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구에도 출구에도 내 ‘의지’는 없었다[시설사회]
한국 복지서비스, 거주시설로 귀결
이웃과 함께 사는 삶 보장되지 않아
80년대나 지금 수용자들의 공통점
“시설 안 아닌 밖의 삶 살고 싶었다”
혼자 생활할 수 없는 장애인이 있다. 가정폭력으로 집을 나온 청소년이 있다. 어린 나이에 홀로 아이를 낳은 엄마가 있다. 그런데 이들은 ‘우리’ 곁에 없다. ‘우리’가 사는 ○○동 ○○빌라, ○○아파트 대신 장애인거주시설, 청소년쉼터, 한부모시설이라고 이름 지어진 곳에 있다. ‘우리’와 다른 ‘그들’은 옆집에 사는 이웃으로 만날 수 없다. 있지만 없는 존재다.
한국은 모든 복지서비스가 거주시설로 귀결되는 ‘시설사회’다. 나만의 공간에서 이웃과 함께 사는 삶을 선택할 권리는 좀처럼 보장되지 않는다. 대신 사회복지 거주시설의 입소자가 돼 ‘보호’를 받을 수 있을 뿐이다.
지역사회와 분리된 거주시설에서 취약층의 돌봄과 주거를 도맡는 복지체계가 ‘우리’와 ‘그들’이라는 경계를 만들었다. 2020년 장애여성공감이 펴낸 책 <시설사회>는 “보호소(시설)는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노동시장으로부터 밀려난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가 아니다. 국가가 취약한 시민을 지원하기 위해서 만든 정책이 오히려 사회로부터 배제와 고립을 만드는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무능력’하고 ‘취약’한 사람이 집단으로 모인 공간에서 자연스레 입소자와 종사자의 위계가 만들어지고, 단체생활을 위한 규율과 감시와 통제가 잇따른다.
형제복지원처럼 거주시설이 직접적인 폭력의 도구인 시대는 지났지만, 여전히 시설에는 폭력과 학대의 위험성이 내재한다. ‘나쁜’ 시설과 ‘좋은’ 시설을 나누는 건 의미가 없다.
경향신문은 1980년대부터 2020년대까지 각기 다른 시간에 다른 시설에서 살았던 6명을 만났다. 이들은 때로는 뒤틀린 표정과 손짓으로, 반짝이는 눈으로, 끔찍한 한숨으로, 명료한 언어로, 자조 섞인 웃음으로 ‘시설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공통점은 처음부터 시설에 살고 싶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 모두 선택할 수 있다면 ‘시설 밖’의 삶을 살고 싶었다고 했다.
내 선택이 아니었던 25년, 20년, 30년
30년 전 이정화씨(65·가명)에게 시설은 “죄짓고 들어간 감옥”과 같았다. 정화씨는 1998년 세상에 드러난 충남 ‘양지마을’ 사건의 피해자다.
부랑인을 강제로 수용해 학대를 일삼았던 양지마을에서 정화씨는 15년을 살았다. 정화씨는 양지마을과 같은 법인 산하 부랑시설 성지원에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버스를 타라고 해서 탔더니 양지마을로 끌려왔다”. 16세에 가족과의 불화로 집을 나온 정화씨가 25년 동안 거친 5개의 시설은 모두 파출소 경찰, 구청 직원, 시설 관계자에게 납치되고 끌려간 곳이었다.
납치와 협박은 없어졌지만, 지금도 시설 생활은 ‘타인에 의한 입소’로 시작된다. 가정폭력과 학대에 시달렸던 17세의 윤서희씨(25·가명)가 “나를 이렇게 계속 때릴 거면 더 같이 못 산다”고 선언하자 부모가 제시한 ‘대안’은 시설행이었다.
돌봄에 대한 책임이 가족에게 전가되는 장애인은 더 많이 ‘가족에 의해’ 시설행이 결정된다. 고열로 4세 때 뇌병변 장애를 얻은 최동운씨(44)는 6세에 엄마 손을 잡고 서울 은평구의 한 보육시설로 갔다. 동운씨는 “가기 싫어서 울었는데 아버지가 보내라고 해서” 간 시설에 20년을 넘게 살았다. 서울 송파구의 발달장애인 시설에서 30년을 넘게 산 강동철씨(41)도 처음엔 “아기씨(아기) 때 원장님이 ‘좋은 데’ 간다고 해서 따라갔다”고 했다. 2019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실시한 중증·정신장애인 시설 생활인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장애인거주시설의 비자발적 입소 비율은 67%다.
