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전증 병역비리’에 진짜 환자들 분노… 의학적 판별 어려워 브로커들 허위 처방·신고 악용

채민석 기자 2023. 1. 16.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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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위 진단서·119출동 이력증 등 제출해 병역 면제
뇌전증, MRI·뇌파검사 등으로도 쉽게 확인되지 않아
”실형 가능성 있어… 복역 후 재검사 받아야”

“환자들은 매일이 살얼음판인데, 누구는 병역면제를 위해 뇌전증을 이용하다니…”

서울 성동구에서 뇌전증을 앓고 있는 초등학생 자녀를 키우고 있는 최모씨는 최근 불거진 ‘뇌전증 병역비리’ 소식에 허탈해했다. 최씨는 “누구에게는 인생이 걸린 병인데, 모범을 보여야 할 유명인들이 환자 가족들에게 너무나도 큰 상처를 주고 있다”고 말했다.

16일 수사당국에 따르면 뇌전증을 앓고 있는 것처럼 진단서를 꾸며 병역을 면제받거나 감면 받은 유명인들이 줄줄이 수사 선상에 오르고 있다. 최근 검찰과 병무청 합동 수사팀은 인기 아이돌 그룹 ‘빅스’의 멤버 라비(본명 김원식·30)를 병역법 위반 혐의로 입건했다. 그는 뇌전증을 앓고 있다며 신체검사 재검사를 신청하는 방식으로 신체등급을 낮춰 4급 판정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라비는 건강상의 이유로 지난해 10월 사회복무요원으로 대체복무를 시작한 바 있다.

수사팀은 라비가 신경과 전문의를 통해 뇌전증 허위진단서를 발급 받아준 브로커에게 수천만원 상당의 수수료를 건넨 정황을 포착했다. 최근 서울남부지검은 브로커인 행정사 김씨와 구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프로배구 OK금융그룹 소속 조재성(28) 선수도 자신의 소셜미디어(SNS)에 자신이 뇌전증 병역비리에 연루가 돼있으며, 브로커들이 법적대응을 하겠다며 압박을 했다고 밝혔다.

뇌전증은 과거 ‘간질’로 불렸던 질환이다. 뇌전증은 뇌신경세포가 일시적으로 이상을 일으켜 과도한 흥분 상태를 유발하는 질병으로, 의식 소실·발작·행동변화 등과 같은 뇌 기능의 일시적 마비 증상이 만성적으로 발생한다.

뇌전증은 병역 면제 사유다. 병무청의 신체등급 판정 기준에 따르면 ‘미확인된 경련성 질환’(1년 이상의 기간 동안 병·의원 등에서 지속적인 항경련으로 치료 받은 사실이 있으나, 뇌파검사·방사선검사 또는 핵의학적 검사상 이상 소견이 없는 경우)은 4급(보충역 판정)에 해당한다. 이외에도 증상이 심각한 경우 5급(전시근로역)이나 6급(병역면제) 판정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뇌전증 환자가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과정은 쉽지 않다. 뇌전증은 의학적으로 판별이 어렵기 때문이다. 신체등급 판정 기준에서 언급된 것처럼 이상 소견이 없는 경우에도 4급 판정을 받을 수 있는 등 MRI검사나 뇌파 검사 등을 통해서도 뇌전증은 그 심각성이나 거짓 여부에 대해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 이에 뇌전증 환자가 군면제를 받기 위해서는 장기간에 걸쳐 착실하게 검사 기록이나 정확한 진단의 근거를 병무청에 제출해야 한다.

뇌전증의 특성상 실제 뇌전증을 앓고 있는 환자 중 일부는 뇌전증 판단이 어려운 탓에 군복무를 한 사례도 있다. 그러나 브로커들은 오히려 이 점을 파고들어 장기간에 걸쳐 허위로 처방을 받고 119 신고 이력증을 만들어 유명인들의 신체 검사 등급을 낮춘 것으로 전해졌다.

허위 뇌전증 진단을 알선하고 1억원이 넘는 돈을 수수한 혐의를 받는 병역 브로커 김모씨./뉴스1

뇌전증 환자와 가족들은 뇌전증을 악용한 병역 비리가 발생했다는 소식에 분노하고 있다. 경기 성남시에서 뇌전증 환자 자녀를 키우고 있는 강모씨는 “어제 저녁에도 아이가 발작을 해 약을 먹이고 겨우 진정시켰다. 매일 마음 졸이며 살고 있다”며 “우리 아이가 완치 돼서 씩씩하게 군대에 가는 모습을 볼 수 있게 하루하루 기도하고 있는데 억장이 무너진다”고 울먹였다.

뇌전증 관련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도 병역비리를 저지른 유명인들을 성토하는 글들이 올라오고 있다. 몇몇 누리꾼들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느냐”며 격분했다. 일부 누리꾼들은 “뇌전증은 정신질환이 아닌 뇌질환인데, 이러한 사실이 왜곡돼 뇌전증에 대한 이미지가 더 안좋아질까 걱정된다”고 우려했다.

김덕수 한국뇌전증협회 사무처장은 “우리나라에 뇌전증을 앓고 있는 환자가 최소 37만명에서 최대 50만명이다. 하지만 뇌전증 환자의 약 50%는 MRI 등으로 뇌전증을 앓고 있음을 잡아내지 못하고 있다”며 “전문의 3~4명이 교차 검증만 해도 거짓말인지 아닌지 금방 분별해낼 수 있다. 병역비리 등을 척결하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관리를 해야 한다. 관련 법안을 조속히 통과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곽준호 법부법인 청 대표변호사는 “뇌전증임을 꾸며 병역 면제를 시도한 행위는 병역면탈에 해당하기 때문에 실형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된다면 복역을 한 뒤에 재검사를 받을 가능성이 있다”면서도 “다만, 피고인이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면 집행유예를 선고 받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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