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신일본인!' 외쳤던 이봉창, 그는 왜 일제의 '대역죄인'이 되었나[이기환의 Hi-story]
얼마전 보물로 지정된 유물 가운데 ‘이봉창 의사 선서문’이 특히 제 눈에 띄었습니다.
‘나는 적성(진심)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야 한인 애국단의 일원이 되야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서하나이다. 대한민국 십삼년 십이월 십삼일 선서인 이봉창. 한인애국단앞.’
이미 보물로 지정된 윤봉길 의사(1908~1932)의 선서문과 내용이 비슷한 문서인데요. 물론 다른 문구가 있어요.
이봉창 의사(1901~1932)는 ‘적국의 수괴(일왕)’, 윤봉길 의사는 ‘적의 장교(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일본 상하이 주둔군 사령관)’ 등 도륙의 대상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런데 ‘이봉창 의사 선서문의 보물 지정’ 보도자료를 보면 고개를 갸웃 거릴 만한 사진이 첨부되어 있습니다.
어릴 적부터 교과서는 물론 각종 언론 자료 등에 소개된 이봉창 의사의 이미지, 뭐 다 아시죠. 말끔한 양복 차림에 양손에 수류탄를 들고 밝게 웃고 있는 사진이죠.
그런데 보도자료에는 흐릿할 뿐 아니라 표정도 다소 굳은 이봉창 의사를 담은 사진이 첨부되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봉창 의사의 시그니처 이미지’로 알려진 ‘활짝 웃는 사진’이 합성사진으로 뒤늦게 밝혀졌거든요.(배경식 역사문제연구소 부소장의 ‘<식민지 청년 이봉창의 고백>, 휴머니스트, 2015’에서)
■웃는 이봉창 사진은 합성이었다
현전하는 이봉창 의사의 거사 직전 사진은 4~5장 정도 됩니다.
그 중 1931년 12월13일 제1호 한인애국단원이 되면서 선서식을 거행할 때 찍은 사진이 2점으로 추정되는데요.
그 1장은 거사 직후 이봉창 의사가 간직하고 있다가 일본 경찰에 의해 증거품으로 압수된 사진인데요.
이번 보도자료에 첨부된 그 사진입니다. 또 1장은 백범 김구 선생(1876~1949)이 거사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중국 신문 등에 배포한 사진입니다. 또다른 1장은 오버코트에 두 손을 넣고 활짝 웃는 모습의 이봉창 의사의 사진입니다.
이 사진은 또 언제 찍었을까요.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에 따르면 단서가 있습니다.
“선서식 후(이봉창 의사 신문조서에는 17일 아침)…내(백범) 얼굴에 처연한 기색이 있었는지, 이씨(이봉창 의사)가 말했다. ‘영원한 쾌락(일왕 처단)을 누리고자 이 길을 떠나니, 두 사람이 기쁜 안색으로 사진 찍자’고….”
그렇다면 ‘합성’으로 판명된, 가장 유명한 사진은 무엇일까요.
<도왜실기>라고, 1932년 백범이 한인애국단의 활동을 정리해서 중국어판으로 펴낸 책이 있는데요. 그런데 해방 후인 1946년 출간된 <도왜실기> 한글판에 ‘수류탄을 들고 활짝 웃고 있는 합성사진’이 실린 겁니다.
자세히 보면 정말 수류탄을 든 양 손과, 배경 속 태극기는 ‘그려넣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목에 건 선서문도, 얼굴의 목선도 어색하기 이를데 없죠.(배경식 부소장) 거사를 더욱 극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사진에 손을 좀 본 거겠지요.
또 이봉창 의사의 선서문에도 이상한 점이 보입니다. 전체 내용 글과, ‘날짜 및 ‘서명’의 색깔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을 말해줄까요. 누군가 선서문을 미리 작성해두었고, 이봉창 의사가 선서문의 ‘빈 날짜’란과 ‘빈 서명’란을 채웠습니다.
■이봉창·윤봉길 선서문의 비밀
그렇다면 이봉창 의거의 의미가 퇴색되고, 따라서 선서문(사진 포함) 또한 보물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수류탄을 들고 안들고’가 문제가 되지 않을 겁니다. <백범일기>에 뭐라 했습니까.
