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양강댐의 빛과 그림자] 3. ‘한강의 기적’ 시작점 소양강댐

오세현 2023. 1. 16. 05:0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전국서 몰려든 공사 인력 3000명 ‘산업화’ 봇물
박정희 정권 산업기반 목적 추진
현대 고 정주영 회장 사력식 변경
동양 최대규모 사력댐 기술력 상징
1966년 한강유역합동조사단 구성
건설비·지질·조건 최적합 부지
치수·이수 가능한 ‘다목적댐’ 결정
공사 시작 후 시골마을 연일 들썩
6년간 인구 1만2384명→1만7378명
한때 상천초 학생 1700명 달해
사건·사고 등 당대 생활상 눈길

소양강댐은 한강의 기적을 상징한다. 정부가 실시한 4대강 유역 종합개발 사업의 시작이기도 하다. 6·25 전쟁 이후 산업 현대화와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강 하류 지역의 홍수 조절 능력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되면서 소양강댐 건립도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 1971년 촬영한 소양강댐 공사 당시 사진. 현재 소양강댐 주변으로 중장비들이 늘어서 있다. K-water제공

■ 한국 현대사의 출발 소양강댐

소양강댐은 건립 과정 자체가 한국 현대사와 맞물려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서울 지하철 개통, 경부고속도로와 더불어 소양강댐 건설로 산업 기반을 닦으려 했고 현대건설이 참여했다. 더욱이 당시 정부가 콘크리트 중력식으로 댐을 설계했으나 정주영 회장이 모래와 자갈을 활용한 사력식으로 변경해 총공사비를 203억원에서 34억원 줄이고 일본으로 돌아갈 자본 유출을 막았다고 알려지면서 소양강댐은 1960년대 후반, 1970년대 초반 한국의 기술능력을 상징하는 계기가 됐다. 댐 높이만 123m인 소양강댐은 완공 당시 동양 최대 규모의 사력댐이었고 현재도 세계에서 5번째로 크다.

춘천학연구소 ‘춘천인증언록 댐과 춘천’에는 개발 당시 상황이 비교적 구체적으로 소개돼 있다. 소양강댐 건설은 1957년에 구상됐지만 본격적인 시작은 1960년대부터다. 정부는 수자원종합개발 10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소양강댐을 건설하기로 하고 1962년 11월 7일 일본공영주식회사와 소양강댐 시설 설계에 대한 용역을 체결했다. 1966년 한강유역합동조사단을 구성해 소양강댐 건설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전력만 생산하는 단일목적 댐에서 치수와 이수까지 가능한 다목적댐으로 소양강댐을 짓기로 결정했다.

▲ 소양강댐 공사 당시 모습. ‘싸우며 건설하자’는 문구가 눈에 띈다.K-water제공

춘천과 양구, 인제까지 포함되는 소양강댐이 현재 위치에 건립된 이유는 저렴한 발전비용으로 높은 출력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K-water 관계자는 본지에 “소양강은 수많은 협곡과 곡류가 특징이며 암석이 노출된 곳이 많아 댐 건설 적지가 여러군데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며 “소양강댐 지점은 소양강 본류 중 댐 지점으로는 가장 하류에 속하고 또 가장 적합한 지점이라고 결론을 냈다”고 밝혔다. 북한강과의 합류점에서 약 13㎞ 상류에 위치, 건설비는 물론 지질, 조건, 가설비 설치장소와 시공의 난이, 재료운반, 공기 등 모든 면에서 유리하다는 게 K-water의 판단이다. 그렇게 소양강댐 공사가 시작됐다.

▲ 소양강댐 건설 공사가 한창인 모습. 댐 수문 골격이 완성됐다. K-water제공

■ 소양강댐과 신북읍

동양 최대 규모의 사력댐을 짓는 일은 간단하지 않았다. 한적하고 조용했던 시골마을은 연일 들썩였다. 생전 처음보는 트럭들이 쉴새없이 오갔고, 건설 현장에 사람이 몰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지역 명물이 된 세월교도 소양강댐 공사 당시 장비 등을 운반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후 50여 년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신북읍에 살고 있는 이상익(81)씨는 소양강댐 공사의 산증인이다. 1965년 공사 시작전부터 1973년 완공까지 그는 9년 간 소양강댐 공사에 참여, 중장비 운전을 맡았다. 현대건설 시험을 통해 채용됐다. 하류파트 작업반장과 혼합반 반장도 맡았다. 첫째 아이가 1968년에, 둘째가 1971년에, 셋째가 공사 완공 때인 1973년에 태어났으니 그와 소양강댐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 소양강댐 건설 막바지 현장. 소양강댐 수문 공사가 어느정도 진척된 모습이다. K-water제공