감시와 통제의 ‘집 아닌 집’
사회복지시설의 형태는 다양하다. 건물 전체를 기숙사처럼 통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상가의 한 층에 세들어 있는 곳도 있다. 때로는 빌라와 같은 가정집을 개조해 쓴다. 구조와 모양은 달라도 공통점은 있다. 여러 사람이 한 공간을 함께 쓴다. 양지마을은 많게는 50명이 한방을 썼다. 서희씨는 2층 침대가 4개 있는 한방에서 8명이 함께 지낸 적도 있다고 했다. 화장실은 한 층에 하나뿐이었다. 동철씨는 4명이 한방을, 동운씨는 5명이 한방을 썼다.
단체생활엔 규칙과 제약이 따른다. 모든 일과가 군대식이었던 양지마을에서 정화씨는 오전 6시에 일어나 구보를 하고 군가 수업 후 7시에 아침을 먹었다. 12시간 강제노역 후엔 3~4시간 남짓을 자고 또 하루가 시작됐다. 동철씨는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예배에 참석해야 했다. 서희씨가 지냈던 한 청소년쉼터에선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정해진 저녁 시간을 넘겨 들어오는 날이면 쫄쫄 굶어야 했다. 일과 시간 이외에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동철씨와 서희씨 모두 자는 시간에는 화장실도 마음대로 가지 못했다. 시설은 ‘정해진 시간 안에 정해진 일을 해야만’ 살 수 있는 곳이었다.
규칙을 지키지 않았을 때의 대가는 혹독했다. 그 시절 정화씨는 ‘공포의 골인소대’로 끌려가 반나절 내내 유격훈련과 ‘한강철교’(떨어져 있는 두 책상에 각각 팔과 다리를 짚고 엎드린 모양) 얼차려를 받았다.
시대가 바뀌고 물리적 폭력은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감시로 변모했다. 동철씨가 지냈던 장애인시설에선 밤에 몰래 방 밖을 나간 입소자 목록을 컴퓨터에 일지로 정리한 후 원장에게 보고했다. 서희씨가 있던 한 청소년쉼터에선 폐쇄회로(CC)TV가 없는 곳에서 옷을 갈아입지 못하게 했다.
‘맛’이 없거나 ‘재미’가 없거나
“반찬 맛도 없어요. 닭 핏줄이 튀어나오고… 그걸 먹어요. 반찬이 잘 안 익었어. 애들이 다 토하고 난리 났었어요. 못 먹어요, 아휴.” 동철씨에게 시설의 식사는 최악이었다. ‘의식주’의 질은 오롯이 시설의 재량이었다. 서희씨가 지냈던 청소년 단기 쉼터들은 대부분 먹을 게 모자랐다고 했다. 양껏 먹지 못하니 배고파 잠을 못 자는 사람도 많았다. 배달이나 외식은 당연히 금지됐다. 최대한 입소자들에게 잘해주려고 했다는 ‘좋은’ 쉼터도 식비가 부족해 주말마다 라면을 끓여줬다. 먹는 건 “무조건 선착순”이었다.
의식주 외의 생활도 시설에 맞춰지곤 했다. 이동이 자유롭지 않은 동운씨는 휠체어를 밀어줄 보육교사가 “학교에 가지 말라고 해서” 19세에야 한글을 깨쳤다. “교회에서 봉사자가 오면 얘기하고 예배드리고, 프로그램 있으면 나가고. 프로그램 없으면 잠만 자고.” 동운씨의 20년은 한 줄로 요약됐다. 동운씨는 시설이 ‘지옥’이라고 했다.
종사자라는 권력 아래 놓인 입소자
규칙 지키지 않으면 밤새 ‘얼차려’
임신중단 강요에 아이 지우기도
시대 변해도 내재된 폭력성은 여전
종사자의 ‘나쁜’ 권력
‘개과천선. 성실하게 생활하자.’ 정화씨는 양지마을의 원훈을 두고 “개같이 살아야 한다는 건가. 나는 사람인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뜻도 모르는 원훈을 매일 아침 달달 외운 이유는 원훈을 외우지 못하면 “머리를 빡빡 깎아서” 골인소대로 보냈기 때문이다. ‘개과천선’이라는 노골적인 원훈이 없어도 시설 입소자들은 ‘착하게’ 살려고, 정확히는 종사자의 눈 밖에 나는 일이 없게 하려고 노력한다. 가족이 없거나 가족이 버린 입소자들에게 종사자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존재다.
