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사기 당해도 ‘집주인 체납 세금’이 우선?…세입자는 또 웁니다

박종오 2023. 1. 17.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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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사기]정부 세금징수 권리, 보증금 등 민간채권보다 우선
4월부터 일부 제도 개선에도 사각지대 여전
지난달 27일 전세 사기 피해 임차인들이 세종시 국토교통부 앞에서 집회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업에 실패한 ㄱ씨는 지인 ㄴ씨에게 빌린 돈 1천만원을 갚지 못했고, 정부에 내야 할 세금 1천만원도 밀렸다. ㄱ씨가 담보로 잡힌 집을 경매에 부친다면 그 매각 대금으로 ㄴ씨와 정부 중 누구의 돈을 먼저 상환해야 할까?

체납 세금을 우선해서 변제해야 한다. 현행 국세기본법과 지방세기본법에 ‘세금 우선 징수’의 원칙이 명시돼 있기 때문이다.

최근 전세 사기 등으로 임차보증금 회수에 애를 먹는 세입자들이 집주인 체납 세금 문제로도 골머리를 썩이고 있다. 보증금을 보전 받기 위해 거주 중인 빌라를 강제 경매에 부쳤다가 자칫 집주인 세금을 먼저 갚아주게 생겨서다.

경매 매각 대금은 배당 순위가 법으로 정해져 있다. 1순위는 인지대·송달료·감정 평가 비용 등 경매 집행 비용이다. 2순위는 소액 임차인의 보증금 회수를 정부가 지원하는 최우선 변제금(서울시 기준 보증금 1억6500만원 이하일 경우 최우선 변제금 5500만원)과 근로기준법상 우선 변제권을 갖는 산업재해보상보험 적용 대상 사업장(법인·개인 사업자 포함)의 체불 임금(최근 3개월치 임금 및 3년치 퇴직금)이다. 서민을 보호하기 위한 정책적 배려다.

그다음의 3순위가 임차보증금 등 민간 채권보다 무조건 배당 우선권을 갖는 이른바 ‘당해세’(해당 주택에 부여한 세금)다. 여기엔 상속세·증여세·종합부동산세 등 국세와 재산세·자동차세(차량 경·공매 때 부과)·지역자원시설세(재산세 및 자동차세에 부과되는 지방교육세 포함) 등 지방세가 포함된다. ‘빌라왕’ 사례처럼 집주인이 종부세 수십억원을 체납한 경우 세입자가 살고 있는 집을 ‘셀프 낙찰’ 받으면서 당해세인 집주인 종부세 일부를 떠안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4순위는 집주인에게 보증금을 맡긴 세입자의 확정일자, 당해세를 제외한 각종 세금의 발생일(법정기일), 근저당권 등 민간 담보 채권자의 등기 접수일, 건강보험료 등의 납부 기한 등을 따져 날짜가 빠른 채권이 배당 우선권을 갖는다.

다만 올해 4월1일 이후 경매와 공매에서 매각이 결정되는 주택부터는 이 순위가 일부 바뀐다. 지난해 말 국회에서 법이 개정돼 오는 4월부터 세입자가 주민센터에서 받은 확정일자가 당해세 발생일보다 앞서면, 당해세보다 세입자 보증금을 먼저 갚도록 제도가 변경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집주인의 체납 세금이 없는걸 확인하고 전셋집을 계약했다가 입주 뒤에 발생한 세금을 세입자가 대신 변제하는 일을 막겠다는 취지다.

그렇지만 여전히 한계가 있다. 첫째, 4월부터 바뀌는 제도는 당해세 중에서도 국세에만 적용된다. 재산세 등 지방세는 예외다. 행정안전부 관계자는 “재산세는 기초자치단체의 주요 재원인 만큼 오는 3∼4월 중 지자체와 제도 개선 여부를 논의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둘째, 세입자의 확정일자가 당해세인 국세의 ‘발생일’보다 늦으면 보증금을 우선 배당받을 수 없다. 국세 발생일은 소득세·법인세·부가가치세 등의 ‘신고일’, 상속세·증여세·종부세 등의 ‘납세 고지서 발송일’이 기준이다. 만약 세입자가 임대차 계약을 맺기 전에 집주인의 국세 완납 증명서를 확인한다 해도, 계약 당시 납세 증명세엔 기재되지 않은 보증금보다 선순위의 체납 세금이 발생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국토교통부는 임대차 계약 체결 전 집주인에게 납세 증명서를 요구할 수 있게 보장하는 주택임대차보호법 개정을 추진 중이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국토부 법 개정과 별개로, 지난해 말 국세징수법 개정에 따라 올해 4월부터 임대차 계약 체결 뒤 집주인 동의 없이도 체납 세금을 포함해 이미 발생했으나 내지 않은 세금 모두를 세입자가 확인할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다만 이 제도는 임대차 계약을 이미 맺은 세입자만 이용할 수 있다는 한계가 있다.

서울의 한 빌라촌.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본질적으로 조세 채권을 임차보증금 등 민간 채권보다 우선하는 제도를 손봐야 한다는 주장도 끊이질 않는다. ‘채권 평등의 원칙’에 따라 세금과 개인·금융기관 보유 채권 등의 배당 순위를 차별하지 말자는 얘기다.

예컨대 대륙법 체계의 뼈대가 되는 독일은 조세 채권의 우선 징수권을 아예 인정하지 않는다. 이동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한국은 다른 나라들과 비교하면 조세 채권에 대해 상당히 파격적일 정도로 강한 공공성(징수 우선권)을 인정하고 있다”며 “과거에는 민간의 가짜 채권이 횡행해 정부가 세금 회수의 우선권을 가질 필요가 있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고 지적했다.

정부의 세금 회수를 최우선으로 하는 제도는 과거에도 뜨거운 감자였다. 다만 헌법재판소가 연이은 헌법 소원 심판에서 “조세 채권의 우선권이 개인의 재산권 침해 등 헌법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선고하며 논란이 수그러든 상태다.

지난 1999년 헌재의 결정문을 보면 당시 헌재는 “당해세는 (민간) 담보권자의 예측 가능성을 해치지 않으므로 과세 요건 명확주의(세금 요건과 징수 절차 등을 법에 명확하게 정해야 한다는 원칙)에 위반되지 않고 재산권을 침해하거나 과도하게 제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고 결정했다. 세입자 등 민간 채권자가 집주인의 세금 과세액을 미리 예상할 수 있는 만큼 재산권 침해라고 보기 어렵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는 전세 사기 사태 등을 계기로 집주인의 체납 세금이 사회적 논란으로 떠오른 사례에서 보듯, 민간의 체감과는 거리가 크다. 눈여겨볼 만한 것은 헌재의 2001년 결정문이다. 당시 재판부는 ‘국세 신고일 또는 고지서 발송일을 기준으로 징수 우선권을 부여하는 법이 재산권 침해인지’를 따지는 위헌 소원에서 정부 손을 들어주면서도 “다만 담보권자가 담보권 설정자의 국세 체납 여부에 관해 충분히 파악할 수 있도록 그 예측 가능성을 제고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권고했다.

기재부 관계자는 “애초 당해세를 없애는 방안까지 검토했으나 헌재가 이를 위헌이 아니라고 한 데다 법 개정으로 민간 금융기관 채권자 등이 함께 지원받는 문제 등이 생겨 추진하지 않기로 결론 내렸다”면서 “임차인 보호 차원에서 일단 임차보증금에 한정해 예외적으로 세금보다 먼저 돈을 돌려받게 해준 것”이라고 했다.

박종오 기자 pjo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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