소양강댐 공사 현장은 중장비를 이동하는 일부터 쉽지 않았다. 일본 장비가 부산 부두에 내리면 이를 춘천 신북읍까지 끌고 와야 했다. 일본 기계에 익숙하지 않은 운전사들을 교육해야 했는데 이번엔 장소가 문제였다. 그때 상천초등학교와 강변은 좋은 연습 공간이 됐다. 상천초에서 실기시험과 학과시험(필기시험)을 치르고 강변에서 실습을 해 운전면허를 받았다. 이상익씨도 이 과정을 거쳤다. 이상익씨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한국에 중장비 기계가 없었다”며 “상천초 교실을 빌려서 시험을 보고 거기서 된(합격한) 사람에 한해서 실기 시험을 시켰다”고 했다.

모래와 자갈을 활용한 사력댐 방식에 대해서도 이씨는 “처음에 일본 회사와 계획했을 때 기계는 전부 다 일본 장비를 쓰고 ‘공구리(콘크리트를 뜻하는 일본어로 한국에서 변형돼 쓰임)’도 다 일본에서 사오기로 했었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 밑에 참모들이 ‘우리도 자원이 많으니 우리 것으로 하자’고 얘기했고 박 대통령도 ‘한 번 해보자’해서 시작됐다”고 했다.

▲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소양강댐 담수식. K-water제공

사람은 전국에서 몰려들었다. 이상익씨 기억에 따르면 이씨 같은 장비 운전사를 포함해 장비를 다루는 기공만 1800여 명, 목수에 여러가지 일들을 맡는 잡부까지 포함하면 3000여 명 안팎의 사람들이 소양강댐 공사에 참여했다. 신북 지역의 인구 증가는 수치로도 확인된다. 통계청 인구총조사에 따르면 1960년 1만2384명이었던 신북 지역 인구는 공사 시작 직전인 1966년에 1만7378명으로 5000여 명 증가했다. 1970년 1만7128명으로 소폭 감소한 뒤 공사가 끝난 1975년에는 1만3376명으로 급감했다. 이상익씨는 “공사를 시작하고 사람들이 꼬이기 시작해 상천초에 학생이 1700명까지 달했다”며 “공사가 한창일 때는 샘밭 마을이 엄청 커졌다”고 했다.

사람이 몰리는 곳에 사건사고도 끊이지 않는 법. 전표를 받는 노동자들을 대신해 전표를 현찰로 교환해주고 중간에서 이득을 취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예를 들어 100원짜리 전표를 90원에 사고 전표를 모아 교환하는 곳에서 현찰로 바꾸면 중간중개인은 10%를 가져갈 수 있는 구조다. 한두 명만 대상으로 할 때는 소액이지만 전표가 많으면 많을수록 수입이 제법 짭짤하다. 이상익씨는 “일하는 사람은 바쁘니까 돈으로 바꿀 새가 없다. 그런데 돈은 바로 필요하니 중간에서 현찰로 바꿔주는 사람들이 있었다”며 “일하는 사람보다 고생 안하고 머리 써서 돈 버는 방식인데, 그게 세상살이 아니겠는가”라고 했다.

▲ 1965년부터 1973년까지 소양강댐 건설 현장에 투입, 장비를 운전한 이상익 어르신이 본지와 인터뷰를 갖고 사진을 보며 소양강댐 건설 당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꼼수를 부리다 해고되는 노동자들도 부지기수였다. 소양강댐을 사력방식으로 짓기로 하면서 강변에 널려있는 자갈이나 모래를 옮기는 일이 가장 큰 업무였다. 당시 관리·감독부서는 거리를 측정하고 이동거리, 쉬는시간, 이동시간 등을 반영해 노동자 1명 당 모래·자갈을 옮겨야 하는 횟수를 지정했다. 일명 ‘탕 뛰기’다. ‘탕 뛰기’를 다 채우면 문제가 없지만 횟수가 부족하면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다. 요령이 생긴 일부 노동자들은 감시하는 이들에게 담배 등을 제공하기도 하고 서로 말을 맞춰 하루 실적을 조정하기도 했다.

이상익씨는 “새벽에 검수(감시하는 사람)한테 말을 해서 숫자를 맞추다 나중에 적발돼 해고당하기도 했다”며 “지금처럼 일 한 만큼 돈이 제대로 나오는 게 아니어서 영리한 사람은 적게 일하고 더 받고 아닌 사람은 주는대로 받았던 시절”이라고 회상했다. 오세현·정민엽

Copyright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