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은 권고사직 당한 삶을 말없이 품었다
2015년 크리스마스는 을씨년스러웠다. 왠지 모르게 분위기가 싸했다. 그때 장터목대피소의 전화벨이 울렸다. 기분 탓인지 평소와 똑같은 벨소리가 더 긴박하게 들렸다. 그래서인지 반사적으로 몸이 튀어나가 전화를 받았다.
전화한 이는 백무동으로 하산 중이던 탐방객이다. 다급한 목소리로 "나는 함양군 마천면 소재 마을 보건진료소장"이라 하면서 현재 자신의 위치가 백무동 방향 장터목대피소 140m 아래쯤에 있는데 탐방로 아래 큰 바위가 있고 눈으로 뒤덮인 바위 뒤쪽에 작은 동물이 움직이기에 무의식적으로 그쪽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려보니 사람으로 보이는 형체의 옷가지 물체가 보인다고 속사포처럼 털어놨다.
장터목대피소는 노고단-삼도봉-연하천-벽소령-세석 주능선은 물론 중산리-천왕봉-장터목, 치밭목-천왕봉-장터목, 백무동-소지봉-장터목 등 동서남북으로 사람들이 많이 오르내리는 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
이처럼 유동인구가 많기 때문에 탐방객에게 인사도 나눌 겸, 탐방 현황도 파악할 겸 말을 걸면 감사하게도 마주친 다른 탐방객들의 상황을 성의껏 대답해 준다. 그러나 그날은 탐방객들이 전혀 다른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었다.
을씨년스럽던 그날 저녁
119에 긴급 출동과 헬기 요청을 해놓고 당일 근무 직원 2명과 같이 구조용 들것, 담요, 물, 구급의약품, 패딩점퍼 등을 챙겨 신속하게 사고지점으로 내려갔다. 휴무라 함양 마천 집에서 쉬고 교대 근무하러 올라오는 직원 1명에게 연락했더니 소지봉(1,312m)을 막 지났다고 해 큰 바위가 있는 탐방로에서 구조대기를 지시했다.
일행 3명은 큰 바위 위 탐방로에 먼저 도착했다. 기다리는데 눈보라가 쳐서 날씨가 매섭고 추웠다. 빠른 걸음으로 올라왔는지 잠시 후 사고 지점인 큰 바위 위 탐방로에 직원 1명이 합류해 같이 내려갔다. 탐방로 아래 경사진 곳과 바위 주변의 눈은 가슴까지 쌓여 있다. 우리는 가까이 가서 몸은 만지지 않고 말로만 "선생님"을 외치고 생사여부를 확인했다.
나는 함양군 소재 119에 다시 전화를 걸어 언제쯤 도착할 수 있는지 물었다. 119에서는 민간산악구조대와 같이 20여 명이 출발했다고 한다. 그런데 자꾸 "살았는지 죽었는지"를 고집스럽게 묻는다. "우리 공원 직원은 의사가 아니기에 생사여부를 판단하지 않는다"고 에둘러 말했지만 재차 묻기에 내가 "사람이 눈 속에 거꾸로 기역자(ㄱ)로 박혀 있는데 숨을 쉬겠습니까?"고 말했더니 자기들은 철수할 테니 경찰에 연락하라고 하면서 전화를 끊는다.
잠시 후 경찰헬기 측에서 내 핸드폰으로 연락이 왔다. 자초지종을 묻기에 그간 사정을 얘기했더니, 지금 김해서 경찰특공대 헬기를 띄워 경남경찰청에서 파견된 진주경찰서 감식반(과학수사반) 반원과 관할 함양경찰서 경찰관을 함양군부대에서 합류해 태우고 장터목대피소까지 가는 데 1시간가량 걸리니 기다려 달라고 한다. 감식반원이 유체를 확인해야 헬기장으로 이송할 수 있다기에 눈이 많이 쌓였고 골바람이 불어 추웠지만 추위를 견디며 경찰관이 빨리 오기만을 기다렸다.
