꾀 많은 토끼? 부활의 토끼? 상징을 통해 '다른 세계'를 맛보다 [송주영의 맛있게 그림보기]
편집자주
아무리 유명한 예술작품도 나에게 의미가 없다면 텅 빈 감상에 그칩니다. 한 장의 그림이 한 사람의 삶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맛있게 그림보기는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그림 이야기입니다. 미술교육자 송주영이 안내합니다.
동양의 토끼
2023년 계묘년이 ‘검은 토끼해’라며 여기저기서 토끼 이야기가 한창이다. 한국 사람이라면 어려서부터 열두 동물의 경주 이야기를 듣고 자랐을 것이다. 성실한 소의 등에 타고 있던 쥐가 1등, 3등으로 달리다가 잠을 자던 토끼는 결국 4등, 가장 정직하게 경주에 임했던 말이 7등을 했다는 이야기다. 베트남과 네팔에서는 토끼가 아닌 고양이의 해이며, 말레이시아에서는 사슴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시아 지역에서 토끼는 영리하고 잔꾀가 많은 동물로 의인화된다. 불교에서 토끼는 보시행을 상징한다. 기독교의 헌금과 유사한 불교의 보시는 대가 없이 베풀고 나누는 덕행이다. 불교 설화에 의하면 보시를 결심한 토끼, 원숭이, 수달, 승냥이에게 제석천이 배고픈 나그네로 위장해 시험을 했는데 토끼만이 스스로 자기 몸을 태워 보시하려 하자 제석천이 감동해 토끼를 구하고 달에 새겨 놓았다고 한다. 달나라의 신성한 계수나무 아래에서 떡방아를 찧는 토끼 이야기는 아시아 전역에 퍼져 있다.
서양의 토끼
토끼는 아시아 지역에서나 지혜와 헌신의 상징이지 기독교 중심의 서구 문화권에선 전혀 다른 상징으로 구전됐다. 예수가 죽음에서 되살아난 것을 경축하는 부활절의 아이콘이 토끼다. 교회의 부활절 행사에서는 토끼 복장을 한 사람이 삶은 달걀을 나눠 주는 풍경이 흔하다. 그러나 부활절 토끼는 성경 교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오히려 고대 이교 문화의 상징이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신화, 고대 유대교 설화, 그리스 로마 신화에 이르기까지 토끼는 성(性), 임신, 다산, 풍요를 상징하는 이미지였다. 일단 여성 자궁의 모양이 토끼와 닮았기 때문이고, 한 달 정도의 짧은 임신 기간을 마치고 열 마리 넘게 출산하고도 곧바로 다시 임신이 가능한 동물이 토끼라서 그렇다. 지하 굴에 있다가 4월 무렵 지상으로 뛰어나오는 모습이 ‘부활’을 닮았다는 것과, 예수가 최후의 만찬 후 십자가에 못 박히고 다시 부활하는 시간을 기리는 유대교의 ‘사순절(기독교의 고행주간)’ 금식 기간 동안 아이들과 달걀을 색칠하던 중세 시절의 습관이 이어져 부활절 토끼가 됐다는 이야기가 있다.
토끼와 상징
동양의 토끼는 지혜롭게 위기를 모면하고 달에서 떡방아를 찧고 있고, 서양의 토끼는 성인 잡지 플레이보이의 아이콘이 되면서도 거룩한 예수 부활을 알리며 달걀을 나눠 주고 있다. 정작 산과 들에 있는 토끼는 얌전히 풀을 오물거리느라 바쁜데, 우리 인간들은 토끼를 온갖 의미로 의인화하느라 바쁘다. 토끼가 이렇게 다양한 의미를 갖게 된 이유는 결국 각자가 무엇을, 왜 그렇게 보게 됐는가에 대한 질문과 같다. 검은 토끼의 해에 맞춰 토정비결을 보고 토끼 그림으로 연하장을 만드는 이유는 이번 한 해에도 토끼가 상징하는 좋은 의미들이 내 삶에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어서다. 부활절에 토끼 복장을 하고 아이들에게 달걀을 나눠 주는 사람도 행복한 하루를 만들려는 것이다. 결국 토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토끼의 상징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 일상에서, 문화에서, 예술에서 상징은 중요하다.
