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머물다 사라져서 아름답다… 작은 것들을 위한 송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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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망대에 뿌리 내린 강아지풀은 거대하다.
강릉 초당일대를 가득 덮은 민들레는 어쩐지 말라있다.
강원도 구석구석 풀벌레 소리가 나는 곳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는 2010년부터 10년간 춘천과 강릉, 동해, 삼척 등의 풍경을 담았다.
엔딩 크레딧에는 동해 바람의 언덕과 춘천 망대·공지천·교동초, 강릉 남대천·초당·안목 등 촬영 장소 이름이 고요히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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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출신 홍나겸 등 7명 기획전
춘천·강릉·동해 풍경 교차 편집
자연 시선에서 들풀·자연 조명
붉은 필터로 인류 향한 경고도
춘천 망대에 뿌리 내린 강아지풀은 거대하다. 강릉 초당일대를 가득 덮은 민들레는 어쩐지 말라있다. 며느리발톱, 개망초… 멋대로 안착한 곳에서 삐죽빼죽 난 들풀은 멋스럽다. 홍나겸 작가가 카메라를 드는 이유다. 수려한 꽃 대신 들풀을 찍는다. 작고 모난 것, 잘 드러나지 않는 것들을 조명한 강원도 작가의 따듯한 시선이 서울 금호미술관에 걸렸다. 기획전 ‘어떤 삶, 어떤 순간(Our Lives, Our Moment)에 참여한 강릉 출신 홍나겸 작가의 미디어 아트 ‘솔라스텔지아-그리고 우리는 살아지고 우리는 사라지고’의 장면들이다.
#챕터 1. 똑, 똑.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배경으로 붉은색이 압도하는 화면으로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걷는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모두 뒤로 간다. 홍나겸 작가는 “코로나19 이후 강릉 바닷가는 놀랄 정도로 텅 비어있었어요. 이후 바닷가에 오는 사람들을 관찰했는데 단 한 명도 빼놓지 않고 마스크를 쓰고 있어 소름 끼쳤죠. 어쩌면 우리는 기후위기를 자초하면서 계속 거꾸로 가고 있는 것 아닐까요. 자연과 정반대로요”라고 했다. 인류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듯 주기적으로 울리는 물소리는 동해 천곡황금박쥐동굴에서 채집했다. 자연이 우리에게 울리는 경종이기도 하다.
#챕터 2. 풀벌레 소리가 나는 곳에서 홍 작가는 최대한 몸을 낮춘다. 작은 것들을 담기 위해서다. 인간이 자연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인간을 보는 방식에 눈높이를 맞췄다. 한때 강릉 초당에는 우연히 앉은 홀씨가 번성해 이뤄진 민들레 밭이 있었다. 불로장생을 꿈꾸는 인류와 달리 잠시 머물다 가는 것이 당연한 것들이다. 그는 “건물이 올라가기 전 공터나 사람들이 잘 오가지 않는 곳에 피어난 들풀을 찾아다녔어요. 민들레 밭을 찍을 땐 땅을 파고 누워서 포복 자세로 찍었죠. 그래야 카메라에 담을 수 있거든요”라며 “지금 그곳에 가면 다시 볼 수 없는 것들이에요”라고 설명했다.
강원도 구석구석 풀벌레 소리가 나는 곳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는 2010년부터 10년간 춘천과 강릉, 동해, 삼척 등의 풍경을 담았다. 강원의 빛과 소리를 교차편집한 이번 작품은 2021년 강원국제트리엔날레 출품작이기도 하다. 10개의 챕터의 러닝타임만 33분 14초. 2채널 비디오와 스테레오 사운드가 1405㎝에 달하는 벽면을 가득 채웠다. ‘솔라스텔지아’는 호주의 환경철학자 글렌 알브레히트가 만든 용어로 환경 변화에 따른 정서적·실존적 고통을 뜻한다.
