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만 남은 대학, 혁신이 필요하다 [인문학 속 경제]
중세시대 수도원에서 시작된 교육 제도
배우고, 가르치려는 젊은이들의 '조합’
800년 번성했지만, 동시에 최고의 위기
편집자주
주로 수치로 묘사되는 경제학은 추상적인 사회과학의 영역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삶으로 결국 구현되는 것은 경제 현상이라고 다르지 않겠죠. 경제 분야 대표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연구원들이 문학과 역사학, 철학에 등장하는 경제 이야기를 소개하는 ‘인문학 속 경제’를 3주에 한 번씩 화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의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가 쓴 세계적 베스트셀러 ‘장미의 이름’은 중세 수도원을 배경으로 한 미스터리한 사건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다. 14세기 베네딕트회 수도사 아드소의 관점에서 기록된 수기에는 중세의 여러 상황과 논쟁들이 눈앞에서 보듯이 펼쳐진다. 스승인 윌리엄 수도사와 함께 방문한 북부 이탈리아의 어느 베네딕트회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 사건, 추리에 의한 전개도 흥미진진하지만, 당시 정치적·사회적 시대상, 수도원의 일과, 도서관, 서적 등의 묘사도 흥미롭다.
하버드 대학의 중세사학자 C. H. 해스킨스에 따르면, 중세의 수도원은 당대 문화의 중심지로서 사라져 가는 지식을 보존하는 역할을 했다. 예컨대, 소설 속 베네딕트 수도회의 경우 성 베네딕트(480~543)의 규칙에 따라 예배, 노동 외에도 독서에 일정한 시간을 부여했고, 근대식 학교 형태의 교육도 이루어졌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도서관이 있었고, 토지 소유 기록이나 사망자 명부 등을 보관하는 문서고도 있었다. 수도원의 도서관에는 성서를 비롯하여 교회 교부들의 저서, 신학과 철학, 교회법을 비롯한 법률 서적 등이 공통적으로 존재하고 있었으며, 그 외에 수학, 과학, 의학 등 희귀한 필사본 서적들도 소장돼 있었다.
보통 중세는 르네상스 이전의 암흑기로 알려져 있지만, 중세사 연구에서는 위대한 제도와 발명들이 산출된 창조적인 시기였다는 점을 강조한다. 특히 ‘대학’이 탄생한 것도 이 시기였다. C. H. 해스킨스는 '대학의 탄생(The Rise of Universities)'이라는 강연집에서 대학의 기원은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이전인 ‘12세기 르네상스’에서 찾을 수 있음을 강조한다. 중세 수도원의 지식 보존과 함께 이슬람 세계로부터 스페인을 거쳐 아리스토텔레스 저술 등이 새롭게 번역되어 전파되면서 학문에 대한 새로운 수요가 나타났다. ‘기꺼이 배우고 기꺼이 가르치려는 열의에 찬 젊은이들(해스킨스, 2021)'은 도시 내에서 ‘조합 혹은 길드(university)'를 형성하였고 이것이 오늘날 대학이라는 이름의 기원이다.
대략 12세기 정도에 설립된 것으로 알려진 볼로냐 대학과 파리 대학이 최초의 대학으로 추정되는데, 이들 대학들은 건물이나 자산이 따로 없었고 학문공동체 자체로 구성됐다. 초기 대학의 입지는 지리적 이점과 밀접하게 연관되었는데, 볼로냐는 북부 이탈리아 교통의 요지였으며, 파리는 프랑스 왕국의 새로운 수도라는 지리적 이점을 누렸다. 볼로냐 대학은 ‘학생 조합’, 파리 대학은 ‘교수 조합’ 중심으로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차이는 있지만, 체계적인 가르침과 최소한의 학습기간을 전제로 시험 통과자에 한해서 교수 자격, 즉 초기 형태의 석·박사 학위를 부여했다. 다시 말해 교과과정, 시험, 졸업, 학위라는 대학의 핵심 요소들이 초기부터 확립된 것이다. 또한 외국인 비중이 높은 ‘조합원’을 기존 거주민과의 충돌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면책특권과 자치권, 이에 따르는 일정한 규제들도 공식화됐다. 뿐만 아니라, 4개의 학부(자유학예, 법학, 신학, 의학)와 학부장 및 단과대학(college) 개념도 이때 나타났다. 이러한 대학의 모형은 이후 옥스퍼드, 케임브리지를 비롯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됐고, 훗날 미국으로도 전파된다.
초기 대학의 일상적 모습은 오늘날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예컨대, 초기 대학에서도 전공 간 알력은 존재했는데, 1250년경 한 프랑스 시인은 “논리학에는 학생들이 몰리지만, 문법을 배우려는 자는 줄어만 가네… 시민법은 화사한 옷차림으로 교회법은 거만한 풍채로 다른 모든 학예 앞을 활보한다네”라고 풍자했다. 수업 형태는 교수의 특성에 따라 다양했는데, 당대 스타 강사였던 파리 대학의 아벨라르는 논쟁적 현안에 관한 ‘찬반식(Sic et non)’ 토론수업으로 명성을 날렸다. 학생들은 대체로 부모에게 수업료와 생활비를 의존하였으며, 부모의 기대와 달리 아무것도 배우지 않고 대학 인근에 발달한 유흥과 향락을 즐기면서 그럴듯한 외양만 갖추어 졸업하는 사례도 많았다.
