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다움’을 요구하지 말자, 사랑하고 존중한다면[김유진의 구체적인 어린이]

기자 2023. 1. 16.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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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유년동화에 비친 어린이
유년동화 <나는 따로 할 거야> 삽화
오빠처럼 똑똑해져라 하지 않고
동생처럼 씩씩해져라 하지 않는 것
정이·혁이 다름을 인정하는 방법

유년동화라는 장르

유년동화 혹은 유아동화라고 부르는 아동문학 장르가 있다. 좀 어린 나이의 어린이 독자가 읽는 동화다. 흔히 동화를 학령이나 나이에 따라 저학년 동화와 고학년 동화로 분류할 때 저학년 동화의 특성과 비슷하다. 작품 길이가 짧고, 문장이 간결하고, 서사 진행이 빠르며, 판타지인 경우가 많다. 지금 각 출판사의 유년동화 시리즈는 대개 6~8세 어린이 독자를 대상으로 하니 저학년 동화를 읽는 어린이보다 좀 더 어린 나이의 독자부터 읽을 수 있다. 그림책을 보던 어린이가 한글을 익혀 이미지보다는 텍스트가 중심인 ‘읽기책’을 읽을 때 시작하는 동화다.

꾸준히 출간되는 유년동화 중에서도 유은실 작가의 유년동화 시리즈가 지난해 12월 다섯 권으로 완결되어 첫 권부터 한 호흡으로 다시 읽어봤다. 출간될 때마다 한 권씩 재미있게 읽었어도 다섯 권의 흐름 속에서 보니 역시 의미가 더 풍부해진다. 2011년 <나도 편식할 거야>(사계절)와 2013년 <나도 예민할 거야>에 이어 약 10년 만인 2022년에 <나는 기억할 거야> <나는 망설일 거야> <나는 따로 할 거야>를 몇 달 간격으로 출간했다. 인기있는 동화가 시리즈로 출간되는 요즘의 출판 경향과 아마도 관련 있을 듯하다. 그런 출판 경향은 우려되는 점이 없지 않지만 1, 2권에서 주인공 정이의 매력에 푹 빠졌기 때문에 10여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1학년인 정이를 다시 만날 수 있는 게 반갑기만 하다. 동시에 5권으로 산뜻하고 단호하게 완간한 것도 정이와 잘 어울리는 결정 같다.

<나는 망설일 거야> 중

정이는 다르다

정이가 대체 어떤 어린이기에. <나도 편식할 거야> <나도 예민할 거야>라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정이는 편식도 안 하고, 예민하지도 않은 어린이다. 몸과 마음이 모두 씩씩하고 건강한 정이는 지금까지 동화의 여성 어린이 캐릭터와 좀 다르다. 여성 어린이 캐릭터는 대개 똑똑하고, 공부 잘하고, 야무지고, 섬세하고, 신중하고, 내향적이고, 올바르고, 따듯한 편이다. 사회가 여성의 특성을 지금까지 그렇게 규정했듯 말이다. 하지만 정이는 이분법적 젠더 편견에서 벗어나 종횡무진한다. 아직 통제에 길들여지지 않은 1학년이어서만은 아니다. 정이여서 그렇다. <나도 편식할 거야>는 이렇게 시작한다.

된장찌개는 맛있다. 밥에다 비벼 먹으면 최고다.

“우리 정이 복스럽게도 먹는다.”

나는 날마다 칭찬받는다.

“예쁜 우리 딸, 아무거나 잘 먹는 우리 딸.”

나는 날마다 사랑받는다.

아무거나 잘 먹어서 사랑받는다.

- <나도 편식할 거야>, 7면

문체가 먼저 눈에 띈다. 한글을 처음 읽기 시작한 어린이 독자의 문해력을 고려해 문장이 짤막하고 리듬감이 있다. 짧은 문장으로 서사를 이어가는 게 사실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다. 짧은 문장일수록 문장의 안팎이 마치 시처럼 섬세하고 풍부한 의미를 부르도록 고려해야 한다. 군더더기가 전혀 없는 문장에서, 그리고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해석이 일어나 서사를 밀고 가도록 치밀하게 조정된다. 위 인용문에서도 “복스럽게도 먹는다”는 칭찬이었는데 “아무거나 잘 먹는 우리 딸”에서는 작은 물음표가 생긴다. 밥상을 차리는 노고를 덜어주는 자식이니 편해서 좋다, 예쁘다는 건 그저 부모의 입장으로 들려서다. 이어 정이가 “아무거나 잘 먹어서 사랑받는다”라고 설명할 때는 좀 더 불안하고 긴장하게 된다. 정이야, 부모라는 사람들은 가능하면 손쉽게 자녀를 키우고 싶어 할지언정 자녀의 필요에 전적으로 부응하려고 애쓴단다, 라고 굳이 설명하고 싶다. 정이는 밥과 사랑의 관계를 어떻게 알아나갈까.