그렇다면 상징이란 무엇인가? 상징은 추상적인 어떤 생각, 개념, 이야기를 어떤 형태(이미지) 안에 담은 것이다. 크게 보자면 문자는 언어의 상징이고, 작게는 십자가가 기독교를 상징한다. 미학, 미술사, 예술학 등 모든 미술 이론에서 상징을 연구하는데, 깊게 들어가면 그 수위는 어렵고 복잡하다. 19세기 말 프랑스를 중심으로 서유럽에서 활발했던 상징주의는 초현실적인 환상을 작가의 개성으로 창작하려 했던 문예사조로 여기서 다루는 상징과는 다르다. 토끼와 상징에 대한 이 글은 난해한 미학 이론에 대한 것이 아니다. 우리 일상에서 흔하게 접하는 그림을 상징을 통해 보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다.
파노프스키의 상징과 도상해석학
상징에 대해 가장 많이 언급한 학자가 있다면 단연코 엘빈 파노프스키다. 파노프스키는 현대 미술사의 큰 줄기를 완성한 연구자다. 그가 남긴 100권이 넘는 어렵고 난해한 책들은 미술사를 전공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관문이다. 파노프스키는 르네상스 시대의 원근법과 인체비례, 그리고 도상해석학을 정리했다. 도상(圖像)은 어떤 이미지에 담겨 있는 나이테 또는 화석과도 같다.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과 같은 역할이다. 그림 속 중년의 남성이 큰 열쇠를 들고 있다면 그는 예수로부터 천국 열쇠를 받았다는 베드로일 가능성이 크다. 큰 열쇠가 ‘도상’이며, 그 도상과 관련한 역사와 여러 문헌 등을 바탕으로 화가가 왜 베드로를 그렸는지 분석하는 것이 ‘도상해석학’이다. 파노프스키는 미술사가 단순한 고고학이나 역사학에서 벗어나 더 큰 인문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문학은 인간에 대해 탐구하는 학문이다. 그림 속 상징을 이해하려는 노력과 과정은 결국 나와 나를 둘러싼 세상을 이해하는 일이다.
북유럽 르네상스의 슈퍼스타, 알브레히트 뒤러
파노프스키가 가장 사랑했던 예술가는 그의 조국 독일의 국민화가, 알브레히트 뒤러였다. 파노프스키의 저서 '도상해석학 연구'와 '알브레히트 뒤러 평전'은 상징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뒤러는 북유럽 르네상스의 슈퍼스타였다. 유로화로 바뀌기 이전의 독일 마르크 화폐에는 뒤러의 작품들이 새겨져 있을 정도다. 1471년 뉘른베르크 금세공사의 아들로 태어난 뒤러는 어려서부터 세밀한 조각도 작업에 능숙했다. 두 번의 이탈리아 방문을 통해 당시의 최신 학문과 기술을 덥석덥석 흡수했던 야망 넘치는 인물이었다. 요즘 말로 빗댄다면 뒤러는 얼리어답터(신제품을 먼저 접하는 사용자)였다. '모피 코트를 입은 자화상'은 예술가로서의 자아를 드러낸 최초의 자화상으로 유명하다. 그는 수채화, 유화, 목판화, 동판화 등 다양한 장르에 도전했으며 인물화, 동물화, 풍경화, 제단화 등 가리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세밀화는 독보적이다. 그 대표작이 수채물감으로 그린 '야생토끼'다. 520년 전에 그려진 세밀한 붓 터치는 경이롭다고 할 만큼 섬세하다. 살아있는 토끼를 보면서 그렸을 리 없다며 어쩌면 박제된 산토끼를 그렸으리라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밝혀진 것은 없다. 뒤러가 그린 다른 식물 세밀화도 사진이 없던 시절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가만히 얌전히 정지된 자세로 앉아 있지만 마치 살아 움직일 것 같은 갈색 토끼에 담긴 상징은 무엇일까? 뒤러의 토끼는 1502년 작품이다. 이 시기의 뒤러는 동식물도감을 제작하듯이 사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작업에 열중했다. 이러한 사실적인 묘사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북유럽 르네상스의 공통점이다. 그러나 독일과 네덜란드 지역의 북유럽 르네상스는 이탈리아 지역과 큰 차이가 있다. 이탈리아의 거장들은 상상 속 그리스·로마 신들을 중심으로 인물과 사물을 미화해 표현했지만 북유럽의 화가들은 신화나 성경 속 인물이 아닌 마을 사람들, 거리 풍경, 정물 등 일상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고대 유물과 그 전통이 이 지역에 부족했던 이유도 한몫했지만 당시 종교개혁과 관련한 인식적 영향도 컸다. 만약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거장이 토끼를 그린다면 그리스 여신들 곁에 소품처럼 앉아 있는 토끼였을 것이다. 그러나 뒤러의 토끼는 그 자체로 주인공이다. 토끼가 단순히 도상으로 그림 속에 있는 것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토끼, 바로 자연 그 자체다.
