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일논단] 죽을 죄를 지었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

구창모 대전지법 부장판사 2023. 1. 16.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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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창모 대전지법 부장판사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

88서울올림픽 열기가 아직 남아 있던 어느 청명한 가을날 탈옥수 네 명이 가정집에 침입해 일가족을 볼모로 잡고 인질극을 벌인 일이 있었다. 그들이 벌인 탈주극의 요체 대부분은 잊혀졌지만 범인 둘은 서로를 권총으로 쏘아 자살했고, 주범격인 한 명은 끝내 사살되는 비극으로 종말을 맞았던 데다가 그들이 외쳤다는 저 말 때문에 회자되는 사건이다. 나중에 영화 소재가 되기도 했다.

다른 이들은 어떤지 몰라도 나는 일을 하면서 가끔 되뇌어 보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나로서는 수긍할 수 없는 말이다. 법관으로 재판을 하면서 돈이 많은 사람이라고 해 무죄 방면하지도 않고, 돈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 징역살이를 시키지도 않았다고 자부한다. 그저 죄가 되는지, 어느 정도의 처벌이 적당한지를 고민할 뿐이다. 그런데도 가끔은 '어쩌면 저 말이 맞는지 모르겠다'는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사람들은 유전이면 무죄이고 무전이면 유죄인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도 그런 세상을 만드는데 일조하는 것은 아닐까.

대표적인 경우가 차용금 사기 사건이다. 갚을 의사와 능력이 없이 돈을 빌리면 사기죄가 성립하기도 한다. 돈을 빌려 준 이들은 믿음을 배신당했다면서 고소를 한다. 아직도 돈을 못 갚고 있고, 돈을 꾸어 간 사람이 많은 채무를 부담하고 있었지만 수입은 신통치 않았다는 사정이 확인되면 사기죄로 재판이 청구된다. 사기죄가 인정되면,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질 수 있다. 6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 원 이하의 벌금이 규정된 절도죄 보다 나쁜 범죄이다.

이런 사건의 법정에서 사람들은 대개 "죽을죄를 지었다. 어떻게든 신속하게 빚을 갚을 테니 한번만 선처해 달라"고 한다. 그러면 대부분 자백으로 받아들여져서 고소인 진술 정도를 보태어 유죄판결을 한다. 그 처벌수위만 사건에 따라 벌금형, 집행유예, 실형으로 갈라지는데, 그러한 구분의 가장 중요한 잣대가 빚의 규모와 상환 여부이다.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서 빚을 갚아야 선처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이 돼 버린다. 이런 형태의 사기죄는, 돈을 빌려야 하는 사람들만 지을 수 있는 범죄이다. 돈을 빌릴 이유가 없는 부자는 지으려야 지을 수 없다. 그야말로 무전유죄이고, 유전무죄 아닌가.

그래서는 안 된다. 우리나라도 가입해 발효돼 있는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은 "어느 누구도 계약상 의무의 이행불능만을 이유로 구금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비록 선언적이기는 하지만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가지는데, 사실은 우리의 헌법과 형법 등에 이미 반영돼 있는 기본정신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기본권이 보장되는 원리는 단순하다. 법관이 '나중에 빚을 갚지 못하게 되었지만, 처음부터 돈을 떼어먹으려 하였다고는 볼 수 없는 경우' 또는 '돈을 떼어 먹으려 한 것이라는 점에 대한 합리적 의심이 없는 증명이 되지 않은 경우'를 잘 골라내어 거기에는 과감하고 단호하게 무죄를 선고하면 된다. 그것은 민사상 문제가 남아 있을 뿐, 형사처벌이 필요한 경우는 아니라고 판결하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재판을 하려면 필요한 것이 하나 있다. 재판을 받는 사람이 함부로 "죽을죄를 지었다"고 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무조건 형사법상의 자백이 되는 것은 아니다. 법관은 진의(眞意)가 무엇인지 찾아야 한다. 그러나 일단 "죽을죄를 지었지만, 이번만 선처해달라"고 말하면, 재판은 그에 맞춰 돌아가기 십상이다. 정밀한 심리가 진행되지 못할 위험이 생긴다. 그래서 갚지 못한 빚이 많은 사람일수록 감옥에 갈 가능성이 많아진다. 그러다보면 가난해서 유죄냐고, 이게 개판이지 재판이냐고 판사를 비난하기도 한다.

헌법은 "형사피고인은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고 말한다. 법관인 나는 항상 신명을 다해 그 명을 받들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나 역시나 이기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굳이 다투지 않으면서 처벌을 받겠다는데도 구태여 무죄가 아닐까 의심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이 지면을 빌어서, 내가 사랑하는 대전·충청의 모든 시민들에게 감히 고한다. 죽을죄를 지었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 진심을 말하라. 어찌된 일인지 소상히 말하라. 법관은 들을 준비가 돼 있다. 법관은 당신의 그런 말을 듣느라 시간이 축났다고 당신에게 '괘씸죄'를 묻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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