2021년 장애여성공감이 펴낸 잡지 ‘마침’은 “시설은 가족을 대리하는 역할을 수행한다”며 “가부장적 위계질서에서 ‘시설장’은 아버지의 역할을 그대로 수행하는 것이며 시설에 개인을 보호, 대리하는 모든 권한을 위임하는 것”이라고 했다.
서희씨는 쉼터를 나와 자립하기 위해 찾은 자립지원관의 복지사에게 “눈치를 많이 보는 것 같다”는 소리를 들었다. 서희씨의 ‘눈치’는 5년간의 시설 생활을 하면서 길러졌다. 한 쉼터에서는 다른 입소생과 싸움에 휘말리기만 해도 일주일 동안 퇴소해야 했다. “처음에 쉼터에 있을 때는 (복지사 선생님들이) 그냥 감사한 분이었다가 점점 잘 안 보이면 퇴소당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잘 보이려고 쉬는 것 없이 계속 긴장해 있었던 것 같아요.”
이수아씨(25·가명)와 강혜정씨(48·가명)가 지냈던 부천의 한부모시설은 유독 사무국장의 권한이 컸다. “모든 엄마가 국장님한테 잘 보여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굉장히 힘이 컸어요. 잘 보여야 뭐라도 하나를 더 주시니까, 엄마들 간의 경쟁인 거죠.”
시설의 구조는 폭력과 학대에 취약하다. 만약 그 한 명의 종사자가 ‘나쁜’ 사람이라면 입소자들은 무방비로 당할 수밖에 없다. 동철씨가 지냈던 장애인시설은 “말 안 들으면 손이 올라갔다”고 했다.
동운씨는 같은 방 ‘형들’에게 여러 번 성폭행을 당했지만 적극적인 조치가 이뤄지지 않았다. 정화씨가 있었던 양지마을에선 폭력으로 입소자들이 진짜로 죽어 나갔다. 죽은 입소자는 인근의 ‘개미고개’라는 곳에 “얕게 묻혔다”.
직접적인 폭력 없이 ‘친밀한 관계’를 이용해 부당한 일을 당하는 예도 있다. 수아씨는 국장의 ‘투잡’이었던 다단계 판매에 동원됐다. 고가의 다이어트약을 산 후 환급을 요구했지만 “그렇게 나약해서 살을 어떻게 빼냐”는 말과 함께 거절당했다. 시설의 ‘비누 만들기’ 프로그램에서 수아씨와 다른 엄마들이 만든 비누는 국장의 개인 쇼핑몰에서 판매됐다. 임신 후 “애를 지우지 않으면 퇴소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땐 어쩔 수 없이 임신중단 수술을 해야 했다.
“시설 밖에선 잘 살 수 없는 네 탓”
타인의 손에 이끌려 한 입소 때처럼
퇴소 역시 ‘탈시설의 권리’는 없어
수용되는 삶, 스며드는 삶
의지가 있어도 쉽게 시설을 나갈 수 없었다. 현재 정책 체계에서 입소자의 탈시설 여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시설장의 판단’이다. 시설은 입소자의 탈시설을 권리보다는 ‘능력’을 전제로 판단한다. “너 나가서 먹고살 수 있어? 나가서 일할 수 있어? 못 살아. 나가면 죽는다고.” 동철씨가 ‘나가고 싶다’고 했을 땐 차가운 대답이 돌아왔다.
서희씨도 쉼터에서의 스트레스로 나가고 싶다고 하자 “넌 서른 돼도 자립 못한다. 네가 나가서 뭘 할 수 있을 것 같냐. 얌전히 여기 있을 수 있을 때 있어라”라는 말을 들었다.
시설의 문제는 ‘시설 밖에선 잘 살 수 없는’ 입소자들 탓으로 돌아간다. <시설사회>는 “장애인시설, 미혼모시설, 요보호시설 등은 내가 사는 지역에서 공존하고 싶지 않은 대상이 누구인지를 적극적으로 호명하는 기제로 작동해왔고, 어떤 이가 시설에 고립되는 원인을 존재에 내재한 문제로 만들어왔다”고 지적한다.
잘 살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시설로 가는 게 당연한 걸까. 또 시설 밖의 사람들은 모두 ‘잘 사는’ 사람들인 걸까. 서희씨는 선택권을 달라고 했다. “한 건물을 취약계층이 사는 곳이라고 해버리면 주변 사람들은 되게 안 좋은 시설이라고 생각하잖아요. 큰 집 바라는 것도 아니거든요. 그냥 남들 사는 곳에서 중간중간에 끼어 있는 일상을 살고 싶어요. 다른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삶을 살고 싶어요.”
민서영 기자 min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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