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한 세상이 뜨겁게 소환한 ‘청년영웅 안중근
지난해 12월21일 개봉한 뮤지컬 영화 <영웅>이 할리우드 대작 <아바타: 물의 길>과 경쟁하며 지난 7일 기준 200만 관객을 돌파했다. 같은 날 막을 올린 뮤지컬 <영웅>도 <물랑루즈!> 같은 대작과 경쟁하며 뮤지컬 예매(공연예술 통합전산망 기준) 순위 3위를 달리고 있다. 교보문고가 13일 집계한 1월 둘째 주 베스트셀러 순위에서 김훈의 <하얼빈>은 종합순위 9위를 기록했다. 지난해 8월 나온 이 소설은 9주 연속 1위를 차지하며 지난해 종합 베스트셀러 6위에 올랐다.
여전히 인기를 끄는 <영웅>과 <하얼빈>은 영화·뮤지컬·책 등 모두 다른 장르지만 공통점이 있다. 바로 안중근이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 왜 지금 안중근인가
100년 전 인물인 안중근(1879~1910)을 내세운 콘텐츠가 대중에게 인기를 끄는 이유를 한마디로 재단하기는 힘들다. 다만 안중근이 살았던 시대처럼 혼란스러운 이 시대가 안중근을 소환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안중근이 활동한 시기는 전쟁과 침략의 제국주의 시대였다. 지금도 미국과 중국의 군사·경제적인 마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한반도와 양안(대만과 중국)의 긴장, 일본의 재무장 등 전세계적으로 전쟁 기운이 감돌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평화와 조국을 위한 안중근의 선택과 결단이 재조명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리더십 부재 또한 원인으로 거론된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서 군사·정치적 대립은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하다. 지난해 10월29일 일어난 이태원 참사는 그 많은 젊은이가 덧없이 세상을 떠났는데도 책임지겠다는 사람이 없다. 대중은 이런 혼란에서 사회를 결속시킬 리더십을 찾게 된다.
2014년에도 그랬다. 그해 4월16일 어린 생명을 앗아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고, 마침 그해 7월 개봉한 영화 <명량>은 1760만 관객을 동원하면서 이순신 신드롬이 불었다. 대중은 이순신이라는 영웅을 통해 위로받고 돌파구를 찾았다.
김훈은 지난해 8월3일 열린 출간 기자회견에서 “안중근의 시대에 비해 지금 우리는 더욱 고통스러운 시대에 살고 있다. 세계 최대의 강국이 된 중국과 핵무장한 북한의 군사동맹, 일본의 군사 대국화 지향과 미국과의 동맹 때문에 동양 평화가 정말로 위기에 처해 있다”며 “책 ‘작가의 말’에서 제가 ‘안중근을 그의 시대 안에 가두어놓을 수는 없다’고 쓴 것이 그런 뜻”이라고 했다.
■ ‘청년 안중근’ vs ‘영웅 안중근’
이런 안중근을 다루면서 책과 영화·뮤지컬은 확연한 차이를 드러낸다.
책 <하얼빈>은 영웅 안중근보다 청년 안중근을 보여준다. 김훈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으로 향하는 안중근의 가난과 청춘을 그렸다. 청년의 순수함과 시대를 향한 결의가 이토 히로부미로 상징하는 제국주의에 총을 쐈다는 흐름을 이어간다.
역사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보여준다. 혼란스러운 시대에서 그 아픔을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사람은 안중근처럼 가난한 젊은 청년들이다. 결국 책은 불공정과 불평등의 이 시대에서도 청년은 그런 아픔을 온몸으로 견뎌내고 있다는 걸 드러낸다.
반면 영화와 뮤지컬은 접근 방식이 다르다. 희생을 통해 영웅으로 거듭나는 안중근을 그린다. 그는 조선 독립을 위해 죽어간 이들을 보며 거듭난다. 영화는 뮤지컬보다 그런 점을 좀 더 강렬하게 보여준다. 뮤지컬에서 중국인 남매로 나오는 왕웨이·링링은 독립운동가 남매 마두식·마진주로 변신한다. 진주는 하얼빈으로 출발하려는 안중근에게 오빠가 쓰던 모자를 건네며 “대장님, 거사에 꼭 성공해 오빠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말아 주세요”라고 말한다. 두식은 안중근을 지켜주려다 일본 경찰의 고문으로 죽게 된다. 진주 역시 일본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난다.
