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한의 역사 크루즈] 기사도와 시대의 황혼

임용한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2023. 1. 16.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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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용한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서울=뉴스1) 임용한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백년 전쟁이 막바지에 달할 무렵, 프랑스 왕의 편에 선 부르봉의 제후 루이는 영국군 기사가 지키는 작은 성을 공격했다. 당시의 성들은 설계적으로는 거의 완벽한 수준을 달성하고 있어서 아무리 강력한 군대로 공격해도 함락시키기가 쉽지 않았다. 정면 공격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루이공은 고전적인 방식대로 땅굴을 파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비대도 터널공사를 알아차렸다. 보통 터널을 막는 방법은 위에서 무너트리는 것이지만 터널이 깊게 들어오면 이 방법이 쉽지 않다. 수비대는 과감하게 맞굴을 파서 두 굴이 서로 관통하게 했다. 왜 이랬는지 모르겠지만, 사람 하나가 지나갈 좁은 통로에서 일대일 대결을 펼친다는 것이 기사의 환상을 자극했던 것 같다.

루이공은 한술 더 떠서 수비대장에게 귀족 중에서 대표를 뽑아 터널에서 결투를 벌이자고 제안했다. 대단히 낭만적인 제안 같지만, 결투에 대한 로망과 집착증은 백년 전쟁을 일괄하는 특징이었다. 처음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영국의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의 필리프 6세에게 결투장을 보냈었다. "애꿎은 병사들의 피를 흘리지 말고 우리들이 결투로 전쟁의 승부를 내자, 그것이 싫다면 양측에서 100명씩 기사를 보내 승부를 내자".

전쟁사에서 아주 드물게 이런 식의 결투가 벌어진 적이 있기는 했다. 어쩌면 우리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은 결투가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부하를 대신해서 대장끼리 승부를 겨룬다. 이런 결투는 기사도 정신의 꽃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몇 개 안 되는 사례로 보면 승부의 판정은 전혀 기사도적이 아니었다.

이런 결투는 한 번도 전투를 대체하지 못했는데, 승자를 판정하는 기준이 없었거나 양측이 승복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서로 자기들이 이겼다고 주장하거나 상대가 반칙을 썼다고 항의했다. 마치 축구경기를 시작하기 전에는 웃고 악수를 나누지만, 경기에 몰입하면 난투극을 벌이고 판정에 불복하며 퇴장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럼에도 경기 시작 전에 악수를 하듯이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결투를 요구하는 것이 100년 전쟁 내내 유행했다. 이번에도 그럴 것 같았는데, 수비대장이 정중한 답신을 보내왔다. '우리 측에는 기사가 없다, 유일한 기사는 하급기사인 자신뿐이다, 만약 하급기사라도 괜찮다면 결투에 응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루이는 즉시 응낙했고,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이 터널로 내려갔다. 두 사람은 터널에서 만나 결투를 벌였는데, 굴이 좁아 대형 무기를 가져갈 수 없었다. 검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는데 양측 다 플레이트 갑옷으로 중무장을 해서 서로 상처 하나 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실전은 실전인지라 두 사람은 완전히 열중했다.

그러던 중에 수비대장이 상대가 루이공 자신임을 알아차렸다. 최상위 귀족이 하급기사인 자신을 상대해 준데 감동한 수비대장은 만약 자신을 정식 기사로 서임해 준다면 항복하겠다고 제안했다. 루이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우리들만 이 재미를 즐길 순 없으니 부하들이 모두 한 번씩 시합을 한 뒤에 항복하라"고 말했다.

기사도에 관한 가장 전설적인 미담은 프랑스의 선량왕 장2세의 일화일 것이다. 영웅담에 나오는 기사를 흠모했던 장2세는 푸아티에 전투에서 영국의 흑태자에게 패해 아들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 영국 정부는 장2세의 몸값으로 영토의 1/5과 50만 파운드를 요구했다. 당시 영국 왕이 영국과 노르망디에 있는 영국령에서 거두는 1년치 세금이 6만 파운드였다. 프랑스 최고 귀족의 몸값이 5000파운드였으니 - 아무리 영국에서 왕족에 해당하는 호화생활을 하고 있다고 해도 - 국왕(세자를 포함한)의 무게를 실감하는 금액이었다.

도저히 몸값을 감당할 수 없었던 프랑스는 분할납부를 제안했다. 그러자 선량왕은 자신을 풀어주면 프랑스로 돌아가 나머지 금액을 성실히 갚겠노라고 제안했다. 영국 측도 생각해 보니 프랑스 왕이 오랫동안 국외에 있고, 국민에게 가혹한 몸값을 징수하고 있으면 그의 왕좌가 위태로울 것이 뻔했다. 선량왕은 선서를 하고 아들을 인질로 남겨두고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런데 런던에 있던 아들이 어떤 시골 여인과 사랑에 빠져 런던에 머무른다는 약속을 어겼다. 이 소식을 들은 선량왕은 기사의 맹세를 지키겠노라고 스스로 영국 진영으로 돌아가 다시 포로가 되었다. 장2세는 프랑스로 돌아오지 못했지만, 영국에서 편안하게 살았다. 귀부인들에게 하도 인기가 많아서 전장에 있을 때보다 더 많은 영국의 귀족 남성들에게 전전긍긍하며 잠 못 이루는 밤을 선물했다.

장2세의 이야기는 감동적이라기 보다는 기이하다. 그를 선량왕이라고 부르는 것에 발발하는 학자도 있다. 선량한 것이 아니라 멍청한 것이 아닌가라고 말이다. 장2세의 정신상태를 감정하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14세기는 기사도의 전성기였다. 이런 기이한 일화가 발생할 정도로 귀족들은 기사다움, 기사스러움에 열중했다.

