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여성의 말을 자르는 남성들
미국 연방대법원은 2021년 개정기부터 새로운 법정 변론 규칙을 시행했다. 이전에는 변호사의 변론이 끝나면 대법관들이 정해진 순서 없이 자유롭게 질문을 했는데, 변경된 규칙하에서는 대법원장부터 시작하여 대법관들이 서열에 따라 순서대로 질문을 하게 된다.
변론 규칙을 변경한 이유는 여성 대법관이 질문하는 도중 남성 대법관이 말을 끊고 끼어드는 일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질문 순서를 정해두면 어느 대법관이 질문하는 도중에 자기 차례가 아닌 다른 대법관이 끼어드는 행동을 자제하리라고 기대한 것이다.
연방대법원이 변론 규칙을 변경하는 계기를 제공한 연구 결과는 토냐 자코비, 딜란 슈워스가 노스웨스턴 로스쿨에서 발표한 2017년 논문에 담겨 있다. 2015년까지 12년간 대법원 구술 변론을 분석한 이 연구에 따르면, 어느 대법관이 다른 대법관의 발언 도중 끼어드는 사례의 96%는 남성 대법관에 의해 일어났다. 말을 자르고 끼어드는 행동의 대상을 보면, 2015년의 경우 이런 행동의 66%가 전체 대법관 중 3분의 1에 불과한 여성 대법관 3인을 대상으로 했고, 여성 대법관의 질문이 방해받는 횟수는 남성 대법관의 3배에 달했다.
연구자들은 대법관 개인의 성별 외에 대법원의 전체 성비, 대법관의 성향, 서열 등이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닌지 변수를 바꾸어 가며 분석했다. 발언을 가장 많이 방해받은 소니아 소토마요르 대법관에게는 진보 성향, 소수 인종, 짧은 재직기간 등의 요소가 겹쳐 있어, 젠더 외의 요인이 영향을 끼쳤는지 검증이 필요했다. 재직기간이나 이념 성향에 따른 패턴이 일부 보였지만 결론은 마찬가지였다. 압도적인 비율로 남성 대법관이 여성 대법관의 말을 자르고 있었다. 이 연구의 가장 놀라운 부분은 남성 변호사가 여성 대법관의 말을 끊는 경우가 많다는 분석이다. 변론 규칙에 따르면 대법관이 발언을 시작하면 변호사는 자신의 변론 도중이라도 즉시 발언을 중단해야 한다. 의뢰인을 대리하여 중요한 소송에서 대법원의 판단을 구하는 변호사는 승소를 위해 어떻게든 대법관을 설득해야 하는 입장이다. 자기 얘기를 하겠다며 대법관의 말을 중간에 끊고 끼어드는 일은 쉽게 상상하기 어렵다.
이런 일이 남성 변호사와 여성 대법관 사이에서는 일어난다. 연구 대상 기간 중 다른 사람에 의해 대법관의 발언이 중단된 사례의 10%는 남성 변호사에 의해 벌어졌고, 2015년에는 전체 끼어들기의 8%가 남성 변호사가 소토마요르 대법관의 발언을 자른 경우였다.
이런 분석이 시사하는 바는 명확하다. 남성이 우월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사회에서 일부 여성이 높은 지위를 획득한다고 해도 젠더 차별은 해소되지 않는다. 미국에 9명밖에 없고 미국 역사를 통틀어 116명만이 거쳐간 종신직이자, 판결 하나로 50년 동안 이어져 온 여성의 권리가 지금부터는 기본권이 아니라고 선언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자리에 올라도, 자신의 성별 때문에 남성 동료 심지어 법대 아래에 있는 남성 변호사가 발언을 가로채는 일을 겪어야 한다.
극소수에게만 주어진 그런 지위조차 없을 때 어떤 일을 겪을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이 글을 읽는 여성들은 일상에서 혹은 사회생활을 하며 당했던 경험을 몇 시간이고 쏟아낼 수 있지 않을까. 반면 상당수 남성들은 의식조차 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단순히 넘길 문제가 아니다. 엄격한 절차에 따르는 변론이든, 업무를 위한 논의나 협상이든, 아니면 사적인 대화이든, 의사소통을 하는 과정과 방식은 그를 통해 얻는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 남성이 여성의 얘기를 중간에 많이 자르는 것은, 뿌리 깊은 젠더 차별이라는 현실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그런 차별이 존속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누군가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는데 그 사람의 생각이 반영될 리 없고 그 사람이 가진 질문에 대한 답변이 이루어질 수 없다.
타인의 말을 가로채는 행동은 상대방의 얘기는 가치가 덜 하고 내 말이 맞다는 우월의식 때문이다. 아니, 거기까지 가기에 앞서 남의 말을 끊는 일이 잘못이라는 점은 복잡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그럼에도 남성이 여성의 말을 많이 끊는다는 것은 어딘가 고장이 있어 고쳐야 한다는 뜻이다. 오랜 기간에 걸쳐 내면화된 남성들의 의식을 고쳐야 하니 어려운 문제다. 하지만 남성을 대할 때는 잘 작동하는 브레이크가 이미 있고 그게 누구에게나 작동하도록 하면 되니 해결 불가능한 문제도 아니다. 문제를 인식했으니 하려는 의지만 있으면 우리 세대 안에 해결할 수 있다. 남의 말을 끝까지 듣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유정훈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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