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귀은의멜랑콜리아] 종교와 정치가 주는 환상

2023. 1. 16.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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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나약한 인간에 믿음을
정치는 ‘더 나은 세계’ 환상 줘
돈과 연관된 출산정책 잘못돼
사랑 바탕 공동체 지향 바람직

정신분석학에서 도착증은 성적 도착증과 다른 맥락으로 쓰인다. 도착증은 오히려 사회문화적 맥락으로 쓰일 때가 더 많다. 가령, ‘나는 너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다’는 환상으로 타인과 관계 맺는 것은 도착증적인 거다. ‘나는 신적 존재의 대리자’라는 믿음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것도 도착증적인 거다. 결국 도착증은 타인의 환상과 공모하여 확고해지는 증상이다.

범박하게, 종교와 정치가 그러하다. 그리고 그 종교와 정치가 만드는 환상은 가치 있어야 하고 타인의 삶을 의미 있게 변화시켜야 한다. 이때 환상은 나쁜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환상이 없다면 통합된 정체성도 없다. 환상인 줄 알지만 때로는 그 환상에서 파생되는 가치와 아름다움을, 우리는 향유한다.
한귀은 경상국립대 교수·작가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선종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였다 한다. 무방비로 이 말에 휘둘렸다. 얼마나 사랑해야 죽음의 순간 ‘당신을 사랑한다’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비종교인이지만, 비종교인이라서 베네딕토 16세 또한 죽음의 순간 무척 외로웠으리라 짐작했었다. 존재하는지 부재하는지 알 수 없는 그 모호한 신을 평생 사랑한 사제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생각했었다. 모호한 존재를 사랑하는 것은 상처 입는 일이 아닐까 의심했었다.

평범한 우리는 죽기 전 무슨 말을 하게 될까. 무섭고 외로울 것이다. 무신론자라도 신을 찾게 될 것이다. 기도할지도 모른다. ‘나’를 구원해 달라고, ‘나’를 사랑해 달라고. ‘나’를 위해 절박하게 기도하는 것이 죽음의 순간 우리의 모습일 것이다. 그게 당연하다 여겼는데, 틀린 생각이었다.

신이 존재하는지 부재하는지 모른다. 있다 해도, 그 신이 전능한지 무력한지 모른다. 그러나 어떤 것이 사랑인지는 알 것 같다. 전능한 신이 아니라 무력한 신이라도 사랑한다면 그것이 사랑일 것이다. 그 무력한 신을 향한 사랑이 더 나약한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질 것이다. 무력한 신을 사랑해야 더 나약한 인간을 사랑할 수 있다.

베네딕토 16세는 2013년 스스로 교황직에서 물러났었다. 당시, 교황청으로부터 압박이 있었으리라는 추측이 있었다. 그는 단호했다. 압박당했다면 오히려 저항했을 거라고. 그는 패함으로써 가톨릭에 새 가치를 심어 주었다. 비종교인에게 종교적 환상을 가르쳐 주었다.

정치인은 이 세상을 더 낫게 만들 거라는 환상을 국민에게 준다. 국민은 그걸 믿고 그들을 추종한다. 정치인과 추종세력은 그렇게 공모한다. 그 공모가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면 그것은 연대이고, 탈진실로 서로를 옹립하면 그것은 악이다.

돈 때문에 아이를 낳지 않는다는 건 탈진실이다.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전 부위원장이 출산 장려책을 내놓았었다. 출산한 자에게 ‘돈’을 준다 했었다. 잘못된 정책이다. 문제는, 그 잘못된 정책에 있지 않다. 그것이 사적 권력을 위한 정쟁에 이용되었다는 것에 있다. 잘못된 정책이라도 토론장에 던져져 담론 투쟁을 거치면 개선이 가능하다. 정책이 권력 다툼의 소재로만 이용되면 그 정책에 관련된 모든 일은 다 무산된다. 공직자가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면 그것은 그의 무능 때문이어야지, 권력 다툼 때문이어서는 안 된다. 권력 다툼은 그의 무능을 면죄하고 이 때문에 그 정책은 마치 정당한 것처럼 오인된다.

젊은 부부가 유모차를 끌고 아이와 함께 산책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힘들다. 그 풍경이 아름다워서 더 힘들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초미세먼지에 노출된다. 조금 있으면 맹목적 경쟁에 노출된다. 초양극화에 상처받고, 혐오 사회에 노출된다.

이런 시대에 아이를 낳는 것은 이기적인 일이다. 그럼에도 환상을 품는다. 이 이기심은 곧바로 이타적인 일이 될 거라고. 사랑이야말로 이기를 이타로 바꾸는 유일한 에너지라고. 사는 동안 가장 큰 사랑은 부모가 아니라 어쩌면 내 아이에게서 받는 거라고. 내 아이는 존재 자체를 나한테 온전히 맡기니까. 아이를 낳아서 아이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대상이 필요해서 아이를 낳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이기적인 일이고, 아름다운 일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부모는 초미세먼지 환경문제에 예민해질 것이며, 경쟁이 아니라 진정 아름다운 가치가 있음을 아이와 함께 공유할 것이며, 초양극화 세상에서 약자에 대한 윤리, 더 큰 사랑과 우정을 배울 것이다. 억지스러운 논리다. 그런데, 더 잘 사랑하기 위해서는 노력을 해야 하고, 노력은 언제나 억지일 수밖에 없다. 가장 자연스럽게 사랑하기 위해 억지스럽게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저출산 정책’이란 말은 비윤리적이다. 삶은 인구수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다. 인구를 늘리자는 것은 마치 국가를 위해 복무할 노동력을 확보하자는 말로 들린다. 출산하면 돈을 준다는 조건부 명제는 아이를 낳는 사람도, 낳지 않는 사람도 모두 소외시킨다. 우리는 인구수로 국가의 미래를 바라볼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보살피는, 취약한 인간이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지향성으로 미래의 문제를 진단하고 처방해야 한다. 정치가 그걸 할 수 있다 생각하는 것은 환상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환상이 없다면 희망도 없다. 이 환상은 ‘믿음’의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한귀은 경상국립대 교수·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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