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기의 D사이언스] "미래 내다보는 준비 없이는 `포스트 누리호·다누리` 없다"
대학생때 과학잡지 연재·로켓 단행본도
항우연, 초기 3∼4명으로 로켓엔진 연구
무에서 시작 '액체로켓 연구' 고난의 연속
1998년 北 광명성 1호 계기 韓 예산 증액
2000년 13t 제작 후 엔진 폭발 우여곡절
KSR-3 발사 성공 후 완전기술자립 달성
우주기술은 국가 안보·국민 생존과 직결
경제성 떨어진다고 투자 축소 절대 안돼
이준기의 D사이언스 채연석 전 한국항공우주연구원장
책 두 권을 펼쳐 보여줬다. 한 권은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연재한 '로케트 이야기'라는 과학잡지였고, 다른 한 권은 '로케트와 우주여행'이라는 책이었다. 색이 바랜 책 뒷면을 보니 출판연도가 1972년이었다. 지금부터 정확히 51년 전 나온 책들이었다.
대학교 2학년 때 과학잡지에 실은 원고를 모아 출판한 책이 컬러 표지의 '로케트와 우주여행'이다. 과학잡지를 본 학생 독자들이 자발적으로 "단행본으로 만들어 달라"고 잡지사에 편지를 보내 책으로 만들게 됐다는 사연을 들려줬다.
그러나 갓 20살을 넘긴 대학생의 글을 책으로 내겠다고 나선 출판사는 없었고, 직접 출판사 물색에 나섰다. 한 출판사에 '왜 내가 책으로 출판해야 하는지'를 편지로 써서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출판사 사장이 연락을 해 왔고, 흔쾌히 출판을 승낙했다. 이서령 범서출판사 대표다. 책이 나온 뒤 이 대표는 "내가 당신의 편지를 받고 왜 책을 내기로 했는지 아느냐"라고 물었다.
그러면서 "내 형이 쓴 책을 내서 돈을 좀 벌었는데, 학생이 쓴 글을 읽어보니 우리나라 과학의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할 것 같아 이윤에 상관없이 책으로 내기로 결정했다"고 출판 사연을 전했다. 이서령 대표의 형은 고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이다.
책은 나오자마자 '정부 우수 도서'로 선정돼 정부가 무려 1000권을 사 줬고 청소년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출판사는 초판이 나온 지 얼마 안 돼 재판(再版)을 찍는 뜻하지 않은 횡재를 맞았다.
'로켓박사'로 널리 알려진 채연석 박사(전 한국항공우주연구원장)와 로켓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칠순을 넘긴 지금도 로켓은 평생의 친구로 그와 함께 하고 있다. 채 박사는 항우연에서 과학로켓 KSR-Ⅰ, KSR-Ⅱ, KSR-Ⅲ의 설계, 제작, 발사를 주도하며 우리나라 로켓 개발의 길을 만들어 왔다. 나로호 개발사업, 나로우주센터 건립 등을 기획하며 세계 7대 우주강국의 초석을 놓는 역할을 했다. 현직에서 은퇴한 후에는 우리나라 전통 화포와 거북선을 복원하기 위한 연구에 매달리고 있다.
대담=이준기 ICT과학부 차장
◇어릴적 美 아폴로 계획 접한 후 '로켓박사' 꿈꿔=채 박사는 어린 시절, 인류를 달에 보내기 위한 미국 NASA(항공우주국)의 '아폴로 계획'을 접하고는 그야말로 로켓에 꽂혔다. 초·중·고교에서 로켓 관련 책은 무조건 탐독했고 자료도 모았다. 로켓에 대한 관심은 대학 진학 때까지 이어졌고, 그의 머릿속에서 단 한 번도 지워진 적이 없었다.
그는 "미국 아폴로 계획을 TV로 보며 나중에 우리나라도 잘 살게 되면 로켓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라는 강한 확신을 갖고 학창 시절부터 미래를 위해 로켓 공부를 했다"고 말했다. 이런 노력 덕분에 대학에 입학해 과학잡지에 로켓을 주제로 글을 연재할 수 있었고, 그게 계기가 돼 단행본까지 낸 것이다.
