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막해서 산책] 켜켜이 쌓인 책같은 한양도성을 읽다
산에 질리기도 한다. 자연의 지나친 솔직함 때문이랄까. 흙, 바위, 나무, 하늘, 숲, 새, 계곡, 물, 구름을 주인공으로 영구적 회귀를 거듭하는 산의 풍경에 가끔은 지친다. 누구도 아랑곳하지 않고 독존하는 절대 순수의 풍경을, 내가 뭐라고 탓하겠나. 지치고 질리는 건 혼자서 번잡한 내 마음이지만, 때때로의 권태는 엄연하다. 그래서 산행을 잊고 도심 산책으로 선회하기도 한다. 시큰거리는 발목과 오랫동안 경직된 근육도 한 이유다.
그렇게 설렁설렁 걷기 시작한 서울의 강북은 참 즐거운 공간이다. 여러 해째 출퇴근 중인 광화문만 해도 그렇다. 어느 비오는 날 대낮, 이른 점심을 마치고 새로 단장한 광화문 광장으로 진입했다. 16세기 말의 영웅 충무공의 발밑을 지나 15세기의 현군 세종의 옥좌로 150년을 역행하는 동안, 정면으로는 광화문의 현판과 그 너머 경복궁이, 좌우론 근현대의 건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세월의 중첩이야말로 도심 산책의 묘미다. 서울 강북의 중심부는 특히 그런 것 같다. 광화문 사거리 횡단보도에서 두둥실 하늘로 떠올라 반경 몇 킬로미터의 거리를 조감한다 치자. 동서남북의 사대문 안으로 최소 600년의 세월이 건축으로, 유적으로, 시간으로 겹치고 포개진다. 어디 600년으로 끝이겠는가. 이성계와 정도전과 무학의 심사와 숙고 이전에도 서울은 한반도 남쪽의 주요 거점이었다는 사실을 사료들이 다각도로 증명한다. 서울이란 공간을 채운, 얼추 1,000년의 문명을 생각할 때 한낮 도심의 산책은 역사를 넘어 신화와 전설을 거니는 느낌마저 준다.
양피지에 담긴 비밀
문헌학 정도로 기원을 소급하면 적당할까. 서양엔 '팰림프세스트palimpsest'란 말이 있다. 가필, 중첩, 소실, 재활용 등등 복합적인 뉘앙스를 함축한 단어다. 파자破字를 위해선 고대 그리스로 거슬러 가야 하는데, 대강 '다시+문지르다'는 의미의 복합이다. 그러나 이렇게 글자를 쪼개고 합쳐도 명쾌하게 떠오르지 않는 단어의 뜻이 양피지 한 자락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된다.
종이가 없던 시절에 유럽 사람들은 양의 가죽을 얇게 펴고 약품 처리를 한 뒤에 표백해 말렸다. 그 위에 새기듯 글씨를 썼다. 그게 바로 양피지다. 그런데 양을 잡아야 나오는 양피지가 흔할 리 없다. 양피지 위의 텍스트를 보존할 필요가 없어지면, 그걸 무언가로 문질러 지우고 그 위에 또 다른 사연을 다시 썼다. 그렇게 문지르는 행위, 덧쓴 텍스트, 희미한 흔적, 소멸과 기억 모두를 사람들은 팰림프세스트란 단어에 녹여 냈다.
그런데 지금 남아 있는 이 세상 것들 중에 중첩 아닌 것들이 있을까. 팰림프세스트란 단어는 나중에 지질학에서도 각광을 받는다.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의 화석이 오롯한 단층들의 퇴적을 생각하면 왜 양피지 위의 중첩이 지질학까지 확장됐는지 알 수 있다. 인문학의 다양한 분과에서도, 민감한 몇몇 저자들은 시간의 퇴적과 중첩의 신비를 함축한 매력적 단어를 끌어다가 과거와 현재의 내밀한 결합을 표현했다.
그리고 지질학과 인문학을 넘어, 1,000년 전 유럽의 양피지와 그로부터 파생된 팰림프세스트의 내러티브는 한 중년의 광화문 우중산책까지 연결된다. 세월과 역사와 문명의 중첩을 얘기하면서 서울의 광화문 거리를 빼놓을 수 있겠는가. 600년 전의 도시 계획 이후로 동서양의 각종 건축 양식이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손에 잡히고 눈에 밟히는 건축이 아니어도, 온갖 정치와 전쟁과 시위와 함성과 희망과 좌절이 쉴 새 없이 점멸했다. 이 세상 어떤 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흔적으로, 추억으로 남아 서로를 보듬는다.
세월의 중첩, 도심의 깊이
서울의 오랜 중심이 광화문이라면, 서울의 원형적 경계는 한양도성이다. 일그러진 타원으로 서울을 두른 한양도성의 길이가 궁금해 서울시 자료를 찾아봤더니 18.6km라 한다. 하프 마라톤 정도의 거리다. 북한산성을 종주하듯, 날 잡아 한양도성을 순례하는 사람들도 있던데 얼마나 걸릴까. 한나절은 잡아먹을까. 종주는 볕 좋은 계절로 미뤄도 좋으리라.
대신, 진입하기도 수월하고 풍광도 멋져 가끔 오르는 낙산 쪽 구간을 다시 찾는다. 서울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3번 출구로 나와 '369 성곽마을'의 조붓한 계단들을 걸어 올라가면 성곽이다. 아, '369'란 이름을 만들어낸 발상이 즐겁다. 성곽 아래쪽 야트막한 산동네를 재개발하면서 행정 편의상 붙여 놓은 이름이 '삼선 6구역'이었다고 한다. 그중에 '삼'과 '6'과 '구'를 끄집어내 '369'로 정리했단다. 재개발의 지난한 추억을 동화 같은 숫자로 품어낸 지역민들의 발상이 따뜻하다.
369마을을 왼쪽 발밑에 두고 한양도성의 성곽을 따라 올라가며 나는 다시 서울이란 도시의 내밀한 중첩에 잠시 숭고해진다. 유려한 곡선으로 정상을 향해 가는 성채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니, 성곽을 구성한 돌들이 밑단에서 위로 향할수록 밝아지고, 커지고, 반듯해지는 중이다. 푯말에 새겨진 설명을 보니, 한양 성곽은 처음 조선의 태조가 쌓기 시작했고(14세기 말), 세종이 이어 받았고(15세기 초), 숙종이 마무리했다(18세기 초). 그때그때 돌의 모양이 달랐다. 식민의 세월과 전쟁의 난리를 겪으면서 그중 상당 부분이 허물어졌고 그걸 다시 현대의 건축이 메웠다.
그렇게 말없이 세월의 깊이를 느끼며 야트막한 낙산의 정상에 올랐을 때 멀리로 북한산의 세 봉우리가 무슨 젊은 날의 꿈처럼 흐릿하게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서울이란 곳은 자연과 문명마저 거리를 두지 않고 밀착한 또 다른 중첩의 공간이다. 거기에 한양도성-탕춘대성-북한산성으로 이어지는 돌들의 행렬이 꾸물꾸물 장사진長蛇陣으로, 수백 년 역사의 애환까지 하나로 잇는, 고금에 유례가 없을 팰림프세스트의 공간이다.
월간산 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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