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칠부 다이어리] 안나푸르나에서 닭 백숙을 삶다
틸리초호수(4,920m)와 메소칸토 라(5,467m) 넘는 20일간의 트레킹
네팔 히말라야에서 안나푸르나만큼 자동차가 깊숙이 들어오는 곳도 없지 싶다. 고소적응에 문제 되지 않는다면, 카트만두에서 마낭Manang(3,540m)까지 이틀이면 갈 수 있다. 사실 처음 안나푸르나에서 걸을 때 가장 실망했던 게 이런 길이었다. 풍경은 좋지만 수시로 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가는 자동차 때문에 고개 돌리기를 몇 번. 현지인을 위한 발전은 필요하겠지만 사람이 걷는 길만큼은 찻길이 아니었으면 했다.
점심때쯤 마낭에 도착했다. 대부분은 고소적응을 위해 여기서 쉬어간다. 우리는 시클레스Sikles(1,980m)부터 보름간 걸은 터라 문제가 없었다. 오랜만에 샤워하고 등산화와 침낭을 햇볕에 널었다. 트레킹 중에도 쾌적함을 유지하는 방법이다.
영양보충을 위해 백숙을 주문했다. 생강과 마늘이 듬뿍 들어가 맛이 제법 괜찮았다. 어떤 이들은 히말라야에서 한식을 먹는 것에 유난 떤다고 말한다. 로지Lodge(여행자 숙소)의 음식은 대부분 어설픈 서양식이다. 평소 먹던 것을 먹는 사람들은 괜찮을지 몰라도 입맛에 맞지 않으면 괴롭다.
특히 연세 있는 분들은 적응이 쉽지 않다.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아무려면 어떤가. 오히려 히말라야에 한식이 있다는 게 놀랍지 않은가. 그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의 영향력이 커졌다는 뜻이기도 하고.
틸리초 베이스캠프Tilicho BC(4,150m)로 가는 길에 일행이 한 포터에게 춤을 부탁했다. 설마 정말 춤을 출까 했는데 그 친구는 음악도 없이 몸을 흔들었다. 괜히 보는 내가 쑥스러웠다. 네팔 사람들은 술이 들어가지 않아도 춤과 노래를 잘했다. 아무리 수줍은 친구라도 춤을 출 땐 빼지 않았다.
네팔은 무수히 많은 신과 다양한 민족만큼이나 축제도 많다. 무려 70여 개나 된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가족이나 마을의 크고 작은 축제에서 자연스럽게 춤을 익힌다. 이들에게 춤은 기본적인 놀이이고 자연스러운 문화다. 춤 자체가 생소하고 어색한 나에겐 그런 자연스러움이 부러웠다.
우리 일행은 모두 셋. 함께한 포터들은 대학생으로 방학을 이용해 학비를 번다고 했다. 끼가 많은 한 친구는 네팔 뮤직비디오에 출연한 경력이 있는 배우였다. 네팔 젊은 친구들은 일찍 결혼해서 생계를 책임지는 경우가 많은데, 공부를 많이 할수록 결혼도 늦어진단다.
안나푸르나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을 꼽으라면, 나는 틸리초 베이스캠프와 틸리초호수Tilicho Lake(4,920m)로 가는 길을 꼽겠다. 신화 속에 나올 법한 길은 달의 어디쯤을 걷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들게 했다.
한 달 정도의 시간이 있다면 안나푸르나 3패스(나문 라 4,850m, 캉 라 5,322m, 메소칸토 라 5,467m)를 추천하고 싶다. 적당히 대중적인 곳과 오지를 두루 경험할 수 있는 매력적인 코스다. 물론 한 달이라는 시간을 소화할 수 있는 체력과 인내, 약간의 모험심이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하얗게 분칠한 미녀의 얼굴
이튿날 아침 틸리초호수로 출발했다. 다른 이들은 호수에서 되돌아오지만 우리는 호수를 지나가야 했다. 틸리초호수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호수 중 하나다. 가을이면 짙푸른 색이 환상적인 곳인데 봄에 만난 호수는 하얗게 얼어 있었다.
틸리초호수에서 틸리초 콜라 베이스캠프Tilicho Khola BC(5,024m)는 코앞인 것처럼 보였다. 앞서간 팀의 발자국이 길잡이가 되었지만 눈이 무릎까지 빠졌다. 잘 걷다가도 한 번씩 고꾸라졌다. 먼저 간 포터들은 진흙탕에 빠진 것처럼 버둥거렸다. 노란 옷을 입은 남자는 아까부터 계속 우리를 촬영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러시아인이며 좀솜Jomsom(2,720m)에서 3일 동안 혼자 메소칸토 라Mesokanto La를 넘어왔다고 했다. 메소칸토 라에 이탈리아 원정팀이 로프를 설치해 놨다는 정보도 알려줬다.
그런데 어딘가 좀 이상했다. 그는 횡설수설하면서 촬영을 멈추지 않았다. 포터들도 그런 낌새를 눈치 챘는지 슬금슬금 자리를 떴다. 그는 우리가 멀어지는 것까지 촬영하더니, 아무 일 없다는 듯 틸리초호수로 향했다.
야영지는 특별할 게 없었다. 그저 다른 곳보다 높을 뿐이었다. 작은 텐트에 셋이 우겨 앉아 늦은 점심으로 짜장라면을 끓였다. 산 아래에선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산 위에선 몇 젓가락도 아쉬웠다. 걷는 날이 길어질수록 자주 배가 고팠다. 결국, 계획에 없던 라면 하나를 더 끓였다.