이봉창 의사가 표정이 굳어있던 백범에게 “영원한 쾌락을 위해 떠나는데 웃으면서 사진을 찍자”고 했죠.
그렇다면 ‘죽음마저 초월한 찬란한 미소’가 맞습니다. 또 1946년의 합성사진 또한 그 웃음 띤 얼굴을 살짝 얹은 거구요. 그 분도 투사이기 전에 인간인데 거사를 위해 떠날 때 얼마나 심경이 복잡했겠습니까.
담담한, 아니 약간은 굳은 표정의 사진이 그 심경을 대변하고 있죠. 따라서 웃는 사진도, 또 그 웃는 얼굴로 합성한 사진도 보물의 가치가 차고 넘치는 사료라 할 수 있습니다.
날짜와 이름만 써넣은 선서문은 또 어떨까요. 그러나 이봉창 의사 뿐이 아닙니다. 윤봉길 의사 역시 미리 작성된 선서문에 이름만 써놓았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이 결성한 한인애국단의 제1호 단원이 바로 이봉창 의사였습니다.
또 윤봉길 의사가 백범을 찾아와 “(이봉창 의사처럼) 나를 독립운동 자원으로 써달라”고 했죠. 이봉창 의사의 도쿄(東京) 의거가 없었다면 윤봉길의 훙커우(虹口) 공원 의거 역시 일어났을까요. 두 선서문 다 보물의 가치가 차고 넘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일본인 ‘기노시타 쇼조’와 이봉창
이제 각종 재판 관련 기록(‘신문조서’, ‘청취서’, ‘검증조서’, ’의견서’, ‘상신서’ 등)과 백범 김구의 저작물(<백범일지> <동경작안의 진상> <도왜실기>) 등을 토대로 이봉창 의사의 행적을 추적해봅시다.
사실 그 분처럼 반전의 인생을 산 분은 드물겁니다.
이봉창 의사는 ‘서른 즈음’이 될 때까지 ‘독립운동’의 ‘독’자도 생각하지 않았던 인물이었답니다.
1901년 용산에서 태어난 이봉창은 집안형편 때문에 보통(초등)학교(4년제)를 졸업한 뒤 생활전선에 뛰어들었습니다. 그후 과자상점·약국 등 일본인이 운영하던 가게와 용산역 등에서 일했구요.
거기서 다른 조선인들이 따라올 수 없는 생활일본어를 거기서 익혔습니다. 이후 오사카(大阪)~도쿄(東京)를 전전하며 갖은 차별을 감내하며 닥치는대로 일했습니다. 그러나 이봉창은 차별을 숙명으로 받아들인 식민지 조선의 청년이었습니다.
오히려 “난 조선인이 아니라 (한·일 합병으로 탄생한) 신일본인’이라고 외쳤습니다. 이봉창은 ‘기노시카 쇼조(木下昌藏)’로 개명하며 철저한 일본인으로 살고자 합니다. 하지만 신분은 계속 들통이 났고, 그럴수록 차별에 대한 좌절감이 더 심해져갔죠.
‘신일본인’임을 자처하며 일왕의 행차를 보러갔다가 까닭없는 예비검속에 걸려 9일이나 구급되었을 때 잠깐 ‘난 별 수 없는 조선인’이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답니다. 잠깐 ‘독립운동’을 떠올리기도 했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답니다.
역시 ‘기노시타 쇼조’라는 일본인 신분을 고집했습니다. 그 사이 조선인 여인이 물건을 훔치러 온 도둑 취급을 받고 있는 데도 선뜻 나서지 못한 스스로에게 양심의 가책을 느꼈답니다. “나는 정말 인정머리 없는 놈이다. 난 왜 조선인이면서 이렇게 비굴하게 살아야 하는 건가.”
■이봉창의 취중진담
급기야 이봉창은 1930년 10월 임시정부가 있는 중국 상하이(上海)로 떠납니다.
“일본에서 일본인으로 위장하고 살면서 고통을 겪었으니 이제 본명인 이봉창으로 살아갈 결심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봉창은 이듬해 1월 초순 임시정부 사무실로 들어섰습니다.