최초 통화 후 딱 1시간이 지날 즈음에 경찰헬기가 대피소 헬기장에 착륙했다. 헬기는 계속 대기한 상태로 감식반원과 경찰관이 우리 일행이 있는 곳으로 내려왔다. 탐방로에서 큰 바위 사고 지점까지 들어가는 눈밭에는 고인의 발자국 하나뿐이었다. 경찰관은 먼저 사고 주변을 조사하고 훼손한 흔적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고 별다른 점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이송하기로 했다.
허름한 옷 입고 올라 저체온증 온 듯
우리 일행은 준비해 간 구조용 담요를 고인의 얼굴과 몸 전체를 감싸고, 특히 몸을 만지거나 훼손하지 않으면서 구조용 들것으로 옮겨 모셨다. 길도 없고 눈밭이고 경사진 곳이라 성인 8명이 달라붙어 들었는데도 앞으로 진행이 잘 안 될 정도였다. 큰 바위에서 탐방로까지는 10m 안팎이지만 얼음보다 더 무거웠다. 들것에 고인을 모시고 힘겹게 탐방로까지 올라오는데 거의 20분은 더 걸렸던 것 같다. 탐방로에 고인을 잠시 내려놓고 소주 한 잔을 올리고 명태를 얹고 큰절을 올렸다. 그렇게 간단한 노제를 지낸 후 대피소 헬기장으로 이송했다.
저녁이 가까워지니까 눈보라가 다시 치기 시작했다. 대피소 실내로 경찰관이 들어왔다. 추운 겨울 밖에서 고생한 경찰관에게 따뜻한 차 한 잔을 주었다. 보일러를 틀어놓은 실내라 잠시 얼었던 몸이 녹고 체온이 올라가 따뜻한 온기를 느껴서 그런지 이제는 정말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눈밭에 떨어져 있던 고인의 약봉지 등 소지품을 경찰관에게 인도했고, 경찰관은 고인의 소지품과 신분증을 파악한 후 다 챙겨서 대피소에서 나갔다. 고생한 우리 직원과는 서로 수고했다는 인사를 나눴다.
직원 한 명이 헬기장으로 따라 나가서 경찰헬기에 고인을 모신 들것을 호이스트로 연결해 주었다. 헬기는 그대로 이륙해 진주 경상국립대병원(장례식장)으로 날아갔다. 고인의 가족과 경찰이 연락을 주고받고 장례를 무사히 마친 것으로 나중에 전해 들었다.
당시 고인의 점퍼 호주머니에는 약봉지가 들어 있었고, 옷차림은 산행을 할 수 있는 등산화나 등산복이 아니었다. 겨울산행을 위한 기능성 등산복이 아닌 시장에 파는 허름한 천 종류의 옷들이었다. 등산을 하면서 땀에 의해 또 눈을 맞아 물기에 얼어 저체온증이 급격하게 왔던 것 같다. 사전에 철저한 겨울 산행 준비나 지식 없이 무작정 올라 온 것 같다.
산행 전날 고인의 친누나는 "산에 한 번 안 가본 사람이 뭐 하러 가냐? 가지 마라"라고 신신당부 했다고 한다. 고인은 서울서 직장을 다니다 최근 권고사직으로 고향집으로 내려왔고, 스트레스와 건강이 안 좋아져 약을 복용하고 있었다고 들었다.
꿈에 고인이 나타나 "고맙다"
고생한 직원들과 같이 저녁식사를 하고 사무실로 들어와서 보일러실, 취사장, 화장실, 헬기장을 한 번 둘러 본 뒤 상황을 정리하고 각종 일지를 작성해 일과를 마무리했다.
직원들은 각자의 휴식 공간으로 가서 대기하거나 다음날 일과를 위해 잠을 자러 간다. 나 역시 지친 하루를 달래기 위해 잠을 자러 방에 혼자 누웠는데 순간 창가에 바람소리가 나서 오늘밤 귀신이 나타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훅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꿈속에서 내 방 출입문을 누군가가 똑똑똑 하면서 두드린다. 문을 열었더니 고인이 얼굴 없이 몸만 나타나서 나에게 '오늘 정말 고맙다'고 인사를 한다.
