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기빈의 두 번째 의견] 청년층의 ‘과소비’에 대하여

기자 2023. 1. 17. 03:0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청년층 부채가
늘어나는 현상을 보면서
어설픈 도덕적 훈계는
그만두자
그런 이야기는
땀 흘려 번 돈으로도
복된 생 꾸려나갈 수 있는
세상에서나 할 인사말
이 잔인한 현실을
매일매일 새기면서
삶이라는 덩어리를
깎아내고 깎아내면서
살아온 이들이다
이렇게 뻔하고 치사스러운
닭장 같은 세상에 그들을
가둬 놓아 죄송할 뿐이다

얼마 전 매년 나오는 통계청의 ‘가계금융복지’ 발표가 있었고, 여기에서 20대 및 30대의 가계부채가 크다는 지적이 나왔다. 그 원인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당연히 이어졌다. 물망에 오른 흔한 혐의자는 ‘영끌족’이었지만, 끌어올 영혼이라도 있는 이들은 일부 계층일 뿐이므로 이걸로 다 설명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생긴다. 결국 2030세대의 소비 지출이 소득에 비해 구조적으로 넘치고 있다는 의심이 나오게 되며, 이는 다시 분수에 맞지 않는 ‘과소비’를 경계하라는 도덕적 교훈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홍기빈 정치경제학자

나도 생태위기 등에 직면한 지구적 산업문명이 소비의 규모를 극적으로 줄여야 한다고 항상 믿고 있는 편이므로, ‘과소비’에 대한 경계 자체에는 반감이 없다.

하지만 이는 청년층이 처한 경제적 현실의 중요한 측면을 간과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대안적 설명은 이른바 ‘인적 자본’이 된 지금의 청년 세대에게는 ‘투자’와 ‘소비’의 구별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이들의 지출 수준은 자기절제나 도덕적 각성 등으로 제어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19세기 초에는 사람을 ‘상품’으로 보는 노동 시장이 생겨났고, 21세기의 오늘날에는 사람을 ‘자본’으로 보아 그 자산 가치를 매기는 ‘인적 자본’ 개념이 생겨났다. 그리고 ‘인적 자본’을 육성한다는 게 국가적 차원에서 청년 세대를 바라보는 기본 패러다임이 된 지금, 청년들은 자신들의 인생 경로가 ‘노동’의 길이 되느냐 ‘자본’의 길이 되느냐의 절박한 갈림길에 서게 된다. 천신만고 끝에 ‘인적 자본’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해도 그다음에는 ‘자본 가치’를 계산하여 자신들을 세세히 켜켜이 줄세우고 분류하는 치열한 경쟁으로 돌입해야 한다.

경제학의 생산함수에는 ‘자본’과 ‘노동’이라는 두 가지 생산요소가 등장한다. 원래 사람은 다 ‘노동’이었고, 그 대가로 주어지는 소득의 이름은 ‘임금’이었다. 그런데 1960년대에 나오기 시작한 ‘인적 자본’ 이론은 이러한 전통적 구별에 반기를 든다. 사람이 꼭 정해진 일을 하고 정해진 임금을 받는 ‘노동’이라는 생산요소가 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만약 어떤 뛰어난 사람이 기술, 지식, 능력, 거기에다 오만가지 포괄적 의미의 (외모와 붙임성 포함) ‘매력’까지 갖추어 최종 생산물의 가치와 수익을 증가시키는 데에 기여한다면, 그 사람은 ‘노동’이 아닌 ‘자본’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시카고 대학의 일부 괴짜 경제학자들의 상상력 정도로 치부되었던 이러한 ‘인적 자본’ 이론은 1990년대 이후에는 주요 산업국들이 새로운 산업 관계의 핵심 원리 중 하나로 받아들이면서 전 지구적인 사회적 현실이 되어 버린다. 부가가치의 원천을 ‘지식’으로 보는 현대자본주의에서는 사람이라고 똑같은 사람이 아니며, 얼마나 더 큰 정보 처리와 지식의 능력을 가지고 있느냐로 노동과 자본으로, 그리고 자본도 얼마나 큰 가치의 자본인지로 세세히 나뉜다.

그리고 ‘네트워크 자본주의’의 시대로까지 진입한 지금, 이제 흔한 ‘가방끈’이나 ‘스펙’ 정도로는 부족하다. 사회적 관계망이 어떠하며 어떤 사람들과 어떤 내용과 성격의 비공식적 관계를 맺고 있는지까지 총체적으로 그 ‘인적 자본’의 가치 계산에 들어가기 시작한다. 이러한 경제학 용어가 낯설고 부담스럽다면, 혈연 인맥의 배경이 어떠하며 성장 환경과 문화적 지적 취향이 19세에서 35세까지 얼마나 사람의 처지를 규정하는지에 대해 그 연령대의 사람들에게 물어보라.