이봉창은 “상하이에서 노동을 하면서 독립운동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러나 <백범일지>의 표현대로 ‘반쯤은 일본말이고 동작조차 일본인과 흡사한 이봉창’을 누가 믿어주겠습니까.
그렇게 기피인물 취급을 받는 줄 알면서도 이봉창은 며칠 뒤 술과 고기를 사들고 찾아와 교민단 직원들과 술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취기가 올라가고 언성이 높아졌습니다. 술자리 대화는 2층에 있던 백범에게까지 들렸습니다.
이때 이봉창의 취중 한마디가 백범의 귀에 꽂혔습니다.
“당신들은 독립운동 한다면서 일왕은 왜 죽이지 못하오?”
“그게 쉬운 일이냐”는 민단 직원들의 콧방귀에 이봉창은 한마디 더 얹었습니다.
“일본에서 일왕의 행차를 맞아 엎드렸는데, 그때 ‘지금 폭탄이 있으면 일왕을 죽일 수도 있겠구나’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백범은 정신이 퍼뜩 들었습니다. ‘일왕 처단이라. 감히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대담한 작전이 아닌가.’
■게다짝을 끌고 나타나는 일본영감
그 즈음 상하이 임시정부는 물론 중국에 한국독립운동의 입지는 위축 일로를 걷고 있었습니다.
1931년 7월 일제는 중국 지린성(吉林省) 창춘현(長春縣) 만보산 지역에 이주한 한인과 현지 중국인과의 갈등을 유발하는 술책을 썼는데요. 일본 경찰이 개입된 유혈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이것이 만보산 사건입니다.
조선에서는 중국인을 배척하는 폭동까지 일어났습니다. 일제의 이간책 때문에 중국 내에서도 한인에 대한 악감정이 커졌구요.
임시정부 내부 사정도 좋지 않았습니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됐고, 20년대 후반에는 해외동포들의 모금도 거의 중단됐습니다. 독립운동가들도 대부분 상하이를 떠났고, 임시정부 고수파만이 외롭게 간판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임시정부 국무회의가 이런 난국을 타개하려고 구상한 단체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한인애국단이었습니다.
“현단계에서 특무공작, 즉 요인을 암살·파괴하는 공작을 펴는 것이 절대 필요하다”는 백범의 제안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임시정부 국무회의는 공작에 사용하는 자금과 인물의 출처 등 전권을 백범에게 위임했는데요.
그 와중에 이봉창의 취중발언을 들은 겁니다. 백범은 그날 저녁 이봉창이 묵고 있던 여관을 찾았습니다.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씨의 말과 표정에서 진심이 묻어나왔습니다.
“제 나이 31살입니다…방랑생활도 맛봤고…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간 육신의 쾌락을 맛봤으니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꿈꾸며 독립사업에 헌신하려고 상하이에 왔습니다.”
<백범일지>는 “나(백범)는 이씨의 위대한 인생관을 보고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고 했습니다. 이봉창 의사는 이때부터 다시 ‘일본인 기노시타’를 자처하고 일본인이 운영하는 철공소에서 일하며 은밀히 임시정부 사무실을 찾아왔습니다.
“술과 고기, 국수를 사가지고 민단 사무실에 자주 찾아왔다. 술에 취하면 일본 노래를 유창하게 부르고 놀아서 ‘일본 영감’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백범일지>는 “하오리(羽織·기모노 위에 입는 웃옷)에 게다(下태·일본 나막신)를 신고 임시정부 청사를 들어오다 중국인 하인에게 쫓겨난 일도 있었다”고 전합니다. 다른 임시정부 요원들은 “한인인지 일인인지 행색이 불분명한 자를 출입시키냐”고 못마땅해했지만 백범은 “다 생각하는 바가 있다”고 무마시켰습니다.
그 사이 백범은 이봉창 의사의 의중을 탐색해보았습니다. 이봉창 의사는 경성(서울)에서, 일본에서 당한 차별과 고생담을 털어놓으며 “폭탄이 있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결행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더 사는 것도 흥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빨리 죽고 싶습니다. 저는 무슨 일이든 중간에 흐지부지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1931년 11월 해외에서 송금된 수백달러의 후원금으로 거사자금을 마련한 백범과 이봉창 의사는 일사천리로 움직입니다.