몹시 놀랍고 무서웠지만 "늦게 구해서 정말 죄송하다. 다음 생에서는 건강하게 아프지 말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이젠 좋은 곳으로 잘 가시기 바란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고인은 다시 한 번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떠났다.
그대로 꿈에서 깨고 나니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밤새 잠을 제대로 못 잤다. 선잠이라 정말 생생한 기억이었다. 꿈 외에도 잠결에 바람소리, 화장실로 가는 사람 소리가 다 들렸으니까 말이다. 다시 한 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연재를 마치며2020년과 2021년은 전 세계가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큰 타격을 받았다. 이로 인해 모든 국민들이 해외여행뿐만 아니라 국내 여행도 힘든 시기였다. 국립공원의 대피소, 야영장 시설 또한 정부방침에 따라 일부개방과 폐쇄 등의 정책으로 운영하였다.
대한민국 국민의 휴식처이자 힐링 1번지인 국립공원에는 코로나의 여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탐방객이 산과 바다를 찾아와서 즐기고 갔다.
지리산에서 태어나 자란 시골 촌놈이 지리산을 사랑하고 보전하는 지킴이가 되고자 국립공원공단에 입사하여 레인저로 반평생을 지내온 것에 대해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감회가 새롭다.
공단에서의 다양한 경험과 에피소드 중 특히 지리산에 근무하면서 있었던 많은 사연들 중에 위험하고 아찔했던 순간, 행복하고 기뻤던 순간, 너무나도 가슴 아프고 슬펐던 순간 등 많은 기억들이 스쳐지나간다. 그간 나와 동료들이 함께 생사고락을 하였고 이 또한 나에게는 좋은 추억이자 아픈 기억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국민들이 희망을 꿈꾸거나, 힘들고 어려울 때 또 새로운 도전의 용기가 필요할 때 특히, 지리산을 많이 찾아온다. 그런 탐방객들을 위해 안전 산행 가이드, 탐방해설프로그램, 생태체험 및 환경교육, 대피소 및 야영장 그리고 화장실 등 시설물 친환경 도입, 탐방로 안전, 구조, 야생생물 보호, 국립공원의 자연자원을 보전하기 위해 나와 우리 동료들은 항상 노력하고 지리산과 함께하고 있으니 많은 사랑과 관심, 국립공원 발전에 적극지원을 부탁드린다.
2022년은 개인적인 역량과 문장력이 많이 부족한데도 53년 전통을 자랑하는 '월간산'이라는 대한민국 최고의 등산 전문지에 지리산국립공원에 근무하는 동안 직접 경험했던 몇 가지의 사례를 공유하는 수기를 집필하게 되어 개인적으로 대단히 쑥스럽고 영광스러웠다.
처음 집필한 수기라 매번 걱정과 두근거림으로 보내게 되었는데 다행히 '월간산' 구독자 및 네티즌 여러분께서 넓은 아량으로 봐주셔서 올 한해를 무사히 잘 보냈지 않았나 싶다. 이 자리를 빌려 '월간산' 가족 그리고 독자여러분, 네티즌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국립공원 1호 지리산을 사랑해 주시고 찾아 주신 모든 국민여러분께 국립공원공단 가족을 대표해서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언제나 국민의 안전 산행과 지역사회, 지역주민을 위한 정책 그리고 국민과 상생하는 국립공원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다사다난했던 2022년 임인년壬寅年 검은 호랑이의 해가 저물고, 2023년 계묘년癸卯年 검은 토끼의 해가 밝았습니다. 올 한해는 대한민국의 모든 일들이 토끼처럼 지혜와 총명함 그리고 풍요와 따뜻함을 가지면서 깡충깡충 뛰어 한 단계 더 발전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국민여러분 2023년 올 한해는 계획하시는 모든 일 다 성취하시고, 가정의 건강과 행복, 배려하는 마음으로 넉넉한 한 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앞으로 더 좋은 인연이 되어 다시 뵙기를 바라면서 이만 감사의 인사를 마치고자 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월간산 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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