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슬린 김의 예술법정] 드러낼 권리, 드러내지 않을 권리

2023. 1. 16.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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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그라피티 아티스트 '뱅크시'
정체 숨긴채 세계곳곳 다니며
담벼락에 사회풍자 그림 그려
상업적 이용땐 소송하며 대응
미국 뉴욕 건물에 그려진 뱅크시의 그라피티 작품. 【픽사베이】

'얼굴 없는 예술가.' 영국 그라피티 아티스트 뱅크시의 다른 이름이다.

진짜 이름은 아무도 모른다. 뱅크시는 1990년께부터 이름과 얼굴을 숨긴 채 세계 곳곳을 누비며 담벼락 등에 사회 풍자적 예술 작업을 해왔다. 왜 드러내지 않을까. 예술은 공유돼야 한다는 철학, '자본화된 예술'에 대한 저항이다. 당연하게도 그에게 "저작권은 루저들을 위한 것(Copyright is for losers)"일 뿐이다. 예술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독점되고 상업화돼서는 안 된다.

상업주의자가 가만히 있겠는가. 한 연하장 업체가 뱅크시 작품들을 이용해 연하장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뱅크시는 작품을 공유하자고 한 것이지, 사유화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2019년 상표권 분쟁이 시작됐다. 먼저 뱅크시는 '페스트 컨트롤(Pest Control)'이라는 일종의 에이전시를 통해 저작물의 무단 사용을 막기 위해 작품 이미지들의 상표를 등록했다. 나아가 상품을 제작 판매할 목적으로 상표를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작품을 이용한 상품을 판매하는 '한시적' 팝업스토어도 열었다. 이쯤 하면 연하장 업체가 물러서야 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연하장 업체가 유럽연합지식재산청(EUIPO)에 뱅크시(페스트 컨트롤)의 상표권이 무효라는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법은 상식이라는데, 뱅크시의 손을 들어줬을 것이라고 예상할 것이다. 2021년 9월 EUIPO는 뱅크시의 상표권 등록이 무효라고 결정했다. 연하장 업체의 승리였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상표권의 취지는 소비자가 상품 출처를 알 수 있도록 한 것인데, 뱅크시는 그저 타인의 상표 등록이나 사용을 막겠다는 악의적 이유만으로 상표를 등록했다는 것이다. 풀어 쓰자면 상표의 본질적 기능인 '출처 표시'로 사용할 생각이 없이, 그저 타인의 이용을 금지하고 독점적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저작물을 상표로 등록했다면 이는 무효라는 것이다. 둘째, 뱅크시의 권리를 대리한다는 페스트 컨트롤은 실제 저작권자가 아니며 뱅크시에게서 저작권을 넘겨받았다는 어떠한 증명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정으로 뱅크시의 저작물들은 맘껏 상업적 이용이 가능한 위기에 빠졌다. 해법은 뱅크시가 직접 나타나 권리를 주장하면 됐다. 그런데 그랬을 때는 뱅크시의 예술 철학과 예술가적 정체성이 위기에 빠진다. 소송은 단순히 상표권에 대한 권리 주장의 문제가 아니었다. 예술가적 양심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에 대한 논쟁이자, 역사적 권리인 '익명성'에 대한 논란이다. 익명의 권리는 보호받을 수 있을까.

두 해가 바뀌고 난 올해 1월 항소심 결정이 내려졌다. 이번엔 뱅크시의 승리였다. EU 항소위원회는 페스트 컨트롤의 상표권 출원이 상표를 이용할 의사가 없는 행위라는 연하장 업체 측 주장은 증명이 부족하다고 했다. 이로써 뱅크시의 존재와 철학은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됐다. 자신을 드러낼 권리가 있는가 하면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을 권리도 있다. 드러내지 않고자 하는 이에게 드러내라는 강요는 폭력이다. 다만 이 또한 양심과 철학, 좁게는 책임원리에 기반해야 한다.

[캐슬린 미국 뉴욕주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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