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촌 다 죽었으니 한양에 목맬 수밖에…[지식카페]

2023. 1. 16. 09:06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이글에서는 지방대라는 익숙한 표현 대신에 '지역대'라는 표현을 쓰기로 한다.

도성 근교, 그러니까 수도권에서라도 살아야 그나마 한양살이에 필요한 자산을 마련할 수 있게 되기에 그랬다.

그가 한양살이를 강조한 까닭은 한양에만 있는 "고상하고 수려한 안목"의 구비를 가능케 하는 인문, 곧 문화 때문이었다.

만약 다른 지역에서도 고상하고 수려한 안목의 구비가 가능했다면 다산은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지식카페 - 김헌·김월회의 고전 매트릭스 -(22)지역 소멸 위기와 대학

정약용 ‘하피첩’

도성서 수십리 벗어나면 황폐

하물며 먼 지방 어떠하겠는가

벼슬이 끊기더라도 한양 살아

고상하고 수려한 안목 갖춰야

향촌 문명 살아있는 中 부러워

이글에서는 지방대라는 익숙한 표현 대신에 ‘지역대’라는 표현을 쓰기로 한다. 지방이라는 말이 서울 이외의 지역을 가리키는, 곧 ‘중심 대 주변’이라는 극복해야 할 구도에 갇힌 표현이기에 중립적 표현인 ‘지역’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우리나라에서 한 해를 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기간은 대학입시의 계절이기도 하다. 12월 초순 무렵부터 수시모집 결과가 발표되고 뒤이어 정시모집이 해를 넘기며 숨 가쁘게 진행된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이 시기는 ‘지역 소멸’이라는 이슈가 널리 환기되는 때가 되었다. 대학입시 결과 수년 전부터 예측되던 지역대 위기가 하나하나 현실이 되고, 이는 해당 대학의 위기에 그치지 않고 대학이 위치한 지역 전체의 위기로 이어지기에 그러하다.

주지하듯이 지역 소멸 위기는 수도권 집중화의 부작용이다. 하여 수도권 집중화의 원인을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다. 다산 정약용(사진)은 강진에 유배된 지 얼마 안 되어 부인이 보내온 색 바랜 붉은 치마를 오리고, 그 위에 한지를 덧댄 후에 두 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적어 보냈다. 그중 한 대목에서 다산은 ‘한양살이’에 대한 욕망을 강렬하게 드러냈다.

“(우리나라는) 도성에서 수십 리만 떨어져도 황폐한 세계가 되니 하물며 먼 지방은 어떠하겠는가? 사대부가의 법도는 벼슬에 나아갔을 때는 마땅히 산기슭에 거처하면서 처사(處士)로서 본색을 잃지 말아야 하고, 벼슬이 끊기더라도 필시 한양에 거처하여 고상하고 수려한 안목을 잃지 말아야 한다. …… 가세가 쇠락하여 도성 안으로 깊이 들어가지 못하면 응당 근교에 일단 머물며 과수를 키우고 채소를 재배하며 생계를 도모하다가 자산이 다소라도 넉넉해지면 바로 도성 중심으로 들어가도 늦지 않다.”(‘하피첩’)

다산은 당장은 유배를 당한 처지라 피치 못하게 가족을 농촌에서 살게 했지만 훗날의 계획은 오로지 도성 십 리 안에 사는 것이라며 아들들에게 기필코 한양에서 살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당장 입성할 수 없다면 한양 근교에서라도 살라고 했다. 근교를 벗어나면 황무지와도 같은 세상인지라 한양에 살 가능성이 현저히 줄어든다. 도성 근교, 그러니까 수도권에서라도 살아야 그나마 한양살이에 필요한 자산을 마련할 수 있게 되기에 그랬다.

그렇다고 다산을 ‘한양 우월론자’로 봐서는 안 된다. 그가 한양살이를 강조한 까닭은 한양에만 있는 “고상하고 수려한 안목”의 구비를 가능케 하는 인문, 곧 문화 때문이었다. 한양이 출세에 유리한 중심지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런데 한양에 사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재력의 구비가 필요했다. 당시에도 재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높은 수준의 문화 향유는 난망한 일이었다. 아무리 지식인이라 할지라도 고상하고 수려한 안목을 갖추는 데는 비용이 들게 마련이었다.

하여 정치에 큰 뜻이 없어도 관직에 나서야 했다. 관계 진출은 지식인으로서 재력을 갖추는 확실한 길이었다. 게다가 한양은 관계로 향한 길이 가장 넓게 뚫려 있는 곳이었다. 한양은 그렇게 권력과 재력, 문화가 집적되어 있는 곳이었고 한양 외에는 그러한 곳이 없었다. 만약 다른 지역에서도 고상하고 수려한 안목의 구비가 가능했다면 다산은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중국은 향촌에서도 문명을 누릴 수 있다면서 윗글을 시작했기에 하는 말이다. 선택지가 하나밖에 없기에 한양에 목을 맬 수밖에 없었음이다. 의도치 않았지만 다산의 사례는 선택지를 늘리는 것이 지역을 살리는 유일한 길임을 일러준 셈이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보면 지역의 붕괴는 늘 중앙의 붕괴를 야기했다. 나라 전체의 붕괴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역 살리기는 정권의 이해관계 차원이 아니라 국가 존망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그래야 정파적 이해관계를 넘어 지역 살리기를 위한 꾸준하고도 지속적 정책 집행이 가능해진다. 20∼30년을 내다보며 정책을 일관되게 밀고 나가도 힘든 일을 어찌 4년이나 5년을 가지고 할 수 있겠는가?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 문화닷컴 | 네이버 뉴스 채널 구독 | 모바일 웹 | 슬기로운 문화생활 ]

[Copyrightⓒmunhwa.com '대한민국 오후를 여는 유일석간 문화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구독신청:02)3701-5555 / 모바일 웹:m.munhwa.com)]

Copyright © 문화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