트레킹 중 요리사가 없는 우리의 식사 방법은 이랬다. 아침과 저녁은 가이드가 그들의 밥을 할 때 같이 했다. 거기에 우리가 챙겨온 반찬을 꺼내서 먹었다. 마트에서 파는 진공 포장된 반찬인데 김치, 무말랭이, 깻잎, 마늘종 등이다. 점심은 가져 온 버너와 코펠로 직접 라면을 끓였다.
새벽 3시 반. 큰 고개를 넘는 날이면 기상 시간이 빨라졌다. 알람 소리에 벌떡 일어났지만 잠을 잔 것 같지 않았다. 5,000m가 넘는 곳에서는 늘 그랬다. 비좁은 주방 텐트에 앉아 억지로 김치죽을 먹었다. 걷는 게 뭔지, 먹는 게 뭔지 괜히 한숨이 나왔다. 이제는 힘든 트레킹을 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금세 잊고 다시 찾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오른쪽으로 내내 우리를 호위하는 하얀 장벽이 보였다. 틸리초 피크Tilicho Peak(7,134m)다. 10km에 달하는 대장벽을 가까이에서 보니 황홀했다. 높은 곳에 서면 그곳만의 고요함이 있다. 모든 것이 정지된 것 같은. 이만큼의 높이에서 이만큼의 거리를 유지하며 바라보는 산. 내게 있어 설산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감히 저 산을 오르고 싶다는 욕망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내가 히말라야를 찾는 건 특별한 철학이 있어서도 아니고, 그들의 문화에 관심이 있어서도 아니다. 그저 이곳을 보고 걷는 게 좋다. 낯선 곳을 걷기 위해 팀을 꾸리고, 그걸 현실로 만드는 일이 즐겁다.
잡힐 것처럼 촛대봉이 가까워지더니 금방 메소칸토 라에 도착했다. 바람에 몸을 가누며 하얀 틸리초호수와 뾰족한 촛대봉을 바라보았다. 저 아래 우리가 가야 할 좀솜도 보였다. 이 고개를 사이에 두고 양쪽의 풍경이 참 달랐다. 한쪽은 온통 얼음 장벽과 눈으로 덮여 있고, 다른 한쪽은 다채로운 색을 가진 황량한 사막 같았다.
하이 카르카에서의 마지막 야영
여러 날 히말라야를 걸으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면, 히말라야는 한 가지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중에게 익숙한 히말라야는 설산으로 가득한 풍경이다. 하지만 히말라야는 낮은 곳과 높은 곳을 모두 아우른다. 저지대의 정글과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 서북쪽의 척박하고 황량한 풍경, 넓게 펼쳐진 빙하지대까지 모두가 히말라야다.
듣던 대로 하산 길이 무지막지하게 가팔랐다. 우리는 이탈리아 원정팀이 설치해 놓은 고정 로프를 잡고 내려갔다(봄철에는 반드시 로프를 챙겨야 한다). 겁을 먹지 않으면 스틱과 아이젠만으로도 충분했다. 신중하게 한 발자국씩 내려섰다. 앞을 바라보니 허공에 떠 있는 것만 같았다. 도대체 포터들은 그 무거운 짐을 지고 어떻게 내려간 건지.
어느덧 마지막 야영지인 하이 카르카High Kharka(4,190m)다. 과연 넘을 수 있을까 고심했던 순간도 이제 찰나가 되었다. 우리는 텐트를 치고 포터들은 무인 대피소에 짐을 풀었다.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간다는 건 누구에게나 즐거운 모양이다. 마지막 야영이라 그런지 다들 표정이 밝았다.
밤새 눈이 내렸다. 며칠 전에는 하루만 늦었으면 했는데, 이번에는 하루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지금의 일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누가 알겠나.
4시간이 꼬박 걸려 좀솜에 도착했다. 히말라야에선 두 가지 행운이 필요하다. 하나는 날씨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이다. 이번 트레킹은 날씨가 아쉬웠지만 사람 운이 좋았다. 스태프들과 뒤풀이를 하는데 일행 하나가 안나푸르나 지도를 꺼냈다. 우리는 지도에서 자기가 원하는 지역을 찾아서 하고 싶은 말을 적었다.
한국어, 네팔어, 영어가 뒤섞였다. 10명이나 되는 사람이 지도 한 장을 꽉 채웠다. 멋졌다! 이런 아이디어를 낸 일행이 기특했다. 혼자 다닐 땐 뒤풀이가 없거나 조용히 끝나곤 했는데 함께하니 이렇게 훈훈했다.
마지막 날 아침. 이제 돌아갈 일만 남았다. 막 출발하려는데 한 친구가 우리에게 '카타(축복을 의미하는 스카프)'를 걸어주었다. '내 안의 신이 당신 안의 신께 경배드립니다'라는 그들의 인사처럼, 가슴 안쪽으로 따뜻함이 몰려왔다.
"나마스테!"
기본일정
다라파니(1,860m)-차메(2,670m)-어퍼 피상(3,300m)-나왈(3,660m)-마낭(3,540m)-틸리초 베이스캠프(4,150m)-틸리초호수(4,920m)-틸리초 콜라 베이스캠프(5,024m)-메소칸토 라(5,467)-하이 카르카(4,190m)-좀솜(2,720m)
틸리초 콜라 베이스캠프에서 하이 카르카까지 2일간의 야영이 필요하다. 트레킹은 12일이면 되지만 예비일과 이동 시간을 포함해 17~20일 정도가 좋다. 난이도는 안나푸르나 토롱 라Thorong La(5,415m)보다 약간 높은 편이다. 트레킹 적기는 날씨가 가장 좋은 10~11월이다.
월간산 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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