백범은 12월6일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일왕 폭살 계획을 보고하고, 13일 이봉창 의사의 ‘제1호 한인애국단 입단식과 선서식’을 엽니다. 1932년 12월 17일 폭탄 2개와 거사 자금(300달러)을 들고 상하이를 떠난 이봉창 의사는 22일 도쿄에 도착합니다.
이봉창 의사는 도쿄 아사히(朝日) 신문을 통해 1월8일 도쿄 요요기(代代木) 연병장에서 일왕이 참석하는 육군시관병식(열병식)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봉창 의사는 백범에게 “상품은 1월8일 꼭 팔릴터이니 안심하라”는 암호 전보를 보냅니다.
이봉창은 거사일까지 도와줄 동지 한사람도 없이 혼자 행동했습니다. 따지고보면 폭탄실험도, 예행연습도 하지 않고 도쿄 현장에 왔습니다. 일본인들에게 ‘살아있는 신’으로 추앙받고 있는 ‘일왕의 처단’이라는 어마어마한 거사를 순전히 홀로 감당한 겁니다.
얼마나 외롭고 두려웠겠습니까. 오죽하면 이봉창 의사가 ‘오미쿠지’(길흉을 점치는 제비뽑기)까지 뽑았겠습니까. ‘제35 길(吉)’이라는 길조가 나왔습니다. 이봉창은 이 점괘가 적힌 종이를 백범에게 보내주었습니다. 그만큼 초조감과 불안감을 달래려고 분투했던 겁니다.
■미완으로 끝난 일왕 폭살사건
마침내 1월8일 도쿄 요요기 연병장에서 히로히토 일왕이 참석한 시관병식이 열렸습니다.
이봉창 의사는 행사가 끝날 때까지 일왕의 동선을 놓쳐 큰일 날 뻔 했습니다. 그러나 사력을 다해 뛴 결과 지름길로 겨우 따라잡았습니다. 도쿄 경시청 앞은 궁성으로 돌아오는 일왕의 모습을 보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습니다. 일왕 행렬이 사쿠라다몬(櫻田門)쪽으로 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일왕행렬이 다가오는 것을 기다린 이봉창 의사가 수류탄을 투척했습니다.
“꽝!” 폭탄은 두번째 마차 뒤쪽에서 요란한 굉음을 내며 터졌습니다. 이때가 1932년 1월8일 오전 11시 44~45분 사이였습니다.
아! 그러나 이 거사의 목표인 ‘일왕 폭살’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궁내부 대신이 타고가던 두번째 마차가 부서지는 등 일왕행렬이 아수라장이 되었지만 ‘일왕 처단’은 미완으로 끝났습니다. 일왕은 첫번째 마차에 타고 있었던 겁니다.
거사 직후 이봉창 의사의 행동도 심금을 울립니다. 일본 경찰이 엉뚱한 사람을 체포하자 “그 사람이 아니라 나다. 나야”라고 했다는 겁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무의식적으로 인파를 헤치고 몸을 피할 수도 있었겠죠.
그러나 이봉창 의사는 일왕 폭살의 거사를 비겁하게 다른 이에게 전가시킬 수 없었습니다. 경황이 없는 중에도 대의를 지켜낸 겁니다. 만약 그때 “내가 아니라 그 사람이야”라 했다든지, 혹은 몸을 피했다면 의거의 의미가 퇴색되었을 겁니다.
이봉창 의사는 법정에서 “폭탄의 위력이 부족해 목적을 이루지 못한 것이 유감”이며 “일왕의 목숨을 빼앗고 싶었을 뿐”이라고 당당하게 진술했습니다. 이봉창 의사는 일본형법 제73조에 따라 대역죄인(천황가에 위해를 가했거나 모의 혹은 계획한 죄인)으로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해 9월30일 선고공판에서 사형판결을 받았구요. 10일만인 10월10일 도쿄 이치가야(市谷)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불행(不幸)히 명중하지 못했다(未中)
물론 이봉창 의사의 ‘도쿄 거사’는 미수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이봉창 의거는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척살’(1909), ‘윤봉길 의사의 시라카와 육군대장 등 폭사 의거’(1932) 등과 함께 한국독립운동사의 3대 의열투쟁으로 꼽히고 있습니다.(한시준 독립기념관장의 ‘이봉창 의거에 대한 중국신문의 보도’, <근현대사연구> 36집, 2006에서 )
일본의 심장부인 도쿄에서, 그것이 일본인들에게 ‘살아있는 신’으로 추앙받은 일왕에게 수류탄을 던진 겁니다.