로켓에 대한 진심 어린 애정은 단순히 학업이 그치지 않고 체계적인 연구로 이어졌다. 대학 4학년 때 고려시대 말기 최무선이 발명한 로켓무기인 '주화(走火)'가 우리나라 최초의 로켓이고, 이를 바탕으로 조선 세종 때 개량한 것이 '신기전' 로켓이라는 것을 밝혀내 학계를 발칵 뒤집어놨다.
대학원에 진학해선 고체로켓 엔진을 주제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활용한 로켓 연구로 박사학위를 땄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1988년 항우연의 전신인 천문우주과학연구소에 들어가 로켓엔진 개발을 시작하며 본격적으로 로켓박사 길에 접어 들었다.
◇고체로켓 개발과 함께 시작한 '액체로켓 도전기'=1989년 10월 천문우주과학연구소에서 항우연이 독립 연구기관으로 설립됐다. 설립 초기 항우연이 로켓엔진 개발을 시작할 무렵 연구자는 3∼4명밖에 안 됐고 연구비도 거의 없었다. 고체로켓인 'KSR-Ⅰ'과 'KSR-Ⅱ'를 개발하기 시작한 채 박사는 이런 열악한 연구환경과는 무관하게 다른 고민거리에 빠졌다.
그는 "1970년 초부터 박정희 대통령이 미사일 개발에 많은 투자를 해 당시 우리나라는 고체로켓 관련 기술을 상당히 확보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미 미사일 지침에 따른 사거리 제한(탄두 500㎏, 사거리 180㎞) 때문에 고체로켓을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는 대형우주발사체로 활용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면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반드시 액체추진제 로켓 개발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가 위성을 발사할 수 있는 대형 로켓을 개발하려면 고체로켓보다 액체로켓 개발을 시작해야 한다는 확신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액체로켓은 고체로켓보다 개발이 어렵고 국내에서 기술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아 매우 도전적인 목표였다. 이를 잘 아는 동료 연구자들은 "고체로켓이나 제대로 하지, 왜 액체로켓을 하려고 하는냐"며 걱정했다. 그러나 채 박사는 지금 준비하지 않으면 앞으로 액체로켓을 우리 기술로 개발할 수 없다는 생각에 정부와 연구자들을 설득했다.
◇기술·경험 없이 시작한 액체로켓 개발은 '난관의 연속'=우리나라 첫 액체추진제 로켓 'KSR-Ⅲ' 개발은 앞으로 다가올 우주시대를 대비해야 한다는 채 박사의 강한 집념과 혜안이 있었기에 시작할 수 있었다. 여기에 정부는 IMF 외환위기 상황임에도 개발계획을 승인하고 연구비를 지원하며 채 박사에 힘을 실어줬다.
채 박사는 "당시 국내에는 액체로켓 엔진을 시험할 시설과 장소가 없었고 연구자도 30명으로 시작했다. 인프라, 인력 등 모든 측면에서 매우 열악했다"며 "그럼에도 연구자들은 우리 기술로 액체로켓을 만들어 내겠다는 필사의 각오로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고 설명했다.
처음 시도하는 액체로켓 개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기술과 경험 없이 독자 개발을 추진했고, 외국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기에 당연했다. 이렇다 보니 주변에서 액체로켓 엔진 개발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많았다. 그 누구도 성공할 것이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상황이 급반전됐다. 1998년 8월 북한이 대포동 1호에 최초의 인공위성인 '광명성 1호'를 실어 발사하자 정부가 다급해졌다. 2005년까지 우리 발사체로 우리 위성을 우리 땅에서 발사하겠다는 계획을 앞당겨 발표하면서 넉넉치 않았던 액체로켓 예산이 증액돼 1999년 초부터 개발에 탄력을 받게 됐다.