예술가는 환상과 현실을 이어주는 상징을 다루는 중재자
1517년 마틴 루터는 교황청 면제부에 반발하며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했는데 뒤러는 이 문서를 읽고 크게 감명하며 루터의 지지자가 됐다. 뒤러는 '삼위일체'(1511년)에서 젊은 여인으로 미화된 성모 마리아가 아니라 30세 아들을 둔 늙은 여성으로 묘사할 정도로 이미 근대적인 인물이었다. 뒤러의 이러한 근대성은 독일 지역에서 일어난 성상 파괴 운동에 대한 비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큰 지지를 얻으면서 과격해진 지지자들이 성당의 종교화와 성상들을 마구 부수는 모습을 보면서 뒤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생각 없는 사람이나 돌이나 나무를 숭배한다. 종교미술은 해악보다는 이로움이 크다.” 예수를 그린 그림이나 성모마리아 조각상은 상징으로 구현된 미술품이지 파괴해야 하는 우상이 아니라는 지적이다. 뒤러는 이미 상징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교회나 성당의 성찬식에서 “이것은 예수의 피와 살임을 믿습니다, 아멘”을 외치며 포도주와 빵을 먹었다고 해서 실제로 예수의 살과 피가 내 몸에 들어간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상징’을 받아들이는 것, 거기에 성찬식의 의미가 있다. 만약 성찬식의 포도주와 빵이 실제로 화학적으로 변해 진짜 예수의 살과 피가 됐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가 광신증이 있다고 여길 것이다. 예술가의 사회적 의무를 주장했던 비평가 에른스트 피셔는 이러한 성찬식의 예를 들면서 “빵과 포도주가 실제로 예수의 살과 피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이를 수용하면서 종교적 체험이 가능하도록 만들어 주는 중간 역할이 바로 상징”이라고 설명한다. 상징이란 형이상학과 형이하학, 환상세계와 현실세계, 이쪽과 저쪽이 무너지지 않은 채 연결될 수 있도록 이어 주는 장치다. 그리고 이 장치를 가장 잘 사용하는 사람이 바로 예술가들이다. 시인, 음악가, 화가, 무용가, 연출자 등 예술가들은 이러한 상징을 잘 다루는 중재자이자 사제들이다.
그림 감상은 상징을 통해 다른 세계를 체험하는 일
뒤러의 토끼 그림을 보면서 지혜와 헌신을 떠올리거나, 성적인 것 또는 부활을 떠올려도 좋다. 계묘년의 검은 토끼가 우리에게 좋은 운을 가져다 줄 거라며 끄덕여도 좋을 것이다. 혹은 뒤러의 섬세한 붓 터치에 깃든 근대적이고 혁명적인 세계를 느껴볼 수도 있겠다. 그 어느 쪽을 선택해 토끼 그림을 감상하더라도 그림 속 토끼가 실제로 튀어나와서 우리를 물지는 않을 것이다. 성찬식의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듯 토끼 그림을 감상해 보자. 토끼는 좋은 것을 기다리고 바라는 우리 마음을 상징한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에게 토끼의 축복이 가득한 한 해가 되길 기원한다.
송주영 미술 교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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