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승객들 “새벽 1분은 천금의 시간”…15분 앞당긴 146번 첫차의 의미

강은 기자 2023. 1. 16.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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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차가 이전보다 15분 빠른
3시50분에 출발하는 첫날
서로를 ‘언니’라고 부르는
중년 여성들로 버스 안 꽉 차
대부분 건물 청소 노동자들
“오늘은 역사적인 날” 감격
16일 오전 상계7단지에서 강남역 방면으로 가는 146번 버스 첫차(8146번)에 승객들이 탑승해 있다. 강은 기자

16일 오전 3시, 상계7단지 아파트에 사는 정남희씨(67)가 평소보다 20분 일찍 눈을 떴다. 간단히 세안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과일과 채소를 갈아 주스를 만들었다. 한 잔은 정씨가 마시고 나머지 한 잔은 남편 것으로 남겼다. 혈압 약 다섯 알을 삼키면 출근 준비가 마무리된다. 일어나는 시간이 조금 빨라진 것 외엔 달라진 게 없는 일상이지만 정씨는 “오늘은 역사적인 날”이라고 했다.

강남구 선릉역 인근 35층짜리 건물에서 청소 일을 하는 정씨는 ‘146번 버스’가 출발하는 상계7단지 정류소로 발걸음을 서둘렀다.

이날은 146번 버스 첫차가 이전보다 15분 빠른 3시50분에 출발하는 첫날이다. 2주 전 한덕수 국무총리는 새벽 만원 버스로 알려진 이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는 첫차를 타는 노동자들의 민원을 듣더니 “첫차를 15분 당기겠다”고 했다. 서울시는 빠르게 도입을 검토해 운행을 공식화했다. 15분 빨리 출발하는 첫차의 공식 번호는 8146번. 버스 세 대가 3시50분부터 5분 간격을 두고 강남역 종점을 향해 출발한다.

16일 오전 146번 버스 첫차(8146번)가 기점인 상계7단지 정류소에 정차해 있다. 강은 기자

“직원들 오기 전에 청소를 끝내려면 빨리 가야 해. 예전부터 계속 민원을 넣었는데도 안 되더니 (한 총리가) 다녀간 후에 바로 바뀌더라고.” 운전기사 바로 뒷좌석에 자리를 잡은 정씨가 웃으며 말했다. 그는 청소 일로 몇 년간 모은 돈을 4년 전 막내아들이 가게 차리는 데 보탰다고 했다.

“이 차가 첫차 맞죠?” 어둠 속에서 영하 8도의 추위를 뚫고 나타난 이들이 밝은 얼굴로 버스에 몸을 실었다. 승객들이 확인차 물어볼 때마다 운전기사 윤종수씨(68)가 고개를 끄덕였다. 146번 버스만 10년 넘게 몰았다는 그는 정년이 지난 후 휴식기를 가지려다가 ‘첫차만 운행하는 기사’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1년 촉탁직으로 계약했다.

윤씨는 “첫차를 타는 분들은 대부분 강남역 인근 건물에서 청소 일을 하는 분들”이라며 “남자보다 여자가 훨씬 많다”고 말했다. 정류소 20여 개를 지나 먹골역에 다다를 즈음이 되자 뒷좌석이 빼곡히 들어찼다. 서로를 ‘언니’라고 부르는 중년 여성들로 버스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16일 오전 상계7단지에서 강남역 방면으로 가는 146번 버스 첫차(8146번)에 승객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강은 기자

30년 이상 건물 청소 일만 했다는 이옥자씨(79)도 15분 빠른 첫차가 반갑기는 마찬가지다. 이전에도 수락산역 정류장에서 첫차를 타면 삼성역 인근 건물에 늦어도 5시30분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공식 근무 시작보다 30분이나 빠르지만 이씨는 그마저도 빠듯하게 느낀다. 건물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인 7시30분까지는 청소를 마쳐야 한다.

“천천히 할 때랑 급하게 할 때랑 일이 되는 게 다르잖아. 지적 안 받게 일을 끝내려면 시간이 넉넉해야 좋지.”

이씨의 남편은 큰딸이 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이후 홀로 삼 남매를 키웠다. 지금은 둘째 딸이 낳은 외손주 둘과 산다. 아침에 일어나선 손주들이 먹을 밥과 찌개를 준비하고 집을 나선다. 그는 오후 2시까지 건물에서 청소 일을 하고 한 달에 130만원을 번다. 여든이 가까운 나이지만 “아직은 힘들지 않다”고 했다.

16일 오전 상계7단지에서 강남역 방면으로 가는 146번 버스 첫차(8146번)에 승객들이 탑승해 있다. 강은 기자

몇몇 승객들은 기자가 다가가자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감기도 했다. 뒤에서 두 번째 줄에 앉은 중년 남성은 말을 거는 기자에게 “다들 첫차에선 자야 한다”며 타박을 줬다. 옆에 있던 강미정씨(61·가명)는 “새벽 1분은 낮 1분과 비교도 안 되게 소중하다”면서 “우리에게 금같은 시간”이라고 했다.

버스가 영동대교를 넘어 강의 남쪽으로 넘어가자 사람들이 조금씩 빠지기 시작했다. 삼성역이나 강남역까지 가야 하는 이들의 마음은 더 조급해진다. 청담역 정류소에서 내려 강남구청 건물로 출근한다는 강씨는 “버스에서 내려 뛰어가다 보면 넘어지는 경우가 많다”면서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심하게 다쳐 수술하기도 한다”고 했다. 강씨를 비롯한 승객들은 “출발이 빨라졌는데도 도착 시각은 생각만큼 빠르지 않다”며 걱정했다.

“언니, 안 내려?” “어머, 내 정신 좀 봐.” 청담역 정류소에 가까이 오자 강씨 옆자리에 앉은 여성이 옆구리를 찔렀다. 말을 쏟아내던 강씨가 서둘러 차에서 내렸다. 봉은사, 선릉역, 삼성역, 강남역을 지나자 승객들이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강은 기자 ee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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