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유희형이 쓰는 나의 삶 나의 농구㉗ 뒤늦게 도전한 석·박사 학위
※본 기사는 농구전문매거진 점프볼 1월호에 게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고려대 출신이죠?”
나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고려대학교에 진학 못 한 아쉬움을 늘 가지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나를 고려대 출신으로 알고 있었다. 인천 송도고 출신 선수 대부분이 고려대에 진학했기 때문이다. “고려대 나왔죠?”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 “단국대 나왔는데요!” 대답할 때마다 부아가 났다. 1990년대 중반, 친분이 있는 한국체육대학교 교수로부터 대학원 진학 권유를 받았다. 석사과정이었다. 자신이 없었지만, 간곡하게 권하는 그분의 성의에 마음이 움직였다. 늦었지만, 새로운 도전을 해보자 다짐하고 준비했다. 합격했다. 수업은 야간에 있었다. 주 3일 강의를 빠짐없이 참석했다. 원생 20명 중 최고령으로 원우회장을 맡았다. 석사과정은 큰 어려움이 없었다. 체육 관련 학문이어서 도움이 되었고, 학점 취득과 논문도 수월하게 통과했다. 장학금도 받았다. 원생들과 호흡을 맞추고 학교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교수들과 친분도 쌓았다. 문화체육부 현직 공무원인 나를 한체대는 반갑게 맞아 주었다. 한국체육대학교는 국립대학으로 1977년 설립되었다. 우수선수 발굴. 육성을 목적으로 개교한 이래, 한체대 출신이 올림픽 메달을 가장 많이 획득했다. 문체부에서 국가대표훈련을 담당하는 나로서는 애정을 가지고 학문에 매진할 수 있었다. 40대 후반에 늦깎이 석사학위를 받았다. 군, 입대 관계로 단국대 졸업식에 참석 못 했는데. 처음 써보는 사각모와 가운을 입고, 원생대표로 학위 받는 기분은 새로웠다. 내친김에 박사까지 도전해 보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박사과정은 지원자가 많아 입학이 어려웠다. 운 좋게 무시험으로 합격했다. 당시 문체부 서기관이었는데, 관련 부처 4급 이상 공무원에게 특례입학이라는 혜택이 있었다. 신입생이 15명이었는데, 원우회장을 또 맡았다. 그때부터 3년간, 나에게는 힘든 시간이었다. 여러 차례 포기하고 싶었지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참아냈다. 석사과정과 차원이 달랐다. 2년간 수업인데 영어 원서를 번역, 발표해야 하고, 과제도 어려웠다. 5과목의 종합시험과 영어, 일본어(제2외국어) 시험을 통과해야만 논문 학기로 들어간다. 불합격하면 1년 후 다시 도전해야 한다. 입학과 함께 외국어학원에 등록했다. 아침 일찍 두 시간 강좌를 듣고 출근했다. 문체부 업무 때문에 술자리가 자주 있어 고역이었다. 비몽사몽으로 강의에 참석하기 일쑤였다. 수업 과정에 해외연수 일정이 있었다. 미국 현지 대학교에서 3주간 워크숍(Workshop)을 하는 것이다. 서부 코발리스(Corvallis)에 있는 오레곤대학(University of Oregon)이었다. 인구 5만 명의 소도시다. 내가 진두지휘하며 계획을 세웠다. 원생 15명 전원이 참여해야 하는데, 미국 입국비자가 문제였다. 직장이 없으면 비자를 주지 않았다. 직업이 없는 10명이 비자를 받지 못했다. 오기가 생겼다. 당시 2002년 월드컵축구대회조직위원회에 파견되어 의전부장을 맡고 있었다. 의전부에 동시통역사가 6명(영어 4, 일어 1, 불어 1명) 있었다. 미국대사에게 편지를 보냈다. 내가 직접 서신을 작성하고 전문통역사가 수준 높게 번역한 탄원서였다. 박사과정 원생들은 유능한 엘리트로 학문을 배우러 가는 것이다. “미국에 눌러앉을 사람 한 명도 없으니 걱정하지 말고 비자를 발급해다오.” 오레곤대학교 초청장을 무시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인맥을 통해 부탁도 했다. 미국대사를 잘 아는 미8군에 근무하는 지위 높은 분이었다. 즉각 재신청하라는 연락이 왔다. 모두 10년짜리 비자를 받았다. 원생들로부터 감사의 인사를 받았고, 보람도 느꼈다. 오레곤대학 워크숍은 힘들었지만, 많은 경험을 했다. 미국 대학의 환경이 너무 부러웠다. 공부만 시키는 것이 아니라 여가선용 프로그램이 잘 되어있었다. 수업 중간에 좋아하는 스포츠 활동을 한 뒤 교실로 들어간다. 체육관에 농구 코트가 세 면이 있었다. 농구화와 운동복을 무료로 빌려준다. 남녀 구분 없이 5대5 시합을 하는데, 21점 먼저 넣는 팀은 코트에 남고, 다른 팀이 들어온다. 땀을 흠뻑 흘리고 샤워한 후 상쾌한 기분으로 수업에 참여하는 것이다. 오랜만에 나의 농구 실력도 보여줄 수 있었다.
미국을 다녀온 후, 시험 준비에 들어갔다. 외국어부터 준비했다. 여름방학 동안에 특별과외 수업을 받기도 했다. 이전에 출제되었던, 문제지를 복습하기도 했다. 종합시험은 12개 과목 중 5개를 선택한다. 시험 2개월 전부터 수업 마친 후 밤늦게까지 열심히 대비했다. 전 과목에 대한 예상문제와 모범답안을 만들었다. 원생 전원이 합심하여 지혜를 모았다. 나는 발로 뛰며 정보를 얻어냈다. 낙오자 없이 15명 모두 합격했다. 한체대 설립 이후 전원 합격은 처음 있는 일이라고 후배들이 부러워했다. 논문 준비에 들어갔다. 기간은 1년, 먼저 논문작성 방식부터 정해야 한다. 문헌 고찰과 델파이 방식 중 후자를 택했다. 설문 조사를 통해 상황을 예측하고 결론을 내는 방식이다. 생활체육 관련으로 제목을 정했다. 논문계획서 발표는 공개적으로 하며 다양한 질문에 답해야 한다. 잘 넘어갔지만, 마지막으로 피곤한 과정이 남아있었다. 논문심사다. 다섯 명의 교수가 5회 심의하는데, 그때마다 지적당하고 수정해야 한다. 화도 나지만 참았다. 2001년 2월,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53세에 화려한 검은색 가운을 입고 받은 학위증서, 감개무량했다. 언론에도 보도되었다. 어려운 과정을 이겨냈다는 성취감이 있었지만, 아내한테 미안했다. 대학생 세 명(자녀 둘과 나)의 학비를 대느라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박사학위 취득은 공무원 퇴직 후 취업 활동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대학교에서 학문도 가르쳤다. 마천 청소년수련관장, 한양대 겸임교수, 스포츠 관련 단체 임원 등의 일을 했다. 농구선수 시절은 육체적 고통 극복이었다면, 박사과정은 정신적 어려움을 이겨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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