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조선 파업 종료 반년... 현장에선 여전히 체불 시달리는 조선 하청노동자들
21년차 전기기술자 박모(41)씨는 울산 지역 조선소에서 재하청업체 소속으로 일한 두 달 동안 월급을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지난해 11월부터 선박 블록에 필요한 전기공사에 투입됐지만 회사는 '사정이 안 좋다'며 월급 지급을 한 차례 미뤘고, 12월이 되자 약속했던 월급을 지급하기는커녕 일감을 준 하청업체와의 계약 관계를 종료하고 폐업했다. 하루아침에 일터에서 쫓겨난 노동자 50여 명이 두 달 동안 못 받은 임금은 총 1억6,000만 원. 한국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이주노동자 20여 명도 포함돼 있었다.
가뜩이나 일자리가 부족한 겨울은 이들이 버티기엔 너무 추웠고, 박씨를 비롯한 노동자들은 임금을 받기 위해 버티는 대신 일당 수준을 깎아서라도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박씨는 "평생 건설현장에서 일하다 조선소에는 처음 와봤는데, 왜 조선업이 악명 높은지 뼈저리게 깨달았다"면서 "임금체불이 발생해도 원청·하청 어느 곳에서도 책임지지 않으려 하고, 노동자를 기계보다 못하게 취급하는 분위기"라고 했다. 그는 "대우조선 사태가 발생한 지 얼마 안 돼 상황이 조금이라도 나아졌을 줄 알았던 게 패착"이라고 말했다.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 유최안씨가 51일간 스스로를 가뒀던 1㎥ 남짓 구조물에서 벗어난 지 6개월이 흘렀지만, 조선업 하청노동자들은 여전히 열악한 환경에 시달리고 있다.
16일 업계에 따르면 조선업은 수주 호황을 맞아 업황이 눈에 띄게 개선되고 있지만, 선박 제조 공정의 80%를 담당하는 하청노동자들은 조선소로 돌아올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뚜렷한 이중구조... 임금에 4대보험까지 막힌 하청업체
조선업의 이중구조는 최근 진행된 현장 조사에서도 뚜렷이 나타났다. 정부가 지난해 구성한 조선업 상생협의체 전문가 그룹이 지난달부터 이달 초까지 주요 조선 5개사 원·하청 노사의 의견을 직접 듣고 울산·거제·영암 현장 방문 및 자치단체 간담회를 진행한 결과, 조선소 하청노동자는 원청 정규직 노동자 대비 60% 수준의 임금을 받는 것으로 조사됐다. 물량팀, 즉 '하청의 재하청업체'의 경우 하청 본공(상용직 숙련노동자)에 비해선 20% 높은 임금을 받고 있지만 이들에겐 4대보험과 퇴직금이 적용되지 않는다.
조선업계 임금체불 문제는 업황이 본격적으로 개선되기 시작한 지난해 오히려 악화됐다. 고용노동부 부산노동청 통영지청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기준 거제·통영·고성 지역 체불임금은 295억 원에 달했는데, 이는 전년 동기 대비 15.7%나 증가한 액수다. 2019년보다도 70억 원이나 많다. 전국 단위 임금체불 액수가 2019년을 정점으로 매년 줄어드는 추세인 것과 비교하면 조선업종 임금체불 문제가 심각하다는 뜻이다. 통영지청 관계자는 "업황이 좋아지고 있다곤 하지만 아직 저가 수주 물량 위주여서 업체 수익이 좋은 상황은 아니다"라며 "물가가 오르고 인력난이 심해지면서 임금체불이 1년 사이에 크게 증가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전문가 그룹 현장조사에 따르면 조선사별로 사내하청업체의 10~30%는 노동자들의 4대보험을 체납한 상태였다. 연구를 주도한 정흥준 서울과기대 교수는 "4대보험 체납이 계속되면 대출받는 데 지장이 생기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불안한 지위에 놓이게 된다"며 "하청업체들은 체납유예, 분할상환 등을 요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상생협의체 가동했지만... 관건은 '낙수효과'
정부는 조선업 상생협의체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원·하청이 머리를 맞대고 상생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주요 조선 5개사 원청과 협력사 및 전문가, 중앙정부, 자치단체까지 참여한 협의체는 지난해 11월 발족해 다음달 중 협약 체결을 목표로 하고 있다. 앞서 지난 11일 새해 첫 현장 행보로 조선업 상생협의체 전문가 간담회를 택한 이정식 고용부 장관은 "문제 해결은 문제를 가장 잘 아는 당사자들이 직접 해결해야 한다"며 "원·하청사가 상생과 연대 의지를 표명한다면 정부가 인력난 해소와 생산성 제고 등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문제는 앞으로 최소 1년 이상 이런 상황이 나아지기 어렵다는 데 있다. 조선업계 수주는 2020년부터 살아났지만, 부가가치가 높은 액화천연가스(LNG)선 등은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수주하기 시작했다. 통상 선박 수주부터 인도까지 3~5년이 걸린다는 점을 고려하면 하청노동자들에게까지 '낙수효과'가 전달되는 데는 앞으로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뜻이다. 다행히 업계 1위 현대중공업은 지난해 3분기 흑자전환했고, 대우조선과 삼성중공업도 올해 하반기에는 흑자를 낼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정흥준 교수는 "이중구조에서 발생하는 격차를 줄이지 않으면 아무도 이 일을 하려 들지 않을 것"이라며 "결국 수익이 났을 때 노동자들이 함께 나눌 수 있는 방안이 만들어져야 하고, 상생협의체에서는 그런 부분에 대한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곽주현 기자 z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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