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을지로 풍경'…정재호 작가 개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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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주상복합 아파트인 세운상가가 있다.
지난 몇 년간 세운상가 등에 올라 그 주변의 풍경을 그리는 화가 '정재호'가 있다.
정재호는 세운상가를 오르고 또 오르며 풍경을 그렸다.
초이앤초이는 정재호의 을지로 풍경을 모은 전시 '나는 이곳에서 얼마나 오랫동안'(How long have I been here)를 오는 2월25일까지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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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떻게 '이걸 본다'는 것 지우고, 다 지워버리고 싶었다"
(서울=뉴스1) 김일창 기자 = 서울 종로구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주상복합 아파트인 세운상가가 있다. 1968년 완공돼 올해 나이 '55세'다. 언제 들어선지 알 수 없는, 세운상가만큼 오래된 낮은 건물들이 세운상가를 둘러싸고 있다. 한때 서울의 대표적 낙후지역인 이곳은 몇년 전부터 카페와 레스토랑이 들어서고, 또 기존의 노포들이 어우러지면서 젊은이들의 성지가 됐다.
지난 몇 년간 세운상가 등에 올라 그 주변의 풍경을 그리는 화가 '정재호'가 있다. 정재호는 세운상가를 오르고 또 오르며 풍경을 그렸다. 2021년 겨울, 세운4구역의 마지막 눈 내리는 모습을 그리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세운상가에 올랐다. 그 풍경을 여름, 폭우가 내리는 날 올라 관찰하고 또 그렸다.
세운상가 5층 데크에서 서쪽을 바라본 장면은 눈이 그칠 무렵의 풍경과 비 오는 여름 오후의 풍경으로 그렸는데 서로 다른 '적막함'을 담고 있다. 대림상가의 동쪽에 있는 건물 옥상에서 바라본 을지로의 전망은 늦가을 해가 뜰 무렵 풍경으로 다시 그렸다. 지난해 12월 새로 발견한 대림상가의 외부 계단에 올라 폭설이 내리는 풍경을 더 높은 시점에서 조망한 그림은 이번 작업의 마지막 그림이 됐다.
정재호가 이곳을 찾을 때마다 '풍경'도 조금씩, 때로는 급진적으로 달라졌다. 소임을 다한 자리에는 '재개발'의 흐름을 타고, 어느 곳은 전부가 헐리고 공터로 변해 버렸다. 지금 그곳은 높은 가림막이 설치돼 건설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다. 앞으로도 세운구역과 을지로 일대에서는 같은 광경을 반복해서 보게 될 것이다. 정재호는 "실제로도 이 장소는 철거되는 운명 속에서 더는 그릴 수 없는 곳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번에 그린 그림들은 그런 절박함 속에서 마치 시간과 운명을 놓고 경주하듯이 그린 것"이라고 회상했다.
정재호는 그렇다고 이곳을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연민, 그리움 등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으레 재개발 현장을 소재로 한 작품에서 때로는 엿보고, 때로는 직접적으로 거론하는 정치적 함의도 전혀 없다. 본 그대로, 있는 그대로 그릴 뿐이다.
"서울에 자꾸 옛것이 사라지고 재개발되니까 이를 다룬 다큐멘터리나 사진, 그림 등을 보면 투쟁적으로 그려지는 게 있다. 그런데 그런 거 말고 그냥 눈도 오고, 비도 올 때의 모습, 그래서 그 장면이 감수성으로 펼쳐지기도 하고 따뜻하게 펼쳐지기도 하는 여러 모습들, 그리고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갖는 편안함 등을 그냥 보여줘야겠다 생각했다. 내가 어떻게 '이걸 본다'는 것을 지워버리고, 그냥 다 지워버리고 싶었다"
작가의 말처럼 그의 작품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풍경이 존재할 뿐이다. 날 맑은 가을날 동틀 녘 실제로 본 풍경과 작품 속 풍경이 다르지 않고, 그래서 실제와 작품 속 느낌도 다르지 않다.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 정재호는 그만큼 보다 더한 노력을 기울였다. 정재호는 "어떤 풍경을 반복적으로 그리게 됐을 때 그 풍경은 더욱 잡을 수 없는 것이 된다"라며 "마치 가까운 사람의 얼굴일수록 정확하게 재현할 수 없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이어 "풍경의 세부들을 알아갈수록 그것이 하나의 인상으로 환원될 수 없음을, 결국은 그 세부들을 모두 다시 그리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과 같다"고 덧붙였다.
작품 속 풍경은 더는 실재하지 않는다. 점점 더 과거 속으로 멀어져 가는 풍경을 마주하는 작가에게 이 장소와 함께한 자신의 몇 년은 어느새 을지로에 스며들어 어딘가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초이앤초이는 정재호의 을지로 풍경을 모은 전시 '나는 이곳에서 얼마나 오랫동안'(How long have I been here)를 오는 2월25일까지 연다. 전시명은 정재호가 20여년 전 그린 한강 부근의 풍경화에서 따온 것이다. 회화를 통해 기억을 되살리고 과거에 파묻힌 것들을 재발굴하는 작가는 여러 해를 함께 해온 그 풍경에 애도를 표하며 과거로부터 지속되어 온 자신의 마음을 다시 바라본다.
ickim@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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