그는 "액체로켓의 모든 부품을 국내에서 개발해야 했고, 로켓의 추력도 당초 6톤급으로 계획했다가 개발이 진행되면서 13톤급으로 늘어나는 등 예상했던 것보다 개발과정은 더욱 어려워져만 갔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채 박사와 연구자들은 온갖 난관을 뚫고 2000년 6월 13톤급 엔진 제작에 성공했다. 이어 연소시험을 위해 러시아로 엔진을 보냈다.
엔진을 본 러시아 연구자들은 "점화도 되지 않을 것"이라며 시험에 나서는 것을 주저했다. 채 박사는 직접 러시아로 날아가 그들을 간신히 설득해 2000년 6월 23일 엔진 점화시험에 처음으로 성공했다. 이후 연소시간을 8초까지 늘리며 액체로켓 완성에 한 걸음 다가섰다.
◇엔진폭발 사고 딛고 단 한번에 '발사 성공' 이끌어=하지만 국내로 돌아와 진행한 시험은 순탄치 않았다. 2001년 엔진 연소시험을 하던 중 압력이 급상승해 엔진이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채 박사와 연구자들은 이대로 주저앉거나 포기할 여유조차 없었다. 사고 원인을 찾아내고 엔진을 다시 설계해 결국 2002년 5월 14일 목표했던 60초 연소시험에 성공했다. 이어 각종 밸브를 포함한 액체추진기관과 로켓 전체에 대한 지상 성능시험도 무사히 마쳤다.
채 박사는 "액체로켓 설계와 제작에 성공한 데 이어 최종적으로 발사 시험만 남겨 놓았다"며 "그 땐 발사시험을 딱 한 번밖에 할 수 없어 나를 포함한 모든 연구자들은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는 절박함과 절실함을 갖고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드디어 2002년 11월 28일, 길이 14m, 직경 1m, 무게 6.1톤의 KSR-3는 발사 후 231초 동안 정상 작동해 79.5㎞를 성공적으로 비행했다. 우리나라가 자력으로 개발한 액체로켓 기술의 성능과 안정성을 확인한 역사적인 날이었다. 그는 "'액체로켓 발사가 성공할 수 있을까'라는 주위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발사에 성공해 액체로켓 설계부터 제작, 발사까지 이룬 쾌거였다"며 "KSR-3 발사 성공을 계기로 '나로호', '누리호' 등 액체로켓 기술을 고도화해 완전한 기술자립을 달성하며 세계 7번째 우주강국에 진입할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우주기술, 미래를 내다보고 지금부터 준비해야"=채 박사는 발사체를 포함한 우주기술은 당장의 가치보다 미래를 내다보고 준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우리나라가 1999년 액체로켓 개발을 시작한 지 23년 만에 누리호 발사 성공으로 자력 발사체 기술을 보유할 수 있었던 것처럼, 장기적 관점에서 미래 지향적인 우주개발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다. 특히 우주기술은 국가 안보, 국민의 생존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국가전략기술 확보 차원에서 지속적인 투자가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우주기술은 경제성이 떨어진다고 해서 투자하지 않아선 안 되는 분야다. 고체로켓에 이어 액체로켓 개발을 통해 발사체 기술을 확보할 수 있었기에 뒤돌아보면 나로호, 누리호 발사 성공뿐 아니라 최근 차세대발사체 개발까지 이어갈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누리호, 다누리 발사 성공을 계기로 우주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기대가 커진 만큼 연구자들도 한층 막중한 책임감을 갖고 연구개발에 매진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아울러 청소년들에게 도전할 꿈과 목표를 우주를 통해 제시하고, 더 나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젊은 인재를 양성하는 한편 그들이 주역이 될 수 있도록 기성 세대들이 응원하고 격려해야 한다고 했다.
채 박사는 "항우연이 내부적으로 (조직개편에 따른 내홍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이 언론을 통해서 알려져 안타깝다. 지금의 난관이 항우연이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한 성장통이 될 수 있도록 리더를 중심으로 조직을 정비하고, 미래의 꿈나무들이 우주에서 마음껏 역량을 펼칠 수 있도록 무대를 만들어 국민적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준기기자 bongchu@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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