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새해 첫날'과 '설'은 쓰임새 달라요
‘글쎄, 해님과 달님을 삼백예순다섯 개나/공짜로 받았지 뭡니까/그 위에 수없이 많은 별빛과 새소리와 구름과/그리고/꽃과 물소리와 바람과 풀벌레 소리들은/덤으로 받았지 뭡니까//이제, 또다시 삼백예순다섯 개의/새로운 해님과 달님을 공짜로 받을 차례입니다 … (하략)’ 굳이 제목을 말하지 않아도 새해를 맞는 시인의 소박한 마음이 잘 드러난다. ‘풀꽃’으로 유명한 나태주 시인의 시 ‘새해 인사’는 담백하면서도 새길수록 감칠맛이 난다.
‘설’은 음력 1월 1일을 명절로 하는 말
양력 1월 1일 ‘새해 첫날’과 음력 1월 1일 ‘설’ 사이, 요즈음엔 누구나 새해 인사를 준비한다. 새해를 맞아 웃어른께 드리는 인사를 한 단어로 ‘새해문안’이라고 한다. 절을 하며 웃어른께 안부를 여쭈는 것은 ‘절문안’이다. 나태주 시인의 ‘새해 인사’는 현란한 말 한마디 없어도 그 어떤 새해문안보다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서정적이고 감수성 넘치는 그의 시어는 정평이 나 있다. 해님과 달님, 별빛과 새소리와 구름, 그리고 꽃과 물소리와 바람과 풀벌레까지…. 읽을 때 쉽고 편하고 입에 착 감긴다. 이들이 곧 그의 시적 토양이자 우리말의 ‘힘’ 아닐까.
나 시인은 2021년 한 인터뷰에서 “우리말은 정말로 좋고 훌륭하다. 예를 들어 ‘하늘, 사랑’ 같은 말들을 어떤 나라의 말로 바꿔도 우리말이 제일 좋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가 말하는 시어들에는 눈에 띄는 특징이 하나 있다. 한글 자음 ‘ㄹ’이 자주 쓰인다는 점이다. 조선 중종 22년(1527년) 최세진이 <훈몽자회>를 지으면서 ‘ㄹ 梨乙(리을)’이라 이름 붙여 비로소 글자로서의 구색을 갖췄다.
‘ㄹ’은 우리말에서 닿소리(자음) 19개 가운데 가장 많이 쓰인다. 혀끝을 잇몸에 가볍게 댔다 떼면서 내는 소리다. 또는 잇몸에 댄 채 공기를 그 양옆으로 흘려보내면서 소리를 낸다. ‘흐름소리(유음)’라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국어 자음 중 모음에 가장 가까운 음향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말을 아름답게, 부드럽게 이끄는 데 단연 으뜸으로 꼽을 만하다.
원로 언론인이자 한글 연구가였던 고(故) 정재도 선생은 ‘ㄹ’의 가치와 그 탁월함에 주목한 이였다. “우주를 이루는 천체가 모두 ‘ㄹ’로 이뤄져 있다. 하늘, 날(해), 달, 별…. 땅도 온통 ‘ㄹ’로 덮여 있다. 들, 길, 풀, 개울, 여울, 이슬, 노을….” 선생은 생전에 저서 <우리말의 신비 ‘ㄹ’>에서 한글 닿소리 ‘ㄹ’을 끄집어내 ‘우리말의 알맹이를 이루는 신비로움’이라고 극찬했다.
요즘 이중과세(二重過歲)하는 이 없어
외래어가 넘쳐나고 한자말로 가득 찬 국어 실태를 탓하는 데 그쳐선 안 된다. ‘언어의 자유시장’에서 선택될, 경쟁력 있는 우리말 발굴이 뒤따라야 한다. 새말을 만드는 일도 마찬가지다. ‘ㄹ’의 활용을 비롯해 아름답고 세련된, 입에 감기는 고운 말을 만들고 키워야 한다.
설(1월 22일)이 1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새해 첫날’이 양력 1월 1일을 가리키는 데 비해, ‘설’이란 음력 1월 1일을 명절로서 부르는 이름이다. 음력으로 한 해의 첫째 달을 ‘정월(正月)’이라 하고, 그 첫째 날을 ‘정월 초하루’라고 한다. 거기서 ‘정초(正初)’라는 말이 나왔다. 설날 아침은 따로 ‘원단(元旦)’이라고 부른다. ‘으뜸 원, 아침 단’ 자로 새해 아침을 뜻한다. 한자 단(旦)은 대지 위로 해가 막 올라오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것을 우리 조상들은 순우리말 ‘동이 트다’라는 멋진 말로 나타냈다.
새해를 두 번 맞는 우리 문화에서는 덩달아 송구영신과 새해문안도 두 번 하는 셈이다. 예전엔 ‘이중과세’(二重過歲: 양력과 음력으로 설을 두 번 쇰)라고 했는데, 요즘은 맞지 않는 말이 됐다. 왜냐하면 양력 1월 1일은 ‘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새해 첫날’일 뿐이다. 음력 1월 1일이 돼야 우리는 비로소 ‘설을 쇤다’고 한다. 송구영신이니 근하신년이니 하던 말도 지난 시절 느낌을 주고 어느새 ‘해맞이’가 더 정겨워졌다. 새해의 일출, 일몰은 해돋이, 해넘이로 바뀐 지 오래다. 한자어든 토박이말이든 다 우리말이다. 다만 어느 쪽이 살갑고 친근한 말맛을 주는지는 저절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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