의거가 일어나자 일본 열도는 발칵 뒤집혔습니다. 무엇보다 중국의 반응이 폭발적이었습니다.
중국 신문들은 이봉창 의거 관련 기사를 경쟁적으로 다뤘는데요.
중국 신문의 보도 내용 가운데는 일정한 논조가 있었습니다. 즉 일왕이 처단되지 못한 ‘아쉬움’을 드러낸 것이었는데요.
대부분의 신문 1월9일자에 ‘폭탄이 일황을 적중하지 못했다’는 문구가 들어있는데요. 특히 ‘미중(未中·정확하게 맞추지 못했다)’, ‘미성(未成·목적을 이루지 못했다)’이 눈길을 끌죠.
국민당 기관지인 ‘민국일보’는 더욱 적극적인 표현을 사용했죠. ‘한인이 일왕을 저격했지만 맞추지 못했다(韓人刺日皇未中)’면서 ‘불행(不幸)히도 뒤따라오던 마차를 맞추는 바람에 실패로 끝나고 체포됐다(不幸僅炸副車兇手卽被逮)’고 했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불행 미중(不幸未中·불행하게도 일왕을 맞추지 못했다)’의 논조입니다.
‘신보’ 역시 ‘미성(未成)’이라는 표현과 함께 이봉창 의사를 ‘한국 지사’로 표현했습니다.
‘중앙일보’는 11월11일자에서 한걸음 더 나아갑니다. “일본이 만주 동북지역을 점령하고 중국을 침략할 때…한국지사 이봉창이 단신으로 만군의 호위를 받고 있는 일황을 저격했다”면서 “목적을 이루지 못했지만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들을 놀라게한 소리였다”고 평가했습니다. 이와같은 중국 언론의 보도는 중국내 일본인들은 방화, 살인 등 연일 난동을 일으켰는데요.
특히 ‘불행 미중’의 표현을 쓴 국민당 기관지 ‘민국일보’가 직격탄을 맞았습니다.
일인들은 민국일보사에 난입해서 권총을 난사하고 중국 국민당 시당부를 습격해서 건물전체를 불태우는 불상사도 일어났습니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게 되자 ‘민국일보’는 끝내 폐간되고 말았습니다.
상하이에서도 일본 낭인(浪人)들의 폭동이 계속되었습니다. 일본 총영사가 ‘천황에 대한 불경’이라고 비난하며 폭동을 부추긴 겁니다. 그 폭동은 일본 해군육전대와 중국 19로군 사이의 무력충돌로 비화하는데요. 이것이 ‘상하이 사변’입니다. 이봉창 의사의 의거가 중국-일본간 전쟁으로 확대된 겁니다.(한시준 독립기념관장)
백범은 한국독립당 명의로 이봉창 의거의 정당성, 즉 일왕을 처단해야 하는 9가지 이유를 밝히는 선언문을 중국 언론에 배포합니다. 안중근 의사가 설파한 ‘이토 히로부미의 15대 죄상’을 연상케하는 가슴 후련한 선언문입니다.
그중 “폭악한 일구(日寇·왜구)가 저지른 모든 책임이 바로 이 자(일왕)에게 있고, 도둑을 소탕하려면 먼저 그 수령(일왕)을 잡으라는 말이 있다”는 대목이 눈에 띕니다.
■신일본인은 왜 독립투사가 되었나
이봉창 의사를 보면 몇가지 상념이 떠오릅니다.
이봉창은 ‘서른 즈음’까지도 ‘식민지 조선’에서 한일합병 후에 탄생한 ‘신일본인’으로 살고자 했습니다.
