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노래 그 사연] 송대관 ‘차표 한장’, ‘인생 상행선’에 몸을 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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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겨울부터 눈과 추위 탓에 열차 연착 사고가 몇번 있었다.
송대관의 '차표 한장'은 기차를 배경으로 한 남녀의 이별 노래면서 가족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한국인의 염원도 함께 담겨 있기에 큰 인기를 얻었다.
미국 생활 또한 그에게 행복을 주지 못하자 송대관은 1988년 귀국해 가요계 문을 다시 두드렸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노래가 성공하자 상경할 때 무임승차한 기억이 떠올라 서울역에 찾아가 승차권의 몇 배가 되는 돈을 돌려줬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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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겨울부터 눈과 추위 탓에 열차 연착 사고가 몇번 있었다. 다가올 설 연휴에는 별다른 문제 없이 모두가 안전하게 고향에 다녀오길 빈다.
지금은 열차나 버스를 탈 때 매표나 검표를 모두 휴대전화로 하지만 1990년대만 해도 설이나 추석을 앞두고 서울역에 가서 밤새 줄을 선 뒤 종이 차표를 받았다. 간신히 입석표 한장을 구해 열차를 타고 가 부모와 친구를 만난 추억을 가진 사람이 많으리라. 그래서일까. 송대관의 ‘차표 한장’은 기차를 배경으로 한 남녀의 이별 노래면서 가족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한국인의 염원도 함께 담겨 있기에 큰 인기를 얻었다. 이 곡은 송대관이 어려움을 겪던 시절에 재기할 수 있게 도와준 노래이기도 하다.
1946년에 전북 정읍에서 태어난 송대관은 고교 시절 서울에서 열린 노래자랑대회에 입상한 경력이 있을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다.
하지만 그의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그렇다보니 상경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주류 가요계에 진출하는 것이 유일한 살길이었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수가 되겠다며 무일푼으로 열차에 몸을 실었다. 돈이 없으니 무임승차했는데 훗날 성공해 꼭 갚겠다고 다짐하며 검표원을 피해 서울역에 무사히 내렸다.
송대관은 레코드사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혹독한 무명 생활을 거쳤다. 그러다 1975년에 모친을 생각하며 작사한 노래 ‘해 뜰 날’이 대성공하며 가요계 정상에 올랐다. 그는 스타가 됐지만 꿈꾸던 안정적인 삶을 살진 못했다. 결국 1980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고 그곳에서 돈을 벌고자 슈퍼마켓 점원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미국 생활 또한 그에게 행복을 주지 못하자 송대관은 1988년 귀국해 가요계 문을 다시 두드렸다.
마침내 1992년에 ‘차표 한장’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너는 상행선 나는 하행선 열차에 몸을 실었다”라는 가사처럼 당시 송대관은 인생의 상행선과 하행선을 모두 경험하고 나타난 것과 같았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노래가 성공하자 상경할 때 무임승차한 기억이 떠올라 서울역에 찾아가 승차권의 몇 배가 되는 돈을 돌려줬다고 밝혔다.
고향을 생각하면, 중국 시인 도연명이 41세에 중앙관직을 버리고 귀향하며 남긴 ‘돌아가련다. 전원이 거칠어지는데 어찌 안 돌아갈쏘냐(귀거래혜 전원장무 호불귀·歸去來兮 田園將蕪 胡不歸)’라는 시구가 떠오른다.
도연명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과감히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번 설만큼은 많은 분이 부모·친지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맞이했으면 한다.
박성건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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