크레시 전투, 푸아티에 전투, 아쟁쿠르 전투에서 프랑스 기사단은 몰살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군사적, 전술적 요인을 지적할 수 있지만, 프랑스 귀족들의 '기사다움'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열정도 패배에 중요한 요인이었다. 크레시 전투에서는 앞 열의 기사대가 낙엽처럼 쓰러지고 전멸하는 것을 보면서도 다음 열의 기사대가 물러서지 않고 돌진했다. 아쟁쿠르에서는 무거운 풀플레이트 갑옷을 입고 말에서 내린 기사들이 진창을 허우적대며 걸어가야 했음에도, 기어서라도 전진했다.

탈진한 기사들은 서서 기다리고 있던 영국 보병들의 몽둥이 세례를 맞고 기절했다. 그나마 이건 나은 경우이다. 죽지 않고 포로가 될 가능성이 높다. 진창에 쓰러져 허우적거리는 기사에게 영국 보병들은 안면갑을 벗기고, 단검을 투구 안으로 찔러 넣었다.

무엇이든지 정도가 과하다는 것은 비정상적인 이유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14세기는 사실은 기사의 몰락시대였다. 크레시 전투에서 중세의 꽃이라고 하는 귀족기사들은 평민 출신의 직업군인인 영국의 장궁병과 보병에게 쓰러졌다.

전문가가 혈통과 세습적 특권, 혹은 취미생활을 이기는 시대가 도래했다. 백년 전쟁 중에 병사들은 전문화된 직업군인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장교단은 귀족 출신들이 장악하긴 했지만, 귀족 중에서도 군인적성이 있고, 군인이 되고자 하는 인물들이 자리잡았다. 평민 출신으로 장교가 되는 사람도 많았다. 바야흐로 혈통 귀족의 시대가 저물고 있었다.

중세 귀족과 기사에서 전장에서의 퇴장은 그들의 사회적 권력, 세습적 권력도 도전을 받는다는 의미였다. 한 시대가 저물어갈 때 사람들은 더 진한 향수에 사로잡힌다. 귀족들은 엄청난 비용을 멋진 판금갑옷과 마상 창시합(토너먼트)에 투자했다. 서구의 박물관, 특히 군사박물관에 가면 빠짐없이 갖추고 있는 컬렉션이 풀 플레이트 갑옷이다. 왕과 귀족들의 갑주를 보면 설계의 섬세함과 기능성에 놀란다. 판급갑옷과 안면갑을 갖춘 강력한 투구가 등장하면서 갑주를 파괴하기 위한 무기도 다양해졌다.

마치 전차가 등장하자 대전차무기가 등장하고, 이에 대응해서 경사장갑, 복합장갑 같은 기술이 발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플레이트 갑옷도 섬세하게 진화한다. 갑옷에 경사를 주고, 홈을 파고, 주요 부위에 이중 삼중 장갑을 댄다. 특히 아무리 튼튼한 투구라고 강력한 창의 공격을 막아낼 강도는 없었기에 창을 미끄러트리고 눈과 같은 취약부위를 보호하기 위한 이중삼중의 안전장치를 고안한다.

이런 갑옷은 섬세한 설계와 높은 비용을 요구한다. 그런데 이 대부분이 전쟁터가 아니라 토너먼트 시합을 위한 장비였다. 장2세도 토너먼트 애호가였지만 토너먼트의 경력이 전투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증명되자 기사들은 더더욱이 토너먼트에 열중했고, 토너먼트에서는 화살이나 핼버트 공격을 받을 일이 전혀 없음에도 온갖 무기와 전투에서의 다양한 상황을 대비한 멀티 플레이어형 갑옷을 입고 시합장에 등장했다.

전쟁에서 멀어지니 적과 포로에 대한 관용을 베풀 기회도 드물어졌다. 그 부분을 여인에 대한 매너로 대체되었다. 사실 이 시대는 물론이고 20세기까지도 기사든 아니든 전쟁터에서는 노약자, 여인을 가리지 않고 온갖 잔혹행위가 일상사로 벌어지고 있었지만, 궁중무도회와 사교장에서 여인에 대한 매너는 기사의 품격을 드러내는 기준이었다. 루이 14세는 프랑스 왕 중에서도 최고의 권력을 누렸지만, 여인에 대해서는 아낌없이 매너를 준수했다.

적, 포로, 여인에 대한 배려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스포츠맨십을 포함해서 분명 여러 면에서 기사도는 후대에 긍정적인 영향을 남겼다. 하지만 14세기의 귀족들은 기사도라는 보상심리에 빠져서 시대의 변화를 외면하고 스스로 시대의 주역으로 거듭나는 노력에서 뒤처졌다. 조선 후기 연암 박지원이 '호질'과 '양반전'에서 신랄하게 풍자한 양반들의 행태도 원래 정상적인 양반의 행동이 아니었다. 17세기 이후 신분제가 무너지고 양반들의 위기감이 강해지면서 기형적인 생활윤리로 표현된 것이다.

우리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변화가 너무 빠르고 거세서 저절로 혁신에 쓸려 가는 삶 같지만, 실제로는 퇴행적 행동에 더 많이 빠진다. 아직 광택도 빠지지 않은 제품이 어느새 낡은 것이 되는 세상이다 보니 퇴행적 행동이 기괴해 보이지도 않고, 판정하기도 어렵다. 그러다 보니 집착과 자기합리화는 더 강해지고, 소통과 담을 쌓고, 끼리끼리 어울린다. 동굴에서 만난 루이공과 수비대장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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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hkmy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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