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나무 숲] 러시안 쿠킹 클래스
국물 중요한 한국처럼 러시아인도 한솥 가득 수프 끓여 나눠 먹어
푸틴 우크라 침공후 급락한 대러시아 호감도… 냉전시대 회귀인가
소비에트 시절에는 레스토랑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어쩌다 보이는 것이 단체 급식 성격의 식당뿐이었고, 식료품점 진열대는 텅 비어 있기 일쑤였으며, 빵·설탕·차 등은 배급제였다. 감자·오이·토마토·비트 같은 채소는 ‘다차’라고 불리는 전원 텃밭에서 대부분 직접 길러 먹었고, 숲에서 버섯과 과일 열매를 채집해 저장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연중행사였다. 기본적으로 자급자족 방식이었다고 보면 된다.
그러나 소련은 고도로 계층화된 사회여서, 상층부 삶은 달랐다. 고려인 유력 인사가 내 기숙사 방으로 코카콜라 한 박스를 턱 가져다 놓고, 큰 병 가득 캐비아를 선물해와서 주변 사람 모두 놀란 적이 있다. 한국 귀빈을 초대한 식사 자리에 따라갔더니만, 꿈에도 생각지 못한 곳에 숨어 있던 비밀 클럽이 나타나 깜짝 놀라고, 테이블마다 놓인 코카콜라 깡통에 다시 한번 놀란 적도 있다. 당시 코카콜라는 일반인들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전설의 음료였다. 정부가 독점한 그런 희귀 품목이 정상 유통망이 아닌 권력과 연줄을 통해, 그리고 블랙 마켓을 통해 비정상적으로 분배되었다.
레스토랑이 없었을 때, 사람들은 서로를 집으로 초대했다. 초대받은 사람도 으레 나눠 먹을 것을 챙겨 들고 갔다. 지도교수가 소개한 미술사학자 집을 방문했더니, 내게 달걀 두 알로 뭔가를 요리해주면서 ‘이것이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것’이라고 자랑스러워했다. 실제로 시인 오시프 만델슈탐의 미망인이 쓴 1930년대 회고록을 보면, 친구(여류 시인 아흐마토바)가 찾아왔는데 집안에 먹을 것이 없어 이웃을 전전하며 달걀 하나 달랑 얻어오는 장면이 있다. 달걀 한 알을 4명이 어떻게 나누어 먹었을까?
그들이 좁은 부엌 테이블에 모여 앉아 끝없이 나누었던 것은 사실 음식이 아니라 ‘우리 편끼리’라는 끈끈한 연대 의식이었다. 뜨거운 차만 있으면 됐다. 규율과 감시와 처벌의 ‘속삭이는 사회’에서 부엌 식탁만큼은 소리 내 떠들 수 있는 장소였고, 물론 그래서 스탈린 시대에는 그곳이 도청과 밀고의 근원지이기도 했다.
러시아인의 따뜻한 식탁에는 검은 빵, 보르시(borshch·비트 수프), 오이와 토마토를 섞은 심플 샐러드, 메인 요리(커틀릿 같은), 검은 차가 기본이다. 좀 더 풍성하게 하려면 절인 오이와 버섯, 러시아식 팬케이크 블린, 그리고 사워크림 비슷한 유제품 스메타나가 필요하다. 술은 필수다. 블린에 연어알을 곁들이면 식탁의 품격이 급상승하고, 거기에 혹시 ‘소비에트 샴페인’이라는 러시아산 샴페인 병이라도 올라오면, 즉각 부르주아 사교 테이블로 돌변한다.
핵심은 흑빵과 수프와 차. 보르시라는 러시안 수프는 양파와 비트, 감자, 양배추 등을 썰어 볶다가 물을 부어 끓이는 것이다. 비트에서 빨간 물이 나와 진분홍색 수프가 된다. 입맛에 따라 고기를 넣어 끓이기도 하고, 식초를 좀 섞기도 하는데, 우크라이나식 보르시는 고기와 지방을 넣어 기름기도 많고 걸쭉하다. 한 끼 식사로 충분하다. 그런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저리 전쟁통이니, 이제는 사이좋던 러시아식-우크라이나식 보르시도 갈라서게 생겼다. 이 수프에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것이 스메타나와 딜(dill)이라는 허브. 풍미가 달라진다. 러시아인의 주식인 삶은 감자도 딜을 넣으면 맛이 근사해진다. 자, 프리야트노보 아페티타(맛있게 잡수세요)!
무엇을 넣고 끓이건, 수프는 중요한 음식이다. 한국과 러시아 민족 사이에 각별한 인간적 친연성이 느껴진다면, 그것은 국물에 대한 향수를 공유하기 때문 아닐까 싶다. 술을 부르는 국물이고, 허기와 쓸쓸함을 잠재우는 국물이며, 한솥 가득 끓여 두고두고 나눠 먹는 형제애의 국물이다. 말 안 해도 통하는 공생의 양식이다.
최근 실시한 한국인의 국가별 호감도 조사에서 러시아는 20개 국가 중 18위로 하락했다. 중국, 북한보다도 낮다.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그로 인한 국제 정세적 불안감 때문일 것이다. 뜨거운 국물과 술과 노래를 좋아하는 두 민족 사이에 러시아식-우크라이나식 보르시의 틈새가 벌어지고 있다. 국가와 국민, 정치 외교와 문화는 별개 문제다. 그런데 신냉전 분위기에서 문화적이고 정서적인 러시아 사랑(Russophilia)은 그만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러시아 공포증(Russophobia)의 포로가 되어버렸다. 마치 소비에트 시절로 회귀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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