 작가 시절부터 화폭에서 빛을 발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을 둘러싼 화단의 호평도 잠시. 그 뒤 한국전쟁 발발에 따른 종군화가단 활동, 한국 현대미술운동의 기점으로 평가되는 1957년 모던아트협회 활동 가담, 추상화와 조각 장르로의 경도, 1961년 도불과 조각가로의 정체성 전환 등 급격한 신상 변화를 작가가 겪으면서 <고기잡이>는 사실상 잊히고 사장되는 운명을 맞게 된다.

문신의 청년 작가 시절 자화상. 1943년 일본 도쿄 화실에서 공습을 겪으면서 그렸다고 전해진다. 덕수궁 전시의 들머리에서 처음 만나게 되는 작품이다.

잊혀진 명작의 가치를 알아본 이는 회사원 출신의 화상인 박영인 전 대아갤러리 사장이었다. 원래 진해 비료공장 사원으로 일하면서 박봉을 털어 평소 흠모했던 문신의 작품을 즐겨 사들였던 그는 작가의 과거 이력을 살펴보다가 <고기잡이>의 존재를 알고 쾌재를 불렀고, 1970년대 초반 절친했던 작가한테서 직접 작품을 사들여 손에 넣었다고 전해진다. 그 뒤 30여년간 아끼는 애장품으로 집에 소장해오다 작품을 눈여겨 본 정준모 기획자의 주선으로 2007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한국미술 100년’전에 처음 출품했고, 전시 도록에도 도판이 실리면서 비로소 실체가 후대 미술판에 알려지게 된다. 뒤이어 이듬해 3월에는 정 기획자와 작가의 부인 최성숙씨가 고양문화재단과 손잡고 작가의 회화 작품들을 집중적으로 선보인 전시회를 경기도 고양아람누리미술관에서 열었다. 개인 소장가들한테서 대여한 초창기 작품들이 주로 나왔던 그 전시에서 <고기잡이>는 도록 표지를 장식한 대표작으로 나왔다. 그려진 지 딱 60년 만이고 작가가 숨진 지 13년 만에야 관객과 만나게 된 것이다.

고양 전시회를 계기로 문신의 숨은 명작이 주목을 받게 되자 작품의 중요성을 실감한 국립현대미술관 쪽은 매입 협상에 나서게 된다. 미술관 관계자들은 박씨를 찾아가 국가기관에 매각해달라고 간곡하게 호소한 것으로 전해진다. 고령이 된 박씨는 취지에 전적으로 동감을 표시했지만, 오랜 애장품이어서 고심을 거듭했다고 한다. 그러다 실물이 고양에서 전시된 지 11년이 지난 2019년 결국 나라에 매각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마침내 <고기잡이>는 국립미술관 품으로 들어오게 됐다.

최근 미술사가들은 이 작품을 해방 공간에서 야수주의와 표현주의 등 서구발 모더니즘의 사조들을 탐색하던 국내 화단의 진취적 시도를 표상하는 작품이자 유년 시절부터 영화 간판과 광고 도안을 제작할 만큼 뛰어난 화가였던 문신의 비범한 필력을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던 해 그려진 뒤 반세기 이상 작가의 작업실과 수집가의 골방에 묻혀 있던 비운의 그림은 이제 문신이 작가 초창기 화단에 남긴 발자취를 증언하는 소중한 미술사 유산으로 떠올랐다. 거장 이쾌대의 군상 대작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해방 공간의 미술사를 대표하는 리얼리즘 명작으로 굳건히 자리 잡게 됐으니 운명의 역전이 아닐 수 없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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