약 800년의 세월 동안 대학은 여러 차례 부침을 거듭하면서도 새로운 지식의 생성과 전파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이어왔다. 전쟁과 전염병, 인쇄술의 발전, 대안적 교육체제의 등장과 전문 연구기관의 설립 등에도 불구하고 유구한 전통을 지닌 학자들의 조합으로서 대학의 제도와 정신은 학문 후속세대의 양성과 함께 영광스럽게 이어져 오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해방 이후 비교적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고등교육이 빠르게 확대되어 4년제 대학은 200여 개교, 전문대학을 포함하면 330여 개교에 달한다.
오늘날 대학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번성하고 있지만, 동시에 대학의 위기도 심각하게 논의되고 있다. 대학의 위기는 전 세계적 현상인데, 우리나라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이는 학생, 교수, 교육방법, 연구의 네 측면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째, 대학 진학이 보편화되었다. 오늘날에는 초중등교육을 마친 대부분의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하며, 대학 진학은 학문 추구를 위한 선택이라기보다는 일반적인 사회진출의 경로로 받아들여진다. 오히려 대학 졸업장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부당한 차별이 우려되기도 하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학 학부교육을 과거처럼 순수한 지식 추구 성격으로 바라본다면 이는 현실과 상당한 괴리가 있다. 특히 비싼 등록금을 대출이나 부모의 지원으로 납부하고 졸업한 이후 2~3년 내에 쉽게 갚아나갈 만큼 충분한 소득을 올리지 못하는 졸업생들이 많아졌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둘째, 교원으로서의 교수는 관료화되었다. 고등교육에 따른 높은 수요와 정부의 지원, 종신보장제도 등에 힘입어 교수의 지위와 급여는 안정적으로 보장되고 있다. 이는 우수인력을 교원으로 유도하는 측면이 있지만, 채용 이후로 양질의 교육 제공을 위한 경제적 유인은 사실상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재정상황이 학생 수에 민감한 사립대학의 경우 상대적으로 학생 교육을 잘해보겠다는 대학 본부 측 의지가 작동하기도 한다.
셋째, 대학 교육을 대체하는 기술들이 발달하고 있다. 대규모 온라인 개방강의(MOOC)를 통해 전 세계적 석학의 강의를 쉽게 들을 수 있고, 온라인 화상회의 기술이 정교하게 발달하면서 굳이 물리적으로 한 장소에 모여 수업을 진행할 필요는 없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면대면의 만남과 교류는 필요하지만, 전통적 강의나 정보전달 모임의 필요성은 하락하고 있다.
넷째, 대학의 실용연구 기능이 갈수록 강조되고 있다. 오늘날 지식경제화 흐름 가운데, 대학은 국가와 지역의 경쟁력 확보를 위한 첨병 역할까지 수행하고 있으며, 중앙과 지방정부의 신산업 분야 연구지원 정책은 과잉·중복이 우려될 정도로 넘쳐나고 있다. 다만 실제 의도한 결과로 이어지고 있는지는 의문이며, 특히 장기적인 관점에서 유용할 수 있는 기초과학이나 인문 분야 연구는 소홀하게 되는 측면도 존재한다.
대학 혁신은 초중등교육 전반은 물론 국가경제 차원에서도 큰 영향이 있는 중요한 주제이다. 많은 논의가 있지만, 여기에서는 미네르바 대학의 교육혁신 사례를 간단히 소개하고 갈음하려 한다. 미네르바 대학 설립자인 스티븐 코슬린(Stephen M. Kosslyn)과 벤 넬슨(Ben Nelson)은 대학 혁신을 위한 새로운 모형 제시 차원에서 ①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할 수 있는 실천적 지식의 교육, ② 20명 내외의 소규모 학급으로 구성하지만 기존의 1/3 수준의 등록금, ③ 학생 간 및 학생-교수 간의 깊은 유대감 형성과 적극적 교육경험을 통한 학생참여 제고, ④ 다양성 있는 학생 구성의 목표를 중심으로 새로운 형태의 대학을 운영하고 있다. 미네르바 대학은 건물이 전혀 없고 학생들은 서울을 포함한 전 세계 7개의 도시를 순회하면서 현지생활을 경험한다. 온라인 학생주도형 학습(flipped learning)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하면서 4대 핵심역량(4C: 비판적 사고, 창조적 사고, 효과적 의사소통, 효과적 협업) 배양과 지식의 활용 측면에 초점을 맞춘다. 교수들은 높은 연봉으로 3년 단위로 계약하며, 종신 보장은 없는 대신 ‘학문의 자유 보장’에 관한 공식적 계약을 체결한다. 학생들은 국적, 인종, 경제적 배경에 대한 아무런 고려 없이 잠재력만으로 선발하며, 입학 후 학생이 필요하다고 신청할 경우에는 학비를 지원한다. 미네르바 대학은 현재 독립대학으로 인정받았고, 미국 학생들 사이에서 최상위권 인기대학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다만 이러한 대안적 모형이 더 확산될 수 있을지는 앞으로 지켜볼 필요가 있다.
서두에 언급한 ‘장미의 이름’이라는 소설은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Stat rosa pristina nomine, nomina nuda tenemus)”이라는 구절로 끝을 맺는다. 소설의 제목에도 반영된 이 구절은 베네딕트회 수도사였던 클루니의 베르나르가 쓴 시의 한 대목을 차용한 것으로, 그 원문은 “지난날의 로마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Stat ROMA pristina nomine, nomina nuda tenemus)”이다. ‘기꺼이 배우고 기꺼이 가르치려는 열의에 찬 젊은이들의 조합’을 의미했던 대학의 이름은 앞으로 어떻게 유지될 것인가?
한요셉 KDI 산업ㆍ시장정책연구부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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