정이는 “아무거나 잘 먹어서 사랑받는다”의 의미를 채워간다. 허약하고 반찬 투정을 하는 오빠에게만 엄마가 장조림을 주는 걸 보고 “나도 이제 편식할 거다. 아무거나 잘 먹는 딸 안 할 거다”(11면)라고 결심한다. 엄마가 오빠를 혼내며 “아무거나 좀 먹어. 정이처럼”(12면)이라고 말하자 잠시 기분이 좋아졌다가, 자기 몫의 장조림은 끝내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예상에 “나는 장조림을… 못 먹을 거야. 내일도 못… 먹을 거야. 만날 만날… 아무거나 먹을 거야”(15면)라며 울고 만다. 다음날 엄마는 장조림을 새로 잔뜩 만들어 정이에게만 준다. 정이는 “아무거나 잘 먹어서 사랑받는다”고 한 자신의 말이 ‘아무거나 잘 먹기 때문’이 아니라는 걸 정확하게 다시 써 나간다. 밥으로 엄마의 사랑을 판단했고, 사랑받으려고 (정이에게는 무척 힘든 일인) 편식도 불사했지만 엄마의 변함없는 사랑을 확신한다.

유년동화 <나도 편식할 거야>는 어린이의 마음을 간결하게 이야기한다. 어린 나이의 독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간결하면서도 압축적이다. 어른 독자는 압축된 문장에 숨은 역설이나 복선까지 해석한다. 유년동화는 이중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아동문학의 특성을 잘 알 수 있는 텍스트다. 이중독자란, 아동문학의 1차 독자는 어린이지만 어른도 독자일 수 있고 독자로 고려된다는 것이다. 고학년 동화에 비해 유년동화나 저학년 동화는 어린이 독자와 어른 독자의 차이가 크고, 이 차이에서 일어나는 해석의 다양성 또한 확장된다.

아무튼, 이 책에서 정이의 ‘밥 예찬’은 내내 계속된다. 새로운 사건과 장면의 시작이 ‘밥 예찬’이다. 금과옥조처럼 확고한 문장들은 조금씩 변형되고 반복되면서 밥 잘 먹고 튼튼한 정이의 심지를 보여준다.

점심은 김치찌개였다. 김치찌개는 맛있다. 밥에 말아 먹으면 최고다.(11면)

감자탕은 맛있다. 뼈다귀에 붙은 살이 아주 맛있다. 우거지를 밥에 얹어 먹으면 최고다.(21면)

오늘은 보리밥이랑 뭇국이 나왔다. 보리밥은 맛있다. 뭇국에 말아 먹으면 최고다.(29면)

‘보편의 어린이’라는 건 환상일 뿐
어른의 눈으로 함부로 재단 말고
한 명의 주체로, 있는 그대로 보길

어린이는 다 다르다

정이에게는 오빠 혁이가 있다. 1학년인 정이보다 키도 작고 몸무게도 적게 나가는 3학년 오빠다. ‘아무거나’ 먹지 않고, 조금만 시끄러워도 깰 만큼 예민하다. 잘 먹고, 잘 자는 정이의 힘찬 기운이 우선 매력적으로 보이긴 하지만 시리즈를 읽다 보면 혁이의 마음 또한 살피게 된다. 별로 먹고 싶은 생각이 안 드는데도 성장과 건강을 위해 억지로 먹어야 하고, 잦은 병치레로 동네 소아과와 이비인후과의 ‘단골’이 되고, 밤에 잠까지 잘 못 자는 혁이 본인은 이 모든 게 얼마나 고역일까.

<나는 따로 할 거야>에 실린 ‘단골은 쓸쓸해’에서 병원이라고는 예방 접종 외에 간 적 없던 정이가 갑자기 귀가 아프자 혁이는 돌연 자상한 오빠로 변신해 정이를 ‘단골’ 이비인후과에 데려간다. 정이의 증상이 약도, 주사도, 주의사항도 필요 없는 귀지 때문이란 걸 알게 되자 혁이는 왠지 쓸쓸한 모습이다. “엄마, 단골은 쓸쓸해. 아프면 함께하려고 했는데… 내 손을 잡아 주려고 했는데… 내가 금방 나아서. 그리고… 오빠는 나으려면 오래 걸려서.”(<나는 따로 할 거야>, 28면)

