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 모든 혁신은 '데이터'로 통한다
신년 벽두를 장식한 2023년 CES에서 세계 174개국 3200여 기업이 혁신적 기술과 제품을 선보이며 새해 경제전쟁의 서막을 열었다. CES는 매년 가장 먼저 열리는 산업박람회로, 기술 트렌드는 물론 향후 산업 패권 흐름을 가늠할 수 있는 마법의 거울 같은 역할을 한다. 주최 측의 설명처럼 메타버스, 모빌리티, 헬스테크,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게임 등 5대 기술은 세계인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돌이켜 보면 지난해 CES에서는 인류가 코로나19 팬데믹을 극복하고 메타버스, 도심항공교통(UAM) 등 혁신 기술로 새로운 번영의 시대가 펼쳐질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을 제시했다.
안타깝게도 기술 낙관론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라는 먹구름으로 가려졌다. 올해 CES는 전년과 비슷한 테마로 구성됐지만 경제 현실을 반영, 이전과 차별화한 몇 가지 특징이 나타났다.
첫째 첨단 기술의 실용적 접근이 강조되었다. 어려운 경기 상황을 겪고 있는 기업은 신기술 과시보다 사업화에 집중하는 것으로 보인다. '디지털 기술을 가장 빨리 시장에 구현하는 자가 가치를 창출하고 살아남는다'는 디지털 속도 경쟁(Time-to Market)이 가속되고 있다. 예를 들어 메타버스의 경우 환상적인 가상 세계 구현에 집중하기보다는 산업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는 디지털트윈을 보여 준다.
둘째 스마트폰 운용체계(OS)가 iOS(애플)와 안드로이드(구글)로 양분된 것처럼 자동차 시장에서도 유사한 플랫폼 경쟁이 일고 있다. 모빌리티 특별전시관에 토요타·폭스바겐·현대기아와 같은 글로벌 톱3 자동차는 없었고, 그 빈자리를 아마존·마이크로소프트(MS)·구글과 같은 디지털 공룡이 채우고 있었다. 인공지능(AI)과 데이터를 도구로 모빌리티 OS를 선점하기 위한 별들의 향연이 전개되는 듯했다.
셋째 중국 기업의 전시회 참여나 중국인 관람객 비중이 현저히 줄었다. 지난 2021년 중국의 자동차 생산은 2608만대로 미국 915만대의 3배 수준에 이른다. AI·빅데이터·자율주행과 같은 첨단 기술 부문에서도 미국에 비견되는 수준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기술 패권 분쟁을 우회하지는 못하는 모양새다. 적어도 디지털 부문에서 미·중 디커플링은 이미 루비콘강을 건넌 듯하다.
CES를 정리하면서 문득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명언에 빗대어 '모든 혁신은 데이터로 통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첨단 신기술을 빠르게 사업화하고 디지털 모빌리티 플랫폼 경쟁을 선도하면서 미-중 패권 분쟁을 유리하게 활용하기 위해서는 과학적 데이터로 상황을 정리하고, 신속한 대응 전략을 수립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기업은 산업 패권을 지배하기 위해 'AI 기반 데이터 산업계 활용'에 더욱 집중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 연구개발(R&D) 투자도 데이터 경영에 기반을 둔 창조적 혁신을 모색해 나가야 한다. 개인의 경험과 직관에 의존하는 '전통적 위원회 방식 R&D 평가관리'로는 빠르게 변화하고 복잡하게 융합되는 기술을 선도하기는커녕 따라잡기도 어렵다.
이런 맥락에서 산업 분야의 R&D 전문기관 중심으로 과제기획, 평가관리, 성과·환류에 이르는 전 주기를 데이터를 통해 혁신하기 위해 'R&D 디지털 플랫폼'(별칭 ROME) 구축 작업이 본격화하고 있다. 먼저 R&D 평가 측면에서 국내외 산·학·연 전문가들이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연결되고 평가에 참여할 수 있도록 구축한 '데이터 기반 R&D 평가 서브시스템'(Evaluation-sub. ROME)이 가동되고 있다. 이는 정부 R&D를 수행하는 전문기관 가운데에는 최초로 도입된 것이다. 전문가에게 영상·음성·문서 등 디지털 평가지원 환경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국내외 유사 특허 동향, 관련 기술 품목 수출입 동향, AI가 핵심을 정리한 사업계획서, 참여 연구진의 역량 진단 결과 등을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요약한 '디지털 노트'가 제공된다.
다음으로 투자기획 측면에서도 '데이터 기반 R&D기획 서브시스템'(Planning-sub. ROME)을 통해 기획업무의 디지털전환이 진행되고 있다. AI 기반 자연어처리(NLP) 기술을 활용해 특허, 논문, 연구과제, 언론·뉴스 등 제반 데이터를 높은 수준의 정보로 가공해서 R&D 전문가에게 제공한다. 또한 핵심 테마로 선정된 아이템이 특허나 시장 측면에서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모니터링하는 '주제별 분석', 관심 기술 키워드와 관련된 특허·논문, 수출입 현황과 참여기업 정보를 원클릭으로 탐색 가능한 '자율형 분석', 검색 결과를 언제든 갈무리하고 전문가 간 공유를 지원하는 '플래닝 노트'와 같은 고품질 지식정보 서비스가 제공됨으로써 R&D 전문가들은 실시간으로 소통하며 혁신적 기획과 과제 해결을 도모할 수 있게 된다.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이 심화하고, 보호무역주의가 독버섯처럼 확산하고 있다. '데이터 기반 R&D 플랫폼'은 변화한 세계에서 새로운 도전에 응전하기 위한 필수 도구다. AI로 처리된 데이터를 활용하는 R&D 전문가는 기술과 시장 상황을 기민하게 분석하며 융합적이고 창의적 사고로 해법을 제시한다. 우리 산업의 경쟁력을 높여 가면서 글로벌 기술패권 경쟁에 나서는 우리 기업의 든든한 지원군이 될 것이다.
전윤종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KEIT) 원장 art@keit.re.kr
〈필자〉
전윤종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KEIT) 원장은 정책·경제·통상 분야에 두루 능통한 관료 출신 기관장이다. 군산제일고, 서울대 경제학과, 영국 리즈대 경영대학을 졸업했다. 행정고시 36회에 합격, 1993년 상공자원부 사무관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지식경제부 투자유치과장, 산업통상자원부 정책기획관·통상협력국장·통상교섭실장 등으로 활동했다. 주유럽연합(EU)·벨기에 대사관 상무관, KOTRA 교역지원센터장, KAIST 과학기술정책센터 연구교수 등 다양한 이력을 쌓았다. 지난해 9월부터 R&D 기관 KEIT에서 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취임사에서 KEIT를 '혁신성장 촉진자' '산업 대전환 견인차'로 거듭나도록 바꾸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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