그에게 나라를 빼앗긴 설움 따위는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차별을 받지 않고 ‘신일본인’의 대접을 받을까 끊임없이 고민했습니다. 물론 때때로 ‘조선인’이라는 자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내 다시 철저히 ‘일본인 기노시타 쇼조’로 살아가기로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식민지 조선’에서 살았던 보통 사람들의 고뇌가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봉창 의사는 서울-오사카-도쿄-상하이 등의 역정 속에서 끊임없이 부딪치고 깨져가며 드디어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인합니다. ‘나는 조선인이다. 조선인으로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조선인이다!’라는 자각을 하는 순간 이봉창은 독립투사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차별받지 않으려면 조선인의 나라가 존재해야 했기 때문이죠. 물론 처음부터 ‘독립운동’의 염원을 담고 투신한 분들의 삶도 가치있습니다. 그러나 고통스럽게, 처절하게 밑바닥 삶을 경험한 뒤 급기야 ‘독립운동만이 살 길’이라고 깨달은 이봉창 의사의 선택은 또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그렇게 밑바닥부터 다져온 독립운동의 토대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누구도 깰 수 없는 신념으로 승화되었습니다.
■신일본인→대역죄인→독립투사
혈혈단신으로 도착한 도쿄,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는 그곳에서 일본인들이 ‘살아있는 신’으로 추앙했던 일왕을 감히 처단하려 했던 그 분입니다. 저 같은 보통사람이면 그냥 도피하고 말았을 겁니다. 이봉창 의사가 남긴 ‘거사의 변’을 인용해봅니다.
“일본인은 조선인을 차별 대우하고 학대하고 있다. 조선인은 어떻게든 조선을 독립시켜 조선인의 국가를 갖지 않으면 안된다…결코 이봉창 한사람이 멋대로 벌인 난폭한 행동이 아니다. 조선민족을 대표해서…결행한 것이다.”
어떻습니까. 서른 즈음까지 ‘신일본인’을 자처했던 식민지 젊은이가 불과 몇년 사이에 ‘일본의 대역죄인’으로, 그러나 ‘한국의 독립투사’로 목숨을 바치게 된 겁니다. 한시준 독립기념관 관장의 언급처럼 그 분을 한국의 독립투사로 만든 것은 누구였을까요.
일제였습니다. 말로는 ‘일본인과 조선인은 동등하다’는 일선동화론’을 내세웠죠. 그러나 실상은 어땠습니까.
‘신일본인’으로 그저 평범하게 살고자 했던 청년을 지독한 차별로 내몰았죠. 일제 스스로가 이봉창 의사로 하여금 그들이 신격화하는 일왕에게 폭탄을 던지게 만들었습니다. 자업자득입니다.
아 참! 가만보니 이봉창 의거일(1월8일)이 스치듯 지나가 버렸습니다. 혈혈단신으로 적지에 나가 일왕에게 폭탄을 던진 이봉창 의사의 넋이라도 더는 외롭게 만들어서는 안될텐데….(이 기사를 위해 한시준 독립기념관장과 배경식 역사문제연구소 부소장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독립기념관 임공재 학예연구사와 도서출판 ‘휴머니스트’가 사진 자료를 보내주었습니다.)
<참고자료>
국사편찬위,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료집 29-한인애국단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편찬위, 2008
김구, <백범일지>(정본), 도진순 탈초·교감, 돌베개, 2016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이봉창의사 재판 관련 자료집>, 단국대출판부, 2004
배경식, <식민지 청년 이봉창의 고백>, 휴머니스트, 2015
배경식, <기노시타 쇼조, 천황에게 폭탄을 던지다-인간 이봉창 이야기>, 너머북스, 2008,
이현희, <이봉창 의사의 항일투쟁>, 국학자료원, 1997
한시준, ‘이봉창 의거에 대한 중국신문의 보도’, <한국근현대사연구> 36집, 한국근현대사학회, 2006
한시준, ‘이봉창 의사의 일왕저격의거’, <한국근현대사연구> 17집, 한국근현대사학회, 2001
홍인근, <이봉창 평전>, 나남출판사, 2002
히스토리텔러 기자 l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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