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의향의 스타일노트 <30>] 비비안 웨스트우드, 별이 되어 떠난 저항과 반항의 아이콘

김의향 2023. 1. 16.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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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브랜드 광고 캠페인에 등장한 비비안 웨스트우드. 2 비비안 웨스트우드 패션쇼의 나오미 캠벨. 3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시그니처인 타탄체크 룩. 4 왕관과 지구를 모티브로 한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로고. 5 환경 운동을 펼치는 비비안 파운데이션. 사진 인스타그램

펠레, 바바라 월터스, 베네딕토 16세 등 수많은 별이 떠났던 한 주. 그 라스트 리스트에 비비안 웨스트우드 이름이 올랐다. 12월 30일 비비안 웨스트우드 패션하우스는 공식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남부 런던의 자택에서 가족이 지켜 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 비비안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라는 애도의 글을 올렸다.

가수 지드래곤은 “살기엔 너무 빠르고, 죽기엔 너무 어리다(Too fast to live, Too young to die)”는 말콤 맥라렌의 명언으로 슬픔을 공유해 화제가 됐다. 지드래곤의 애도처럼 비비안은 81세 나이에 떠나기에 젊었다. 나이의 숫자만 증가했을 뿐 그녀의 혁명적인 디자인과 행동주의는 데뷔 이후 한결같았고, 어떤 청춘보다 열정적이었기 때문이다.

비비안 웨스트우드에 대한 정의는 2018년 공개된 그녀의 전기 다큐멘터리 타이틀 부제인 ‘비비안 웨스트우드: 펑크, 아이콘, 액티비스트’에서 볼 수 있다. 다큐멘터리는 비비안 웨스트우드를 ‘펑크록의 귀부인, 한때 정부 공작원이자 영국 패션의 대모, 환경 의식이 강한 부디카 여왕 그리고 현대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창작자 중 한 명’이라고 요약한다. 비비안은 대중이 흔히 갖는 패션 디자이너의 삶을 살아오지 않았다. 디자이너라기보다 전사이며 투사에 가까웠다.

1941년 4월 8일 영국 더비셔주 글로숍에서 태어난 비비안은 어릴 때부터 패션에 관심이 많았는데, 특히 크리스천 디올의 뉴 룩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십대 시절에는 종종 자신의 옷을 직접 만들어 입었는데, 학교에서도 교복을 펜슬 스커트(pencil skirt·통이 좁은 직선형으로 몸에 슬림하게 붙는 연필처럼 홀쭉한 스커트)로 수선해 입었다. 그녀는 레오파드 패턴의 벨벳 팬츠, 직접 만든 스커트에 짧은 양말과 스틸레토 힐(stiletto·앞 코가 뾰족하고 굽이 높고 가느다란 하이힐의 일종)로 그녀만의 룩을 연출해 입고 다녔다. 말콤 맥라렌은 ‘형형색색의 공작이며 걸어 다니는 신호등’ 같았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비비안은 1962년 진공청소기 회사의 견습생 데릭 웨스트우드와 결혼하며 웨스트우드란 성을 갖게 됐지만, 65년 남편과 이혼했다. 그리고 말콤 맥라렌을 만나며 패션 디자이너로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말콤 맥라렌은 당시 기성세대와 주류 문화를 비웃는 문제아이자 반항아였는데, 그와 함께 1971년 아웃사이더를 위한 첫 번째 매장 ‘렛 잇 록(Let it Rock)’을 첼시 킹스로드에 오픈하게 된다. 그리고 펑크 록의 여왕으로 대담하고 거침없는 와일드한 패션 디자이너 라이프가 시작된다.

1972년 제임스 딘에게 영감을 받아 ‘Too Fast to Live, Too Young to Die’로 이름을 변경하고 록 스타일 의상을 판매했다. 1974년에는 ‘SEX’로 이름을 다시 바꿔 본디지 룩(bondage look·스트랩 끈으로 몸을 묶은 듯한 디자인), 찢어지거나 비대칭의 펑크 룩을 선보여 런던 펑크족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 펑크족 사이에서 몇 명을 모아 말콤 맥라렌이 매니저가 되어 만든 밴드가 그 유명한 펑크 록 밴드 ‘섹스 피스톨즈(Sex Pistols)’이다.

비비안 웨스트우드와 말콤 맥라렌은 이들의 스타일링을 담당하며 펑크 룩이 패션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러나 1983년 겨울 컬렉션을 마지막으로, 말콤 맥라렌이 너무 상업적이기만 하다는 이유로 두 사람은 각자의 길을 가게 된다. 비비안은 비즈니스 파트너 카를로 디마리오를 만나 이탈리아로 기반을 옮겼고, 1984년 10월 파리에서 발표한 ‘미니 크리니’ 컬렉션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비비안은 발레 ‘페트루시카’에서 영감받아 빅토리아 시대 드레스의 상징인 크리놀린(crinoline·스커트를 부풀리기 위해 철사나 고래 뼈로 만든 속옷)을 작게 변형시킨 ‘미니 크리니’를 창작했다. 미니 크리니와 연출된 커다란 폴카 도트(polka dot·물방울 무늬) 스커트와 플랫폼 슈즈(platform shoes·통굽 슈즈) 등을 선보였는데, 1980년대 유행했던 여피(yuppie·1980년대 주류를 이뤘던 젊은 도시형 전문직 계층)의 파워 슈트(power suit·어깨 패드를 강조한 슈트)에 반대되는 도전이었다. 1987년 런던으로 돌아온 비비안은 ‘해리스 트위드’를 발표한다. 영국의 상징인 트위드, 개버딘, 니트와 영국 왕실을 상징하는 요소를 위트 있고 섹시한 스타일로 바꿨는데, 이 스타일이 현재 우리가 아는 비비안 웨스트우드 룩의 시작이다. 1990년대에는 트위드와 타탄체크 등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시그니처가 완성됐다. 이후 반항적인 반체제 메시지를 담은 아이템, 중성적인 젠더리스(genderless) 룩을 통해 그녀의 정치적, 사회적 신념을 담은 사회적 메시지가 있는 패션 세계를 창조해갔다. 이런 개념주의 패션 정신은 영국 왕실에서도 인정받아 1992년, 2006년 두 차례에 걸쳐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영국 패션의 발전 공로를 인정받아 훈장을 수여받았다.

비비안은 패션 디자이너로서뿐 아니라 사회 운동가로서도 거침없고 반항적이었다. 2000년대 중반부터 비비안은 기후 위기에 초점을 맞춘 캠페인을 시작했는데, 2015년 그녀가 탱크를 몰고 옥스퍼드셔에 있는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의 집을 찾아가 시위를 벌인 사건은 전설이 됐다. 스텔라 매카트니 같은 동물 보호자들과 함께 모피 소매 판매를 금지하는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했다. 그밖에 미국의 기밀을 폭로한 위키리크스 설립자 ‘줄리언 어산지’를 공개적으로 지지했고, 최근에는 반 고흐 작품에 음식 테러를 벌인 기후 시위대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비비안은 시대를 대표하는 스타일 아이콘이자 패션 디자이너이며 동시에 정치, 사회, 환경 운동가로서 치열하고 열정적인 삶을 살아왔다. 자신이 만들고 싶은 걸 만들고, 하고 싶은 말을 하고, 행동하고 싶은 것을 행동한 비비안 같은 실천주의적 패션 디자이너는 없을 것이다. 저항과 반항, 혁신의 아이콘이자 영국 패션의 한 DNA를 이룬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정신과 스타일은 이제 역사가 됐다.


▒ 김의향
패션&스타일칼럼니스트, 케이노트(K-note)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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