노동의 길과 인적 자본의 길로 갈려

‘인적 자본’이라는 개념은 그저 잠깐 생각하고 말 ‘발칙한 상상력’ 정도로 끝내야 했다. 정말로 진심으로 사람을 똑같은 ‘자본’이라고 치부한다면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무수히 많은 문제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인적 자본’은 유형자산인가 무형자산인가? 자본 형성 비용은 누가 어떻게 조달하는가? 이를 위한 금융 제도는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 그 최종적인 자본 가치는 누가 어떤 방식과 절차로 계산하는가? 감가상각, 양수도, 인수·합병 등등의 경우에는 어떤 절차가 마련되어 있는가? ‘잘나가는’ 남녀의 결혼을 ‘인수·합병’으로 보는 결혼 정보 회사가 있다는 소문은 들어보았지만, 이런 문제들에 대해 정말로 하나하나 ‘인적 자본’이라는 개념에 맞게 제도를 마련하다 보면 사회 전체가 송두리째 뒤집힐 수밖에 없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지금 청년층이 겪고 있는 당장의 문제 중 하나가 지출이다. 이들의 지출은 과연 ‘소비’인가 아니면 자신들의 ‘인적 자본’을 형성하기 위한 ‘투자’인가?

이들이 느끼는 사회적 압력의 내용을 보면, 그 ‘인적 자본’의 평가는 명시적인 자격증이나 ‘스펙’ 같은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어느 정도 이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이것저것을 배우고 자격증을 따고, 외국어 능력과 AI 이해력을 키우기 위해 이런저런 강좌와 교육을 신청하여 비용을 지출했다고 한다면, 아마도 대부분 ‘인적 자본’ 형성의 ‘투자’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뻔한 범주를 벗어나면 투자인지 소비인지 애매한 광활한 회색지대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성형수술은? 외국 여행은? 필라테스 1년치 티켓은? ‘슈트발’ 세울 수 있는 명품 정장은? 자신의 클래스를 보여줄 수 있도록 ‘핫플’에서 폼나게 찍는 SNS 사진의 생산 비용은? ‘인적 자본’의 ‘매력’이여, ‘네트워크의 마력’이여. ‘지식 자본주의’와 ‘네트워크 자본주의’에 살아가는 청년 세대는 이제 일상의 매 순간이 자신의 ‘자본 형성’의 계기라는 강박 속에서 살아가야 하며, 거기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이 서면 빚을 내서라도 질러대야 하는 상황에 살고 있다. 소득에 맞게, 분수에 맞게 소비를 조절할 줄 아는 분별 있는 경제 생활을 하라는 말은 참 쉽다. 그런데 ‘소비’가 곧 ‘투자’인 이 ‘인적 자본’의 세대에게 그런 게 가능할까? 자신의 ‘인적 자본’ 가치가 결정되는 인생의 이 시점에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소비’이고 ‘투자’인지 구별할 수 있단 말인가?

인적 자본 돼도 ‘리스크 만빵’ 상황

그런 인생 경로에 들어서지 않으면 되지 않을까? 그냥 정직하게 일해서 얻는 소득으로 분수에 맞추어 쓰면서 삶을 꾸려가는, 전통적인 경제 윤리에 맞는 삶을 살면 되지 않을까? 다시 말해, 굳이 스스로를 ‘인적 자본’으로 만들려고 이런 피곤한 짓을 하는 대신 그냥 떳떳이 ‘노동’으로 살아가면 되지 않을까? 차마 그런 말이 나오지 않는다. ‘노동’으로 분류된 청년들이 지금 받는 월소득이 얼마이며 10년, 20년이 지나도 그 액수가 크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말문이 막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삼백충’이라는 신조어를 들었다. 일단 월 300만원 이하의 일자리로 경제 생활을 시작하면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절대로 월 300만원이라는 소득의 천장을 뚫을 수 없다는 의미로, ‘노동’ 청년들이 자조적으로 쓰는 용어였다. 아프게도, 내가 어림짐작으로 관찰한 바와 대략 일치했다. 더 아프게도, 내가 기억하는 2005년경과 그 현실이 액수까지 변한 게 없다.

거칠게 정리해 보겠다. ‘노동’이 되어 ‘삼백충’의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인적 자본’이 되어 자신의 ‘자본 가치’를 끌어 올리기 위해 ‘소비’인지 ‘투자’인지 구별도 되지 않는 삶을 대략 십 몇 년 끌어갈 것인가. 참으로 피곤한 세상이고 피곤한 삶이다. 여기에 결혼해서 아이라도 덜컥 낳으면 ‘자회사’의 가치와 그 ‘투자’까지 신경써야 하는 계산도 못할 ‘리스크 만빵’의 상황이 벌어진다.

무슨 대책이 생각나지도 않는다. 그러니 청년층의 부채가 늘어나는 현상을 보면서 어설픈 도덕적 훈계는 그만두자. 그런 이야기는 ‘땀 흘려 번 돈으로도 복된 인생을 꾸려나갈 수 있는’ 세상에서나 할 인사말이다. 열 살 남짓부터 이 잔인한 현실을 매일매일 새기면서 삶이라는 덩어리를 깎아내고 깎아내면서 살아온 이들이다. 아, 젊은 시절 누군들 꿈이 없고 욕심이 없었을까. 이렇게 뻔하고 치사스러운 닭장 같은 세상에 젊은이들을 가두어 놓아 죄송할 뿐이다. 돈만 많다면 이번 설에 세뱃돈이나 잔뜩 쥐여주고프다.

홍기빈 정치경제학자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