나는 따로 할 거야 유은실 지음 | 김유대 그림 | 사계절 | 2022년

이 유년동화 시리즈는 잘 먹고, 잘 자는 정이와 못 먹고, 못 자는 혁이를 모두 따듯하게 바라본다. 정이에게 혁이처럼 똑똑해지라고, 혁이에게 정이처럼 씩씩해지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정이와 혁이는 다르다. 이 책에서 정이가 아빠를 닮고, 혁이가 엄마를 닮았다고 말하는 건 각자 타고난 바가 있을 뿐 유전자의 우월성 따위는 따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근육량이 많고 면역력이 좋은 정이와 아빠는 겨울에도 공원에 나가 놀고, 근육량을 늘려야 하고 감기에 걸리기 쉬운 혁이와 엄마는 헬스장에 다니기로 한다. “가족이 다 함께 하는 건 소중해”(<나는 따로 할 거야>, 43면)라고 말하던 엄마는 “따로 하는 것도 소중해”(<나는 따로 할 거야>, 54면)라고 바뀐다. 서로 다른 어린이들이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법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나는 기억할 거야>에 실린 ‘카드뮴은 너무해’에서는 끝말잇기 놀이를 하다 다툰 정이와 혁이에게 엄마가 ‘디 말놀이’를 제안한다. ‘차디찬’ ‘달디단’처럼 가운데 ‘디’자를 넣는 게임인데 사전에 없는 말, 발명한 말도 가능하다. 혁이는 자기가 만든 말 중에 ‘정이디정이’가 제일 맘에 든다고 한다. ‘많이 정이 같다’는 뜻이라고. 정이 역시 “오빠처럼 말해야 할 것 같아”서 ‘오빠디오빠’라고 한다. “‘오빠디오빠’는 여러 가지 뜻이다. 오빠 같은 건 여러 가지니까. 많이 오빠 같은 것도 다양하니까”(<나는 기억할 거야>, 27면). 정이 같은 것과 혁이 같은 것은 다르다. 그리고 정이와 혁이 같은 것 안에도 조금씩 다르고 다양한 정이와 혁이가 있다.

모든 어린이는 다 다르다. 그리고 서로 다른 어린이가 각자 하나의 정체성만을 갖는 것도 아니다. 한 어린이에게도 다양한 특성과 마음이 있다. 하지만 대개 어른은 어린이에게서 ‘보편의 어린이’를 찾으려 한다. 어린이들에게서 각자 다른 점을 보려 하기보다는 어른을 기준으로 해서 어른과 대비되는 어린이들만의 공통된 특성을 찾고 기뻐한다. 어린이가 어른과 다른 점은 분명 있고, 그 점들 상당수는 어른이 본받을 만큼 반짝이며, 그 점이 어린이를 이해하고 존중하고 사랑하는 데 도움이 되는 건 물론이다. 어린이는 아직도 너무 잘 알려지지 않은 존재니까 고요하고 섬세한 눈으로 발견될 필요가 있다.

나는 망설일 거야 유은실 지음 | 김유대 그림 | 사계절 | 2022년

하지만 어린이가 어른과 다른 점만 찬탄하고 그걸 ‘보편의 어린이’로 여기는 일은 어린이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린이다움’이라는 동일하고 고정불변한 속성으로 어린이를 묶는다면 어린이는 그 ‘어린이다움’으로 또다시 억압된다. 정이가 어린이답다고 하든, 혁이가 어린이답다고 하든 소외된 어린이가 생기기 마련이다. 어른을 두고 ‘어른다움’으로 묶는 일은 흔치 않다. 어른은 자기가 기준이기 때문이다. 어린이는 자기가 기준이 아니고 여전히 어른이 기준이어서 ‘어린이다움’으로 묶인다.

모든 어린이는 다르다. 저마다 다른 어린이들이 모여 ‘어린이다움’을 만든다. 한 명의 어린이를 바라보기보다 ‘어린이다움’을 먼저 찾으려 하고 그걸 두고 손뼉 치면서 혹시 세상에 찌든 어른 자신의 마음을 위무하고 싶은 건 아닌지 되돌아보자. 그럴 때 어린이는 어른의 자기반성으로 세워진 주체가 아닌 오직 존재만으로 당당하고 자유로운 진짜 주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김유진



아동문학평론가·동시인. 동시집 <나는 보라> <뽀뽀의 힘>, 청소년시집 <그때부터 사랑>, 아동문학평론집 <언젠가는 어린이가 되겠지>를 출간했고, ‘토닥토닥 잠자리 그림책’ 시리즈를 썼다.

아동문학 작품 속에서 어른과 어린이가 좀 더 자주 만나고, 좀 더 가깝게 이어지는 날이 올 수 있기를 바란다.

김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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