뮤지컬과 영화가 책과 또 다른 부분은 민중의 연대를 보여주는 점이다. 자작나무 숲의 광활한 설원을 배경으로 두고 약지를 자르는 단지동맹 장면이 대표적이다. “내 조국의 하늘 아래 살아갈 그날을 위해 수많은 동지가 타국의 태양 아래 싸우다 자작나무 숲으로 사라졌습니다”라는 안중근의 대사로 시작하는 ‘단지동맹’은 먼저 떠나보낸 동지들을 기억하며 조국 독립을 위해 의지를 다지는 비장한 결의를 담았다.
영화에서 노래 ‘그날을 기약하며’를 군중이 함께 부르는 장면에서도 민중의 연대를 찾을 수 있다. 평면적인 뮤지컬과 달리 입체적인 영화에선 안중근을 따라 민중들이 힘차게 노래를 부르며 앞으로 나아가는 장면을 담았다. 이 장면은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 군중 신에서 나오는 ‘민중의 노래가 들리는가?’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장치는 안중근의 의거가 도도한 역사와 민중의 힘이라는 걸 드러내 보인다.
■ ‘안중근의 총’ vs ‘안중근의 말’
이런 차이에도 책과 영화·뮤지컬은 공통점이 있다. 안중근의 총보다 안중근의 말에 좀 더 비중을 두고 있는 점에서다. 대중은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장면을 인상 깊게 떠올리지만, 책·영화·뮤지컬은 저격 이후의 재판 과정을 무게 있게 다룬다.
김훈은 <하얼빈>에서 저격 장면을 두 페이지가 채 안 되게 묘사했다. 책은 31장으로 나뉘어 있는데 저격 장면은 책 가운데쯤인 15장에 나온다. 저자가 이 거사 장면을 하이라이트로 만들려 했다면 책 후반부에 배치했을 것이다. 그러지 않은 것은 김훈이 거사 이후 사형이 집행되기 전까지 뭔가를 보여주려 했기 때문이다. 뭘까? 가난한 청년 안중근이 일본 메이지유신과 내각제, 양원제 등의 기초를 닦은 이토에 견줘 평화의 사상이 더 넓고 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이토의 동양평화론은 동양 나라들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이 동양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방편이었다. 안중근이 분연히 일어나 일본 제국주의 상징 이토의 심장에 총을 겨눈 이유이기도 하다. 반면 안중근은 뤼순 감옥에서 쓴 책 <동양평화론>에서 분쟁 지역인 만주에 ‘동양평화회’라는 정치 공동체를 꾸리고, 한·중·일 3국 청년들로 군사 공동체를 만들고, 공동 은행을 세워 공용 화폐를 쓰자고 제안했다.
영화·뮤지컬에서도 법정 장면은 저격 장면 못지않게 비중 있게 다룬다. 일본인 판사가 “너는 왜 이토를 죽였는가?”라는 물음에 안중근은 “누가 죄인인가?”라고 되묻는다. 재판정에 함께 앉아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재판정 밖 군중도 함께 소리 높여 외친다. 안중근은 이런 민중의 후렴에 힘입어 이토의 죄상과 동양평화론의 실체와 허구, 자신이 주장하는 평화론을 낱낱이 열거한다.
마지막으로 소설 <하얼빈>에 나오는 “총을 쥔 자가 살아 있는 인간이므로 총구는 늘 흔들렸다”는 문장과 영화 <영웅>에 나오는 “이토, 당신의 헛된 꿈은 이제 끝났소.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내 꿈도 이젠 끝이오”라는 대사는 닮았다. 평화를 위해 자신과 타인을 희생하기로 하지만, 어머니의 아들이자 한 가정의 가장, 천주교인이라는 정체성으로 고민하는 실존적인 모습을 모두 담아냈기에 그렇다. 폭력과 야만에 맞선 서른한살 청년 안중근이 지금도 소환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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