작은 생명들을 조명하는 가운데 대형 산불과 코로나19 등의 재난으로 변한 일상도 주목했다. ‘우리는 불어오고’로 시작하는 챕터들의 소주제는 △살아지고 △마르고 △불어오고 △흐르고 △함께 빛나고 △피고 지고 △날아오르고 △춤을 추고 △눈부시고 △돌고 돌고, 하나되어 다시 만나고 등으로 시작되지만 한결같이 ‘우리는 사라지고’로 마무리된다. 작가가 전하는 자연의 순환, 삶의 이치가 녹아있다.
엔딩 크레딧에는 동해 바람의 언덕과 천곡황금박쥐동굴, 춘천 망대·공지천·교동초, 강릉 남대천·초당·안목 등 촬영 장소들의 이름이 고요히 올라간다. 강원지역 관객이거나 고향이 이곳이라면 남다른 감상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자연은 과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벌레가 머물렀던 나뭇잎은 홍 작가가 말하는 ‘진짜 자연’이다. 인공적 도움 없이 바람 따라 생명을 이어가는 풍매화를 주로 찍는 이유다. “예쁜 자연을 안 찍었네요”라고 말한 한 어린이 관객도 있었다. 홍 작가는 답했다. “실제 자연은 광고에 나오는 것처럼 쨍하지 않죠. 벌레 갉아먹은 자국도 있고 이리저리 갈라지거나 못생긴 경우가 대부분이에요”라고.
‘어떤 삶, 어떤 순간’이라는 기획전 주제도 깃들어있다. 작가는 최근 이태원 참사 등을 보며 일상의 소중함을 더욱 절실히 느꼈다. 무심코 지나치는 것들의 소중함, 일상을 잃은 상실감을 위로하는 의미도 담았다. 홍 작가는 “영상을 보고 울고 간 관객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흔하고 보잘 것 없는 것들을 찍으며 작은 것도 소중히 여기는 이들의 아픔도 보듬고 싶다”고 말했다.
홍나겸 작가는 강원대 공예학과와 동대학원 영상문화학과를 졸업했다. 2015 동강국제사진전 강원도사진가전, 서울문화재단 2020 미디어아트 공모, 강원국제트리엔날레 2021 등의 선정작가로 활동했다. 강릉과 동해, 춘천에 작업실을 두고 영동과 영서를 오가며 동시대 작가들과 교류하며 활동중이다.
이번 기획전에는 강운·박주애·엄유정·이성웅·차현욱·홍지윤 작가까지 서울·강릉·광주·제주 등 전국에서 활동하며 최근 주목받는 다양한 세대의 작가 7명이 함께 했다. 일상과 자연, 인간의 관계를 깊이 있게 사유한 평면회화부터 설치작품 등을 지하 1층부터 3층까지 볼 수 있다. 방탄소년단 RM도 다녀간 것으로 알려져 더욱 많은 관객들이 찾고 있다.
박주애 작가의 설치작품 ‘밤의 새를 삼켰다’는 색색으로 얽힌 덤불과 둥지 형태가 아늑함과 즐거움을 동시에 준다. 작가가 활동하는 제주의 자연과 함께 각자 살 곳을 꾸려가는 삶의 과정을 떠올리게 한다.
강운 작가의 연작 ‘마음 산책’은 푸른 빛을 지나 보랏빛으로 짙어지는 11점의 추상회화다. 아픔을 겪은 후 딸과 나눈 대화를 새긴 후 색을 덧대며 새로운 질감과 색채를 만들어냈다. 아문 상처 위에 새살이 돋는 과정이다.
엄유정 작가는 사소한 인물의 표정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익숙한 식물의 아름다움을 회화와 드로잉으로 잡아냈고, 차현욱 작가는 거대한 자연 속 작은 인간의 모습에서 우리가 남겨둬야할 여백과 이상의 가치를 말한다.
홍지윤 작가는 5m 높이의 대형 현수막 위 수묵화 작품 ‘꽃춤’에 다양한 감정을 펼쳤고, 이성웅 작가의 설치 작품은 수백 개의 빛줄기 속에 작은 쉼터를 마련해 주고 있다.
부산스럽고 소란스러운 새해, 사람과 자연, 일상과 재난, 기억과 이상의 관계를 가만히 새겨보기에 꼭 맞다. 김여진·강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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