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폭의 기억, 그리고 ‘더 글로리’
[편집국에서]
[편집국에서] 김경욱 | 스페셜콘텐츠부장
‘나 때는 어땠지?’
학교폭력(학폭) 문제를 다룬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를 보다가 문득 생각했다. 주인공 동은이 가해 학생 무리와 담임에게 극심한 폭력을 당하는 장면에서다. 그러다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오랜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중학생 때의 일이다.
“머리 봐라.” 두발검사를 하던 학생주임이 내 앞머리를 움켜쥐고 사정없이 흔들며 말했다. 그의 손이 수차례 스쳐 간 양쪽 뺨은 벌겋게 부풀어 있었다. “엥~” 하는 ‘바리캉’(전기이발기) 소리와 함께 잘린 머리카락이 눈앞에서 우수수 떨어졌다. 학생들의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학생주임은 머리카락 길이가 3㎝를 넘는다는 이유로 두피가 훤히 드러나도록 내 앞머리를 모두 밀어버렸다. 그가 마구 헤집어놓은 머리를 만지며, 처음으로 가슴속 나사 하나가 ‘탁’ 풀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모멸감, 수치심 그런 감정이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벌게진 얼굴로 ‘고작 머리카락일 뿐이다’라고 수없이 되뇌었지만, 풀어진 나사는 조여지지 않았다. 그가 자른 것은 내 머리카락만이 아니었다. 내 안의 무언가도 함께 잘려나갔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것은 아마도 내 ‘존엄’이었다고, 지금의 나는 생각한다.
그날, 옆 반 친구 하나도 나처럼 앞머리카락 모두를 잃었다. 그를 보며 ‘쟤도 나랑 같은 마음이겠구나’라고 잠시 생각했다. 묘한 위로와 동질감 같은 것을 느꼈다. 이튿날 그 아이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네’라는 생각이 들 때쯤, 그 아이 책상 위로 새하얀 국화꽃이 하나둘 놓였다. “무슨 일이야?” 까닭을 묻는 내게 그와 같은 반 친구는 말했다. 그 아이가 괴롭힘을 당해왔고, 학생주임에게 앞머리가 잘리던 날도 누군가에게 심하게 맞았으며, 그날 집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고.
당시 우리에게는 학교나 사회에 문제 해결을 요구할 종합적 판단 능력이 없었다. 학교는 ‘이걸 대체 쓸 일이 있을까’ 싶은 인수분해를 가르치고 “수헬리베붕탄질산” 원소주기율표를 달달 외우게 하면서도, 정작 인간을 사랑하는 법이나, 친구의 죽음 앞에서 어떻게 슬퍼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친구의 죽음은 금세 잊혔다. 3㎜였던 앞머리가 3㎝도 채 되기 전에 학생주임 손에는 다시 바리캉이 쥐어졌고, 학교 어딘가에선 누가 누군가에게 맞았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학폭에 시달리던 <더 글로리>의 동은도 내 중학교 친구처럼 죽음을 생각한다. 하지만 동은은 끝내 살아가는 길을 택한다. 바로 ‘꿈’ 때문이다. 그 꿈은 다름 아닌 복수다. 학교를 자퇴하면서 18살 동은은 자신을 끔찍하게 괴롭힌 연진 앞에 서서 처연하게 말한다. “오늘부터 내 꿈은 너야. 우리 꼭 또 보자.” 그리고 36살이 될 때까지 온 생을 걸어 처절한 복수를 준비한다.
학폭 가해자를 응징하는 복수극은 드라마 소재로서는 매력적일지 모르나, 현실은 드라마가 아니다. 사적 복수는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현행법상 자력구제는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학폭으로 많은 아이가 스러지고 있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가 갖는 미덕은 다소 허술한 개연성에도 학폭 피해자의 고통스러운 시간에 집중하고 공감할 수 있게 한다는 점이다. 동은의 복수에 ‘피해자의 연대’를 더했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동은의 조력자 현남과 여정은 각각 가정폭력 피해자와 강력범죄 피해자 유가족이다.
“피해자들의 연대와 가해자들의 연대는 어느 쪽이 더 견고할까?” 극 중 동은이 연진을 향해 건네는 이 독백은 이태원 참사 등이 발생한 작금의 대한민국에 던지는 물음 같기도 하다.
이번 드라마를 쓴 김은숙 작가는 지난달 제작발표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학폭 피해자는 폭력의 순간에 눈에 보이지 않는 존엄이나 명예, 영광 같은 걸 잃게 되는데, 가해자의 진심 어린 사과를 받아야, 거기서부터 (피해자의 시간이 다시) 시작된다고 생각해서 제목을 <더 글로리>(영광)로 지었다.” 이는 비단 수십년 동안 반복되고 그 피해가 더욱 심각해진 학폭에 국한된 얘기만은 아니리라. 젠더폭력, 국가폭력, 강력범죄, 사회적 참사 등 억압과 폭력에 짓눌린 모든 피해자와 유가족의 마음 또한 그렇지 않을까.
da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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