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춘추] 일류 국가, 숫자로 말하자
"오직 통계 연구만이 국가를 바르게 이끌 수 있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말했다. 그녀는 영국군 야전병원의 열악한 위생과 병사 생존율의 관계를 통계로 밝혀냈다. 나이팅게일 통계를 기초로 영국은 근대적 의료 개혁에 성공할 수 있었다.
스타벅스는 치밀한 시장 조사를 거쳐 점포를 낸다. 스포츠 선수의 연봉은 경기 기록 데이터에 기초해 설계된다. 정치인들이 금과옥조로 삼는 지표가 GDP 성장률이다. 아일랜드를 점령한 크롬웰이 병사 월급을 주기 위해 실시한 전수조사가 GDP의 기원이다. 기업이든 국가든 조사와 통계가 기본이다.
병원에서 진단이 잘못되면 처방이 어그러진다. 국가 경영의 시작은 현실 진단이다. 진단은 통계와 데이터에 기반해야 한다. 통계와 데이터가 잘못되면 틀린 정책이 나온다. 그런 점에서 대한민국은 아직 갈 길이 멀다.
첫째, 정권이 바뀔 때마다 통계 조작 논란이 되풀이되고 있다. 이 불행을 끝내야 한다. 통계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과학이어야 한다.
둘째, 여야가 정책 논쟁을 할 때 서로 다른 통계를 내세워 정당성을 주장한다. 예를 들어 '국가 부채 논쟁'에서 한쪽은 중앙·지방정부 빚만 계산해 부채 규모를 줄이려고 한다. 다른 쪽은 공공기관 채무를 합한 'IMF식 기준'을 내세워 방만한 재정을 비판한다.
부동산 정책도 살펴보자. 문재인 정부는 한국부동산원 조사를 근거로 "집값 잡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야당은 KB부동산 시세를 근거로 '집값 폭등'을 비판했다. 국민이 체감하는 집값과 차이가 있었다. 최저임금, 최저 생계비를 산정할 때도 의견이 다르다. 고용 통계 또한 여야 해석이 다르다. 더군다나 정책은 국민의 동의가 중요한데, 국민이 느끼는 취업 및 물가 상황과 정부 발표 통계는 큰 차이가 있다.
셋째, 더 큰 불행은 국가가 국민이 어떻게 사는지 잘 모른다는 점이다. 코로나 초기 재난지원금을 줄 때, 소득 파악이 어려워 제때 지급하지 못했다. 그래서 국민의 원성이 높았다. 송파 세 모녀, 방배동 모자, 수원 세 모녀가 이름 없이 우리 곁을 떠나갔다. 방배동에서 "우리 엄마 5월 3일에 돌아가셨어요. 도와주세요"라고 쓴 발달장애 아들의 메모를 보고, 사망 후 5개월이 지나서야 엄마의 시신을 발견했다. 가난하고 힘든 이들이 어떤 어려움 속에 살고 있는지 미리 파악할 국가 시스템이 없었다. 부끄러운 일이다.
누가 현금을 과다하게 찾으면 금융정보분석원에서 바로 알아낸다. 전기·수도요금 등 몇 가지만 전산으로 파악해도 위기 가구를 찾아내 지원할 수 있을 것이다. 스웨덴은 개개인의 삶을 40여 개 지표로 기록한 통계등록부를 만들었다. 일류 국가로 가려면 우리도 통계등록부를 만들어야 한다. 국민도 안심하며 살고, 기업도 비즈니스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상황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있어야 예산 낭비 없는 문제 해결이 가능하다. 이제 여야, 국민이 모두 신뢰할 수 있는 통계등록부를 함께 만들어 나가자. 그래야 대한민국이 일류 국가로 향하는 첫걸음을 뗄 수 있다.
과거 위대한 지도자들의 공통점이 있다. 도량형을 통일하고, 당대 지식과 기술을 총망라했다. 이를 기초로 새로운 나라를 만들었다. '말로만 말고 숫자를 대봐'란 책이 있었다. 그 책이 자꾸 떠오른다.
[이광재 국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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