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세 퍼부어 쌀값 안정시킨다지만…수급 불균형 해소없인 역부족
돈 쓰고 쌀 소비 더 빨리 줄어드는 양곡관리법 개정
쌀 재배면적 감축하고 쌀 가공산업 집중 육성 필요
쌀 해외소비 증대 ‘모색’…ODA 사업에 쌀 활용 가능
[김성훈 충남대 농업경제학과 교수, 정리=조용석·김은비 기자] 쌀 시장격리(정부 매입) 의무화를 골자로 하는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둘러싼 논란이 거세지고 있다.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수확기 초과생산량이 예상생산량의 3% 이상 또는 쌀값이 평년 대비 5% 이상 떨어지면 초과 생산량을 정부가 의무적으로 매입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한 마디로 정부가 초과 생산된 쌀을 다 사들이라는 것이다.
쌀값 안정을 통해 벼 재배농가의 쌀값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하고 쌀 산업의 안정적 기반을 확보한다는 목적으로 야당이 강하게 밀어붙이는 법안이다. 하지만 매년 1조원 이상의 혈세를 투입해 쌀 재고를 떠안아야 하는 정부 입장에선 재정 부담이 너무 큰 데다, 공급과잉을 부추길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부작용이 우려된다.
돈 쓰는데 쌀 소비량 더 줄이는 양곡관리법 개정
한국농촌경제연구원(KREI)이 최근 발간한 ‘쌀 시장격리 의무화의 영향 분석’ 보고서를 보면 양곡관리법 개정안 통과시 정부가 넘쳐나는 쌀을 매입하는데 드는 비용은 2022~2030년 연평균 1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됐다. 매년 조(兆) 단위 혈세를 투입에도 1인당 쌀 소비량은 격리 조치가 없을 때보다 더 빠르게 줄어들 전망이다.
쌀 소비가 계속해서 줄어드는데, 가격이 하락하지 않으니 소비자들로부터 더 외면받게 되기 때문이다. 시장격리 의무화 시 2030년 1인당 쌀 소비량은 45.5㎏(2022년 54.4㎏)으로, 정부 개입이 없을 때 전망치(47.1㎏)보다 1.6㎏ 더 줄어들 것으로 추산됐다.
쌀을 제외한 다른 작물의 낮은 자급률이 더 악화할 수 있어 식량안보 측면에서도 부정적 영향이 불가피하다. 주요 곡물들의 자급률을 살펴보면 △밀 0.8% △콩 30.4% △보리 38.2% 등으로 매우 저조한 실정이다.상황이 이런데도 자급률 100% 내외인 쌀의 시장격리를 의무화할 경우 농민들이 벼농사를 더 지으라는 신호로 받아들여 밀·콩 등의 곡물 재배를 벼농사로 전환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식량안보에 상당한 위협이 될 수 있다.
늘어난 정부의 재정 부담으로 미래농업에 투자할 예산이 쌀값 안정에 집중돼 다른 농업 경쟁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점도 문제다. 쌀 시장격리에 투입될 약 1조원의 예산은 농식품부의 2022년 농업생산부문 투입 예산(성과관리 사업 기준, 12조원)의 8.3% 수준이다. 한국후계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한농연)을 비롯한 농민단체들조차 “쌀 농가만을 위해 매년 1조원을 투입해선 안 된다”며 반대 목소리를 내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국민들도 쌀 시장격리 예산 지출 확대로 인한 피해에 직면할 수 있다. 농림축산식품부가 국민을 대상으로 시행하는 △농식품바우처사업(89억원) △임산부 친환경 농산물지원사업(158억원) △초등돌봄교실 과일간식지원사업(72억원) △학교 우유급식사업(470억원) △장부양곡 할인지원사업(508억원) 등의 예산 일부가 쌀 시장격리 예산으로 전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쌀 재배면적 줄이고, 가공산업 육성도 필요”
쌀값 하락의 근본 원인인 수급 불균형부터 해결해야 한다. 무엇보다 쌀 소비량이 감소하는 상황에 맞춰 재배면적 감축 등을 통해 공급량을 지속적으로 줄이는 것이 급선무다. 벼 대신 다른 작물의 생산을 유도하도록 직불제 관련 정책을 강화하고, 밥상용 쌀 생산량을 줄이는 대신 가공용 쌀의 재배 비중을 늘려가야 한다.
농림축산식품부는 가루쌀(분절미) 재배면적을 늘리기 위한 정책 외에 양조용 쌀 품종 개발을 강화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관행재배(일반적 재배방법) 쌀과 비교해 단위 면적당 수확량이 떨어지긴 하지만, 식품 안전성 및 환경 보존성이 큰 친환경 쌀 재배 촉진도 대안이 될 수 있다.
국내 시장에 공급되는 쌀 소비확대를 위해서는 가공산업 육성을 위한 노력도 필요하다. 그간 쌀 가공산업 발전을 위한 여러 정책이 시행됐지만, 떡·쌀과자 등 일부 전통식품 지원에만 초점이 맞춰져 한계가 뚜렷했다. 아울러 최근 전 세계적 관심을 받는 푸드테크(food-tech)를 쌀에 접목하기 위한 연구개발(R&D)도 강화할 필요가 있다. 특히 기능성 쌀, 가공 적성에 맞는 쌀 육종사업과 연계할 것을 제안한다. 민간 벤처기업 등을 대상으로 하는 공모사업도 추진해 볼 필요가 있다.
해외소비 확대 방안도 ‘모색’…ODA에 쌀 활용해야
아쉽지만 국내 쌀 소비 확대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하다. 쌀의 해외 소비를 더 늘려야 한다. 쌀 수출 전략상품을 개발해 해외시장을 개척해나가야 한다. 공적개발원조(ODA)에 쌀을 활용하는 방법도 있다. 미국의 경우 PL 480(농업수출진흥 및 원조법)을 통해 밀 등의 잉여농산물을 대량으로 국제 원조에 사용했는데, 한국도 상당 기간 수혜를 입었다.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국제 원조 수혜국에서 수여국으로 성장한 우리나라는 향후 해외 원조 사업규모가 계속 늘어나야 하기에 잉여 쌀을 원조 품목으로 활용해야 한다.
특히 아프리카, 동남아 등 저개발 국가의 주식(主食)이 쌀인 경우가 많아 대상국 쌀 품종이 한국과 달라도 국제 원조 활용 가능성이 크다. 올해 우리나라 ODA 사업 예산은 4조 5000억원 수준으로 세계 10위권 진입이 목표다.
쌀 시장격리 의무화는 정부의 과도한 시장개입으로 벼 생산의 경쟁력이 저하될 뿐만 아니라, 다른 곡물 생산 및 채소·과일 생산의 경쟁력 제고를 위한 예산 투입을 제한하게 된다. 이미 유럽, 태국 등에선 양곡관리법 개정안과 흡사한 쌀 가격 지지 정책을 시행했다가 실패한 전력이 있다. 벼 재배 농민의 소득 지지를 위해선 쌀 시장에 정부가 직접 개입하는 방식보다는, 직불제를 등의 정책 수단이 훨씬 더 유용하다.
흔히 농업경제학에서는 ‘3농’이라고 해서 농업, 농촌, 농민에 대한 연구·정책을 분명하게 나눈다. 농업 경쟁력을 높이는 정책과 농민 복지·소득을 늘리는 정책이 섞이면 효과가 떨어져 실패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3농이 뒤엉킨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득보다 실이 많은 정책으로 남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시 한번 진중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조용석 (chojuri@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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